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산길에서 / 이성부

샌. 2014. 8. 25. 09:23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 산길에서 / 이성부

 

 

산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이성부 시인의 시집은 배낭 안에 항상 넣어둬야겠다. 그래서 산길을 걷다가 언제라도 꺼내서 읽어야겠다. 산길을 걷는 의미가, 마음속에서 발아되지 못한 생각이 살곰살곰 싹이 트겠다.

 

시인의 <도둑 산길>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 몇 편도 같이 읽는다.

 

 

모든 산길은 조금씩 위를 향해 흘러간다

올라갈수록 무게를 더하면서 느리게 흘러간다

그 사람이 잠 못 이루던 소외의 몸부림으로

그 사람의 생애가 파인 주름살 속으로

자꾸 제 몸을 비틀면서 흘러간다

칠 부 능선쯤에서는 다른 길을 보태 하나가 되고

하나로 흐르다가는 또 다른 길을 보내 오르다가

된비알을 만나 저도 숨이 가쁘다

사는 일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일 아니라

지름길 따로 있어 나를 혼자 웃게 하는 일 아니라

그저 이렇게 돌거나 휘거나 되풀이하며

위로 흐르는 것임을 길이 가르친다

이것이 굽이마다 나를 돌아보며 가는 나의 알맞은 발걸음이다

그 사람의 무거운 그늘이

죽음을 결행하듯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보면서

산길은 볕을 받아 환하게 흘러간다

 

- 산길 / 이성부

 

 

걷는 것이 나에게는 사랑 찾아가는 일이다

길에서 슬픔 다독여 잠들게 하는 법을 배우고

걸어가면서 내 그리움에 날개 다는 일이 익숙해졌다

숲에서는 나도 키가 커져 하늘 가까이 팔을 뻗고

산봉우리에서는 이상하게도 내가 낮아져서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멀리로만 눈이 간다

저어 언저리 어디쯤에 내 사랑 누워있는 것인지

아니면 꽃망울 터뜨리며 웃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소곳이 앉아 나를 기다릴 것만 같아

그를 찾아 산을 내려가고 또 올라가고

이렇게 울퉁불퉁한 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가슴 벅찬 기쁨으로 솟구치지 않느냐

먼 곳을 향해 떼어놓는 발걸음마다

나는 찾아가야 할 곳이 있어 내가 항상 바쁘다

갈수록 내 등짐도 가볍게 비워져서

어느 사이에 발걸음 속도가 붙었구나!

 

- 어느 사이 속보가 되어 / 이성부

 

 

내 몸의 무거움을 비로소 알게 하는 길입니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느리게 올라오라고

산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리 고되고 숨 가쁜 것 피해 갈 수는 없으므로

이것들을 다독거려 보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무둥치를 붙잡고 잠시 멈추어 섭니다

내가 올라왔던 길 되돌아보니

눈부시게 아름다워 나는 그만 어지럽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면 산길은 마침내 드러누워

나를 감싸 안을 것이니 내가 지금 길에 얽매이지 않고

길을 거느리거나 다스려서 올라가야 합니다

곧추선 길을 마음으로 눌러앉혀 어루만지듯이

고달팠던 나날들 오랜 세월 지나고 나면 모두 아름다워

그리움으로 간절하듯이

천천히 느리게 가비얍게

자주 멈춰 서서 숨 고른 다음 올라갑니다

내가 살아왔던 길 그때마다 환히 내려다보여

나의 무거움도 조금씩 덜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편안합니다

 

- 깔딱고개 / 이성부

 

 

수북이 잠자는 낙엽들 뒤흔들어

깨워놓고 가는 내 발걸음 송구스럽다

놀라지들 말거라

나도 이파리 하나

슬픔을 아는 미물일 따름이니

 

- 길 아닌 곳에 들다 / 이성부

 

 

