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인간의 조건

샌. 2014. 8. 21. 08:03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의 책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아포리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세상에 대한 짧은 경구로 가득하다. 사물을 보는 예리한 관찰과 깊은 성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에릭 호퍼가 궁금했지만 책에서는 아무 설명이 없다. 다만 그의 친필 한 문장이 이렇게 씌여 있다.

 

"If anybody asks me what I have accomplished, I will say all I have accomplished is that I have written a few good sentence." - Eric Hoffer

"만약 누군가 나에게 이제가지 무엇을 했는가 묻는다면, 내가 한 일은 그저 좋은 글 몇 문장 쓴 것이라 말하련다."

- 에릭 호퍼

 

<인간의 조건>을 읽을 때 지은이에 대한 정보는 필요치 않지만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뒤에 인터넷을 검색해서 에릭 호퍼가 노동자 생활을 거치고 독학으로 공부한 비주류 철학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길 위의 철학자'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그의 글이 삶의 체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에 진하게 가슴을 울린다.

 

눈에 띈 몇 문장을 옮긴다.

 

 

자연은 완전하지만, 인간은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완전한 개미, 완전한 꿀벌은 있지만 인간은 영원히 미완성이다. 미완성의 동물인 동시에 미완성의 인간인 것이다.

 

완전함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 전문가의 손길에서는 본능적이거나 기계적인 면이 돋보인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바치는 노력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기술의 완전한 터득은 비인간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려는 자들은 결국 인간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웃음은 아마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던 데서 시작된 것 같다.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가 그 야비한 기원을 암시한다. 동물을 악의를 품지 않기 때문에 웃지도 않는다. 동물은 타인의 불행으로 인한 쾌감이 선사하는 뜻밖의 영광을 음미하지도 않는다. 읏음이 상호 관계의 매개체가 된 것은 그 전염성 때문이었다. 야수는 잔인하지 않다. 비인간화가 해악을 초래하는 이유는 우리를 동물로 바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인류의 조상인 악의에 찬 괴물 원시 인간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같이 자라나고 서로 팽팽하게 묶여 있어 떼어낼 수 없다.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은 균형을 선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것이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학습 의욕과 학습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다. 교육은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배우는 사회이며, 그곳에서는 조부모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 학생이다. 급변의 시대에 미래를 이어갈 사람은 계속 배우는 학습자이다. 배움을 끝낸 사람에게는 과거의 세계에서 살아갈 기술밖에 남아 있지 않다.

 

쥐가 아직도 주위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배가 가라앉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반체제주의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부한 답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며 새로운 의문은 품지 못한다. 반체제 문학에서 가장 불쾌한 점은 거기에 망설임과 경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것은 오로지 순간적인 번뜩임이 있을 때만 감지할 수 있다. 이런 번뜩임을 붙잡고 음미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도, 활력을 얻을 수도 없다.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충동은 자신의 창조력에 반비례한다. 창조력의 샘이 말라버렸을 때, 뒤에 남는 것은 자신의 중요성뿐이다.

 

텅 빈 머리는 실제로는 텅 빈 게 아니라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텅 빈 머리에 뭔가를 집어넣는 일은 어렵다.

 

엘리트주의자는 선택받은 소수만 중요하고, 다수의 사람들은 돼지라고 끊임없이 되뇐다. 그러나 수컷 돼지와 암컷 돼지가 결혼해서 레오나르도가 탄생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실현에 비해 자기희생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행하는 과학 실험과 똑같이, 역사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실시하는 실험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과 사회의 생활을 지배하는 불변의 법칙에 대해 아무리 많이 떠들어대도,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인간사의 모든 일이 어느 정도 우연에 지배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재를 해독하는 일, 눈앞에서 싹트는 것의 씨앗을 감지하는 일이 어렵게 된다. 우리는 불가피한 일을 알아보는 일에 서투르다.

 

'천벌'이라는 단어는 많은 경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짓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저지른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을 나서서 과대평가하는 자세에는 어쩌면 악의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나중에 이들의 콧대를 꺾을 즐거움을 미리 마련해두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입맛이 떨어지고 세상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경우는 놀랍게도 얼마나 적은가.

 

관능 덕분에 우리는 인류와 조화를 이루며 산다. 노인의 인간 혐오는 대개 성욕의 신비한 광채가 퇴색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는 손을 물어버리는 사람은 대개 자신을 차버리는 장화는 핥는다.

 

인간 사이에는 얼마나 많고 깊은 분열이 존재하는가! 인종, 민족, 계급, 종교 사이에만 분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여, 노인과 젊은이, 병자와 건강한 자도 서로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 이해해야만 같이 살아갈 수 있다면 사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이상 찬양할 수 없다면, 이는 정신이 쇠퇴하고 있다는 징조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종말이 온다. 이는 순수한 사고의 종말이며 마지막 고독의 시작이다. 주목할 것은 자기 내면과의 대화 중단이 주변 세계에 대한 관심에도 종지부를 찍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마치 자신에게 보고를 해야 할 때만 세상을 관찰하고 고찰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식으로 세상이 우리를 대한다면 우리는 정력적인 혁명가가 될 것이다.

 

인간의 가슴은 죽어서 땅에 묻히기 훨씬 전부터 무덤이다. 젊음은 시들고, 아름다움과 희망, 욕망 역시 사그라진다. 인간이 땅에 묻히면 가슴이라는 무덤은 무덤 안에 또 묻힌다.

 

아주 큰 소음을 내는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다. 개나 사람이나 이 점은 똑같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평범하게 되는 것이다. 노년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태초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젊을 때 우리는 세계 최초의 젊은이라도 되는 것처럼 활개를 친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확실히 모를 때 말을 가장 많이 한다. 할 말이 있을 때는 몇 단어밖에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할 말이 전혀 없는데도 그것을 절실하게 말로 표현하려고 할 때는 세상의 모든 사전과 그 안에 수록된 단어를 총동원해도 충분하지 않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해가 없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바쁜 것은 해롭다.

 

많은 경우, 희망의 좌절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실제로는 희망의 실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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