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 고재종

샌. 2014. 4. 12. 08:00

고들빼기는 씨가 잔게 흙에다 섞어 뿌리고

도라지는 잔설 있을 때 심거야 썩지 않는다네

진안장 귀퉁이 주재순 할매의 씨앗가게

콩씨 상추씨 아주까리씨며 참깨씨랑

요모조모 다 있는 씨오쟁이마다 쌔근거리는 씨들

요렇게 햇볕 좋고 날 따수어야 싹이 튼다네

흙이 보슬보슬해져야 간지럼도 태우고

보슬비도 와서 촉촉해져야 쑥쑥 자란다네

세상에 저 혼자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다 씨가 있어야 나온다는 할매 말에

금세 수숫잎이 일렁이고 해바라기가 돌고

배추가 깍짓동만 해지고 참깨가 은종을 울리는

장터, 이제 스스로는 무얼 더 생산할 수도 없이

유복자가 해준 틀니에 등은 온통 굽었는데

나는 작은 게 좋아요, 씨앗들이 다 작잖아,

요것 한 줌이면 식구들 배불리 먹인다는 할매는

길 걸을 때면 발길 닿은 데마다 씨오쟁이를 열어

갓씨 고추씨 오이씨 죄다 뿌린다네

할매에겐 땅 한 뼘 없어도 걸어댕겨 보면

천지에 온통 오목조목 씨뿌릴 땅이어서

어느 누가 거두어 가든 상관 않고 뿌린다네

누가 됐든 흡족하게 묵으면 월매나 좋겄냐고.

 

- 할매 말에 싹이 돋고 잎이 피고 / 고재종

 

 

씨 뿌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작년에는 그나마 텃밭 하나 얻어 흉내라도 냈는데 올해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내 신세가 그렇게 되었다. 시에 나오는 할매의 마음이야말로 모성애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 새끼만 거두는 것이야 짐승도 극진하다. 모성이 위대하다는 건 이웃과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될 때다.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사람은 가장 착해진다. 그런 농심(農心)이 곧 천심(天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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