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인간의 선

샌. 2014. 7. 14. 08:36

고분고분하거나 말을 잘 들으면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어렸을 때는 이런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달라진다. 정신적 미성숙자가 아니라면 그런 칭찬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권위나 체제는 순종하는 인간을 원한다. 잘 길들여진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목표를 내걸지만 속내는 지금도 여전하다. 착하다, 선하다, 바르게 산다는 의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선해, 착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고 할 때 선하고 착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선하지 않다면 개인의 선량함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체제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세월호 참사의 교훈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인간 역사상 그냥 따르기만 해도 좋은 시스템은 이제껏 없었다.

 

어느 날 예수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때 예수의 대답은 다소 엉뚱하다. "왜 나를 선하다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마저 선하지 않다고 부정했다. 이는 예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어느 시대에나 가난한 자가 있었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富)는 부끄러운 것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쌓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했던 사람에게 예수는 말씀하신다.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

 

이 사람은 슬픔에 잠겨 근심하면서 물러갔다고 성경은 전한다. 현대의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이 말씀을 얼마만큼 실천하려고 노력할까. 최소한 슬픔에 잠겨 근심이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계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을 추구한다. 나는 선의 필요조건으로 간디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야말로 인간의 선이 이를 수 있는 제일 아름다운 경지라 부르고 싶다. 진실로 착한 부자는 없다. 자기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아두고 때때로 적선하는 것이 선은 아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은 곧 자신의 이웃을 착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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