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독배 / 나태주

샌. 2014. 8. 20. 08:54

아빠는 왜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러는 거예요? 혼자만 고집부리고 그러는 거예요? 의사들이 다들 안 된다 그러고, 자료를 봐도 아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확실한데 왜 아빠 혼자만 그렇게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매달리고 울고불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면 날더러 그냥 죽으란 말이냐! 그런 건 아니구요, 아빠가 하도 포기하기 못하고 매달리고 그러니까 애달파서 하는 말이에요. 아니, 어떤 딸이 그렇게 애비한테 매정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아빠, 생각해보세요.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은 아이도 있고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어요. 그걸 좀 생각해보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에요. 이렇게 말을 하고 저렇게 말을 바꾸어도 그것은 죽으라는 말밖에 다른 말이 아니지 않느냐! 어떤 딸이 이렇게 애비 가슴에 화살을 쏘고 애비 마음에 독을 뿌린단 말이냐! 그것은 멀쩡한 배신이요 독배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아이한테서 받은 독배였다. 병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앉아서 오래오래 딸아이의 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고 마음을 굴려보아도 그것은 섭섭한 노릇이고 딱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끝내는 그 섭섭함이 나를 살렸다. 딸아이의 독과 화살이 나를 살렸다. 그래,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마저 저러는 판에 내가 뭘 주저하고 망설일 게 있단 말이냐. 무작정 살아보는 거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내가 사는 거다! 정말로 내가 이대로 거꾸러질 수는 없지 않느냐! 그 오기와 괘씸함과 억울함이 병상에서 나를 조금씩 일으켰다. 아, 그것은 하나의 극약처방. 때로 약보다 독이 더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의 일이다.

 

- 독배 / 나태주

 

 

신작 시집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에 실려 있는 시다. 시인은 큰 병고를 이겨낸 뒤로 세상에 대한 감사와 찬탄, 그리고 인생에 대한 끝없는 긍정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아마도 이 시는 투병 중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리라. 병원 생활이 오래가다 보면 가족과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딸은 목숨에 집착하는 아버지가 애달프고, 아버지는 딸의 말이 괘씸하다. 딸도 옳고, 아버지도 옳다. 그러나 시인은 오기로 병을 이겨냈다. 의사의 말을 들어보면 중병을 이겨내는 사람은 두 부류라고 한다. 하나는 시인처럼 생명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 다른 하나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포기하는 사람이다.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어쩌면 같은 건지도 모른다. 시인의 생명 찬가를 오래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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