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샌. 2014. 7. 25. 10:13

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좋은 시를 판단하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다. 우선 좋은 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문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분자분 속삭이기도 하고, 또는 죽비처럼 내리치기도 한다. 그리고 감상하는 데 부담이 없어야 좋은 시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도 난해한 낱말로 어지럽게 써 놓으면 내가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걸 지적만 해 줄 뿐이다. 하나 더 덧붙이면 좋은 시는 리듬감이 있다.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졸졸거리듯 자연스럽다.

 

기도란 뭔가를 간구하는 게 아니다. 큰 님의 품에 안겨 하나 되는 마음이 기도다. 기도하는 마음은 평화와 충만으로 가득하다. 나를 위해 더는 바라는 게 없을 때 참된 기도에 들게 된다. 그것이 기도의 본래 의미라고 시인은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험하고 살벌해진 건 기도하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 좀 더 겸손하면서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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