읽고본느낌

함석헌 읽기(3) - 새 나라 꿈틀거림

샌. 2013. 1. 18. 08:11

함석헌 선생 사상은 비폭력 평화주의다. 선생의 글을 읽어보면 간디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걸 알 수 있다. 비폭력 평화가 뜻은 좋지만 과연 현실에서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과 같은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군대와 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잘못되면 국가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선생은 비폭력 이상을 버리지 않는다. 국가가 망하더라도 뜻은 남는다고 한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살 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북에서 침입하는 경우에도 아무 무력의 대항 없이 태연히 있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심하면 죽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 평화적인 태도로 맞으면 이북군이 아무리 흉악하더라도 절대로 그 흉악을 부리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첫째는 그들도 사람이요 한국 민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그들을 사랑했을 때 총칼이나 이론 가지고는 못 움직였던 그들의 양심을 움직여 인간 본래의 자세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계가 아무리 타락했다 해도 그래도 정의는 살아 있다. 결코 우리를 죽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혹 이것도 저것도 다 실패하여 죽고 만다 해도 우리의 옳은 것은 남는다. 인류가 아주 멸망한다 하면 몰라도 적어도 인류가 생존하는 한 우리의 거룩한 희생으로 반드시 인류 운명에 바로 섬이 될 것이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하다. 선생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당시에 모두 그런 비난을 받았다. 예수나 부처가 꾼 꿈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각성자들은 지상의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정신 혁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쉽게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들어도 들을 귀가 없다. 그것이 인간 역사의 비극이다.


1971년에 쓴 글에서 선생은 현실적인 통일 방안으로 세 단계를 제시한다.


첫 단계는 남북이 불가침조약을 맺는 일이다. 둘째 단계는 군비 축소다. 마지막 단계는 평화를 국시로 하는 단계다. 통일 한국은 비폭력 평화주의를 제창하며 중립을 선언한다.


그때로부터 40년이 넘게 지났지만 남북은 아직 첫 단계의 단추도 끼우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끝없는 군비경쟁에 빠져들고 있다. 중국의 강대국 부상으로 동북아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되기는 어렵다. 민족의 살 길이 뭔지 선생의 글을 읽으며 고민해 보고 있다.

 

 

민아, 민아, 네 걸음이 그렇게도 느리냐. 너를 서민이라 하고 하민(下民)이라, 우민(愚民)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학대했지. 지배자라는 그들이 너를 짜 먹고 너를 벗겨 입고 살면서도, 앉을 때는 너를 깔고 앉고, 길을 갈 땐 너를 타고 가고, 높은 데 오를 땐 네 머리를 밟고 올라가고, 놀 때는 너를 삼손처럼 모욕하고 즐겼지.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다음엔 무지막지한 것들이라고 욕하고 쓸어 구렁에 넣었지... 앞으로는 아니 그럴 것이다. 정치에서 사람과 사람이 동포가 되어 민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된다면 학문 예술에서는 자연과 인생이 참으로 하나되는 진리인, 우주인이 될 것이다. 앞으로 윤리는 우주 윤리지, 인간에게만 한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학문 예술이 윤리화할 것이다. 지금 물질관 우주관이 대단한 진보를 하고 있다. 이제 지구 위에서 메뚜기처럼 뛰고 개구리처럼 자랑하던 생각을 집어치우고 문명이란 것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아는 한편, 이것을 준비 작업으로 하여 지구를 항구로 삼고, 우주라는 큰 바다에서 큰 배질을 시작할 것이다. (1959)


한 종교의 절대를 주장하는 건 제국주의다. 한 종교에 이르는 것은 모든 종교로서만 될 일이다. 죽어 사는 십자가의 정신, 살신성인의 정신, 무위의 정신, 적멸의 정신은 제 믿는 신조에다 먼저 적용할 것이다. 하나되는 데 가장 앞장서야 할 종교가 가장 떨어져서 반동적이다. 아마 인류는 옛날에 기른 양 중 가장 좋은 것을 잡아 바쳤던 것같이 자기네가 이때껏 길러온 가장 아름다운 양심(모든 기성종교의 가장 양심적인 경건한 신자)을 눈물로 잡아 바치고야 하나님 앞에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1959)


새 믿음을 가져야 한다. 새 종교 올 것을 믿는 것이 새 종교다. 우리처럼 믿음 없는 민족이 어디 있나. 못사는 근본 원인은 믿음 없음에 있다. 마지못해 사는 사람처럼 이럴까 저럴까 하는 것이 죄다. 삶은 의무다. 살지 못하면 죄다. 그러므로 살기를 결심해야 한다. 그러면 믿음이 생긴다. 우리로 믿음이 없게 만든 것은 기성종교 기성도덕이다. 거기서 우리를 살 자격 없는 자로 정죄했기 때문에 거기 우리 기가 죽은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그 정죄의 선언을 깨쳐버려야 한다. 그리고 어떤 죄인도 다 불러 하나로 살리는 인류 속에 특권계급을 만들지 않는 종교를, 예수처럼, 석가처럼, 또 한 번 부르짖어야 한다. 네가 믿음으로만 살리라! (1961)


