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석 전기

샌. 2013. 1. 31. 08:09

'류영모와 그의 시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제자인 박영호가 쓴 다석 선생의 전기다.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 선생은 진리의 구도자이자 수도승으로 불릴 만한 분이다. 선생의 사상이나 삶은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 비범한 데가 있다. 기독교 사상가라 불리지만 정통 신앙인은 아니었다. 선생이 가장 존경한 사람이 톨스토이와 간디였는데 이를 통해 선생의 지향한 바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생은 나라가 기울어가던 1890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수하동소학교를 거쳐 경신학교에 입학했는데 YMCA에 출입하면서 기독교를 접하고 연동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선생의 나이 20살 때, 남강 이승훈의 초대를 받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서 2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이때 춘원 이광수도 같은 학교에 교사로 있었다. 최남선, 이광수, 류영모는 조선의 삼천재(三天才)로 불리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선생은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나중에는 남강 이승훈도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를 접하고 노자, 불경 등을 읽으며 깨달은 바가 있어 정통 신앙을 버리고 교회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 뒤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도 안 돼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톨스토이가 이상적 인물로 그린 바보 이반이 되자는 것이었다. 선생은 대학을 그만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세상의 입신양명이니 이런 것은 집어치우고 진리 속에 들어가는 것만이 참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참 인생은 없어요. 육체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바로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릅니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걸어오십니다. 나는 대학을 반대합니다. 출세하여 대학 교수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도 교만한 자는 일하지 않고 밥 먹으려 한다고 말했어요. 개인의 편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라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 사상, 관존민비 사상입니다."


31세 때는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했지만 일제가 교장 인준을 거부해서 1년 만에 물러나야 했다. 이때 학생이었던 함석헌을 만났고 두 사람은 사제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함석헌 말년에 생긴 여자 관계 추문으로 둘은 절연하게 된다. 함석헌은 선생을 떠나 퀘이커교에 들어간다. 선생으로서는 가장 뛰어났던 제자를 잃었다.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강의했는데 이 모임은 1963년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선생은 직접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재산을 정리해 구기동 북한산 기슭으로 귀농했다.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라고 늘 말했다. 그곳에서 50년 가까이 은둔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대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참을 찾고자 하는 이는 문을 두드리시오.' 선생은 가정과 국가를 넘어서서 하느님 나라를 찾았다.


선생에게 또 다른 깨달음이 찾아온 건 1942년 1월 4일이었다. 이때 제나를 극복하고 완전한 얼나로 태어났다. 선생은 '누김의 기쁨'이라고 표현하고, '부르신 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마음에 성령이 임하고 말씀과 사랑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선생은 늘 그런 기쁨을 간직하고 살았다. 기쁨이 터져나오면 강의를 하다가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때를 계기로 선생은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과 금욕 생활을 실천했다. 아내에게는 해혼(解婚)을 선언하고 방 한가운데에는 긴 책상을 놓아 만리장성을 쌓았다. 선생의 말 중에 '아내'를 '안해'로 풀이한 게 재미있다. 선생과 간디는 닮은 점이 많다. 간디 역시 37살부터 금욕 생활에 들어갔다.


인류를 존속시키는 정도의 성교는 정당하지만, 쾌락을 위한 성교는 죄악이라는 것이 두 분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자식을 다 낳은 다음에는 금욕 생활에 들어가야 옳다는 것이다. 짐승살이에서 벗어나는 첫 조건이 금욕이었다. 어쩌면 선생은 간디보다 더 극단적이었다. 혼인 자체를 정신적으로 떨어지는 행위로 보았다.


실제 생활도 엄격했다. 방안에 널판을 깔아놓고 늘 죽음을 의식하면서 책을 읽을 때나 묵상할 때나 무릎을 꿇고 지냈다고 한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냉수마찰과 체조를 한두 시간 하고 명상에 들었다. 구기동에서 강의를 하는 종로 YMCA까지는 걸어서 다녔다. 선생의 삶은 오직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다. 무명 한복만 입으며 청빈을 실천했다. 부귀영화는 하느님에 대한 불경이며 죄악이었다.


선생의 성서 해석은 독특하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는데, 하느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의 생명[성령]을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주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제 마음속에 하느님의 본성을 키워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석가의 불성, 공자의 인성, 예수의 영성은 같다고 말하였다.


선생은 교의 신앙, 사도신경 신앙을 거부한다. 정통 신앙의 중심은 바울의 십자가 대속이지만 선생은 하느님의 영성을 우선한다. 그래서 선생을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니라고도 한다. 범신주의, 도덕적 금욕주의라고 비난한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 따라 신앙의 내용이나 깊이가 다르다. 그러나 종교인의 바른 자세와 영성적 삶의 모범을 선생에게서 발견한다. 교리와 문자주의에 갇혀 죽어가는 종교를 살려낼 불씨를 선생에게서 본다.


선생의 몸나는 1981년 2월 3일에 숨을 멎었다. 마지막 몇 년 동안은 아내나 제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의식이 혼미해졌다. 1977년에는 집을 나와 헤매다가 북악산에서 발견되어 3일간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선생의 일생은 진리를 향한 치열했던 구도자의 길이었다. 제자인 서영훈은 선생을 이렇게 추모했다.


"선생님은 예수, 석가, 공자를 받들어 그 가르침을 소중하게 배우고 가르쳤다. 소강절(邵康節), 장횡거,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를 특히 좋아하였다. 그밖에도 참을 찾고 참에 나아간 이는 누구라도 귀하게 받들었다. 선생님은 이와 같이 동서고금에 걸친 성현들의 종교, 철학 사상을 널리 섭렵하여, 그 진수와 요강을 스스로 체득하고 밝힘에 따라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 탐(貪), 진(瞋), 치(痴), 삼독을 이겨내어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