신새벽 벼랑에 엉클어진 철조망을 딛고 넘어

칠팔 년 전 내려왔던 산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지 말라는 길을 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심하게

가슴 두근거리고 불안하다 죄를 짓는 일이 이럴진대

오늘 하루 산행이 무사할지 제대로 될지

걱정이 슬그머니 배낭을 잡아 끌어 내린다

길은 풀섶에 가려져 끊어질 듯 희미하고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나서

자꾸 앞을 가로막는다 사는 일도 이렇게

갈수록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아진다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내가 훔친 산길이 고요하게 흔들거린다

길이 끝나는 데서 넓은 너덜겅이 가파르다

까마득한 비탈 바윗덩이들을 밟거나 기어오르거나

검게 아가리 벌린 구멍들을 피해 가거나 건너뛰거나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위로만 올라간다

전에 내려왔을 적에는 미처 몰랐는데

너덜 오름길이 이리 팍팍하다는 것 오늘 알겠구나

평생을 쌓아올린 욕망이 무너져 내린다면

치솟은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면

이렇게 나뒹굴어 널브러지고 눈 부릅뜬 몰골이 될까

이 폐허로 무엇을 만들겠다고 저리 이빨들을 갈고 있을까

세찬 바람에 내 몸이 휘청거린다

여기서 자칫 떨어진다면 저 깊이 모를 어둠 속으로

내가 먹혀 들어가 사라질 것은 뻔한 일

부엉이바위에서 그가 역사 속으로 몸을 던져버린 일도

저 치욕의 끊임없는 광풍이 등 뒤에서 그를 자꾸

떠다밀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단 다음의 짧은 허공에서 그는 눈을 감은 채

무엇을 보았을까 과연 세상은 아름다웠을까

아아 죽음의 한 순간은 생각건대 순결한 것인데

나는 살겠다고 기를 쓰며 바위 모서리를 잡아당긴다

나는 아무래도 시정잡배들과 다를 것이 없나 보다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기는 커녕

내 한 몸 추스리기에도 이리 쩔쩔매는구나

길을 찾아 다시 숲 속으로 접어든다

사람의 발자국이 얼마나 많이 쌓여져서

이 험한 곳에 이런 차분한 길이 되었을까

이렇게 몇 차례 너덜과 숲길을 오르내리다가

벼락 치듯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멧돼지 내외

땅을 흔드는 육중한 덩치의 저 민첩함

그를 따라 흩어지는 얼룩무늬 새끼들 예닐곱 마리

나도 놀라고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자연은 말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저절로 살아 커서

저희들끼리 살랑살랑 춤추며 노래한다

이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낀다

허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보이지 않아

사람의 뜻대로 개입하고 간섭하고 파괴하고

깊이 들어가 소리와 내음과 흔적을 퍼뜨리면서부터

녀석들은 집주인이 길손에게 쫓겨나듯 터전을 잃어버린다

나는 사람이 만든 죄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녀석들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데서

이 자연에게 침입자가 됐다는 생각으로 송구스럽다

놀라 도망쳐 숨죽이고 있을 녀석들이 짠하다

발걸음 재촉하며 마지막 너덜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돌들을 쌓아 갈지자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고맙기도 하고 부질없기도 하다

문득 사람 낌새를 느끼며 위를 쳐다보니

시꺼먼 젊은 사내 하나 멈추어 서 있다

나를 내려다보며 인사를 한다 그도 혼자다

나 같은 녀석이 또 있구나 안심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악수를 한 다음 헤어져 간다

오늘 하루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왔던 길을 내려가며 사람 내음을 보탤 것이다

이제부터가 공룡능선이다

금지된 산길 구간은 지났으니 붙잡힐 일은 없겠으나

내 마음은 여전히 내가 도둑놈이어서 맑지 못하다

다시 가슴 벌렁거린다

벌써 한나절이 지나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쉬엄쉬엄

찰지게 올라가야 한다

 

- 도둑 산길 / 이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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