어두운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눈을 감기 때문이요, 길을 모르는 것은 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양명(王陽明)의 말같이, "걸음에 맡겨 걸어나가면 다 평탄한 길이지"(信步行來皆垣途), 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걸음이 길을 내었지 길이 있어서 걸음이 나온 게 아닙니다. 적어도 생명의 길,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길은 그렇습니다. 이 길일까 저 길일까, 길 찾고 있는 놈은 죽게 된 놈, 따라서 정말 살자는 놈은 아닙니다. 살자는 놈에게는 세계가 온통 없어지고 길밖에 아니 뵙니다. 길과 길 아닌 것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절대의 길, 스스로 환한 길을 가진 것입니다. (1965)


세계가 달라진다. 문명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달라진다. 종교도 달라질 것이요, 그 도덕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이 딴 사람, 새사람이 될 것이다. 아마 새 인류가 나올른지도 모른다. 그런 운동이 시작되느라고 이런지도 모른다. 생명 진화의 과정에서 어떤 엉뚱한 것이 나오려고 하는 운동인지도 모른다. 인류가 나올 때 제일 크고 강한 동물 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듯, 나라 중에서 민족 중에서 반드시 강한 것이 다음 단계의 주인은 아닐 것이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정신이다. 다른 예언은 못해도 생명의, 역사의 이번 단계가 보다 더 정신적일 것만은 예언할 수 있다. (1964)


지금 학교는 일종의 신상(神像)이다. 우매한 시대에 부모가 자식을 가져다가 숯불로 달궈놓은 그 신의 철상(鐵像)에 올려놓아 거기서 타 죽는 것을 보고 복이라 기뻐했다 하지만, 우매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문명했다는 현대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유소청년(幼少靑年)을 잡아먹고 커가는 괴물을 보고, 거기 들어만 가면 인간성을 잃고 마는 곳인데, 그것을 보고 교육해준다 절을 하는 것이 무엇이 나을 것이 있나. (1959)


예수는 "내가 길이다" 했다. 내가 길이라고 했단다고, "예수가 길이다" 라고 그대로 말하는 것은 잘못 안 말이다. '내가 길'이란 말이다. 남이 다 내 논 길을 안락하게 가려는 사람은 영영 길을 못 찾고 말 것이다. 그는 향락주의자다. 정말 길은 '내가 곧 길'이 되려는 사람만이 발견한다. 선진국 따라간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멸망의 길인 것을 그들 자신이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새길을 내가 낸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잘못된 정치 경제와 학문 예술의 해독을 가장 많이 받고 희생된 민족이기 때문에, 새 문명을 창작할 자격이 누구보다도 더 있다. 오늘 우리 사는 이 살림은, 그중에서도 비교적 잘산다 하는 살림일수록, 수많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킴으로만 될 수 있는, 개에게 주어 마땅한 죄악의 살림이다. 보다 보람 있는 미지의 세계가 우리를 손짓해 부르고 있다. 의미의 세계. 내가 길이다! (1972)


이 침체한 기분, 이것이 독소다. 질식주의 정치와 교육, 이것이 흉악한 대적이다. 일제시대에 보고 듣던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고개 한 번 기웃해 볼 겨를도 없이 해먹기에 불이 단 버슬아치들 꼴 참 더럽고. 미국식, 소련식, 서양식, 그들 자신들은 그것 때문에 문제되어 버리려면서도 못 버려 고민하고 몸부림하는 그것을 이제 와서야 겨우 만났구나 하는 듯 그 흉내 내고 그 뒷물 받아먹기에 급급해 여념 없는 지도층으로 자임하는 지배자 착취자들의 모양사리 참 답답하고. 내 가슴에 손 대보면 따뜻한 온기 있건만, 따뜻하면 새 것 나온다건만[溫故而知新], 그것 어루만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냉랭하게, 속알머리 없이, 멍청하고 죽은 시체같이 눈 뻔히 뜨고 입 헤벌리고 서는 백성들의 노릇 참 한심하고 슬픈 일이다. (1959)


썩은 살 잘라버릴 용기와 성의를 가지지 못한 자는 자격이 없는 자요, 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다. 그야말로 죽은 자요, 또 죽이는 자다. 혁명은 곧 교육이다. 그러나 혁명은 잘못된 교육이요, 교육은 옳게 된 혁명이다. 혁명가는 살리려다가 죽이는 자나, 교육자는 죽여 살리는 자다. 마땅히 죽일 것을 참 죽이기 위해 살려, 그 죽을 죽음을 내가 죽어 너와 나를 하나로 참 살려내는 것이 교육자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살신(殺身) 아니하고는, 내 몸을 희생하지 않고는 인(仁)은 없다. 교육은 없다.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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