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퇴곡리 반딧불이

샌. 2014. 12. 15. 12:05

유소림 씨 글은 정기구독하고 있는 <녹색평론>을 통해 접하고 있다. 읽을 때마다 글을 무척 잘 쓰시는구나, 감탄하게 된다. 여러 해 전에는 퇴곡리에서 농사짓는 얘기였는데 요사이는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퇴곡리 반딧불이>는 여러 매체에 실었던 글을 모은 산문집이다. 지은이는 2005년에 부모가 지내던 퇴곡리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책 내용 대부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단순한 전원 찬가가 아니라 자연에서 얻은 깨달음과 통찰을 담고 있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연의 섭리에 대한 존중이 체화된 분인 것 같다.

 

뱀은 누구나 징그럽게 생각하는데 지은이는 마당에 사는 뱀과도 동무가 되는 길을 말한다. 꽃과 새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뱀과 거미도 마찬가지인 경지는 보통이 아니다. 밤골 생활을 할 때 거기도 뱀이 많았는데 나는 보는 대로 죽이고 쫓아내느라 바빴다. 어느 날은 따스한 집 앞 현관에 똬리를 틀고 있어 혼비백산하기도 했다. 아무리 자연을 사랑한대도 뱀은 도저히 아니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찬 기온에 퇴비 더미 속으로 찾아든 뱀을 보고 같은 생명으로서 연민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산 것들은 모두 신의 정원에서 동무가 되는 게지만 이 세상에서 동무 되는 법은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건 아니다. 개는 내 얼굴을 핥으며 나와 동무가 되고, 뱀은 저 은밀한 바위 틈으로 차갑게 사라지면서 동무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개의 우정에서 친밀을 맛보고, 뱀의 우정에선 저 알 수 없는 가슴 떨림을 맛보는 것이다."

 

지은이는 현대 문명의 병폐를 직시하고 대안적 삶을 사는 분이다. 자연이 주는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삶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글에서는 우주의 원리를 꿰뚫어보는 혜안이 반짝인다. 'Simple Life, High Thinking'이라는 삶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겠다.

 

책에 나온 글 중 머리글인 '곳간에 쌓아두지 않아도'를 옮긴다.

 

 

곳간에 쌓아두지 않아도

 

더위에 쫓겨 밭을 둘러볼 수 없던 며칠 사이에 바랭이들이 열무 포기만큼씩이나 벌어졌다. 퇴비 한 톨 뿌려준 적 없건만 텃밭에서건 꽃밭에서건 더위에도 가뭄에도 까딱하지 않고 오로지 번성, 번성하는 이 풀은 어디에서 이런 생명력을 얻는 걸까. 밭의 푸성귀들이 바랭이만 같다면야 농꾼들 죄 오뉴월 개팔자 되어 나무 그늘에서 낮잠만 자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유전공학이니 생명공학이니 하는 최신 '공학'들이 우리들에게 그 비슷한 꿈을 꾸게 하고 있긴 해도 말이다. 바랭이가 그처럼 왕성한 생명력을 지닌 비결을 제가 만들어낸 것을 모두 제 몸 유지와 자손 퍼뜨리기에 쓸 뿐, 인간들에게 나누어줄 맛있는 잎사귀나 달콤한 열매, 토실토실한 뿌리 따위에는 쓰지 않기 때문이니 사실 무슨 거창한 학문을 동원해서 밝혀내려고 기를 써야 하는 대단한 비결도 아닌 것이다.

 

풀들이 만든 것에 의지해 사는 우리 사람들은 풀들이 제 몸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성시킨 위에 인간에게도 나누어줄 수 있는 무언가를 더 만들 수 있도록 그만큼 공을 들이고 애써야 한다. 그 공들임에는 조금의 술수(우리는 '술수'라는 말 대신 효율을 높인다는 표현을 쓰고 있긴 하지만)도 통하지 않는다. 서로 서로 맞물려 기대고 부축해 돌아가는 이 세계의 둥근 고리 어느 틈새에서 '공것'이 그냥 불쑥 생겨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풀먹이짐승에게 우격다짐으로 육식을 시킨다면 우선은 빨리 자라고 살이 많이 쪄 전에 없던 공것이 생기는 듯해도 이 세계의 질서에 어긋난 그 공것은 우리 인간이 감히 짚어볼 수 없는 경로, 우리가 그 대응 방법을 모르니 재앙일 수밖에 없는 그런 경로를 통하여 고스란히 회수되고 만다.

 

올해는 날씨가 좋지 않았다. 퇴곡리의 날씨도 이십여년 전 부모가 모두 살아있던 시절과 많이 달라졌다. 봄부터 비가 한번도 흡족하게 내리지 않았고 영동지방이 봄을 괴롭히는 거센 바람도 보통은 오월 말쯤이면 잦아드는 법인데 올해엔 여름까지 시시때때로 불어댔다. 그 위에 시원찮은 장맛비가 그치더니 갑자가 폭염이 몰려와 해가 떠있는 동안은 밭에 나가보기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텃밭 농사는 '풍년'이다. 호박은 한두 개 달린다 싶더니 금방 정신없이 생겨나 주위 사람들에게 잡수세요를 빌어야 하고 쑥갓이나 상추는 아무리 따먹어도 다음날이면 또 무성해져 있다. 가지, 열무, 고추, 깻잎, 토마토 등등도 질세라 반찬을 쏟아내고 하지가 지나고부터는 감자와 강낭콩까지 가세해 도무지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텃밭 반찬들은 무척 맛이 있다. 그 중에서도 올해 처음 심어본 오이는 놀랄 만큼 향기롭다. 그 오이는 종묘상에서 묘를 사온 게 아니라 아랫집 형님이 예전부터 심어온 토종 오이씨를 얻어 기른 것이다. 텃밭 가꾸기 책에 조금 어렵다고 표기된 오이를 처음 심어본 터라 과연 몇 개나 달릴까 은근히 걱정이었는데 첫 오이를 조금 잘라 먹어본 순간 아, 바로 이 맛이야, 하는 탄성이 절로 터졌다. 기억 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옛날' 오이의 바로 그 맛, 첫맛이 어딘가 설핏 떫은 듯하다가 이내 향기로 변하고 고소한 뒷맛을 남기는 그 오이! 마트에서 팔고 있는 오이의 절반 크기인 이 귀여운 꼬마 오이는 노균병이니 진딧물이니 하며 속썩이는 일도 없이 쉴새없이 조랑조랑 달린다. 오이 뱃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씨 중에서 딱 한 알이 이렇게도 많은 오이를 낳으니 이 지구별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가. 나는 매일 아침 텃밭가에 서서 이 지구별에 사는 목숨붙이들은 모두 곳간에 쌓아두지 아니해도 일용할 양식을 얻는 저 마태복음의 새들임을 실감한다. 그런데 이 풍요로운 세계에서 사람은 어쩌다가 온갖 사악한 방법을 짜내어 가축과 가금의 살을 찢어내고 갖가지 우악스런 짓으로 열매와 잎사귀를 뽑아내는, 그야말로 말세적인 생존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일까.

 

장맛비가 그친 사이 하늘이 끝없이 푸르다. 그 푸르름 속에서 잠자리들이 날개를 반짝인다. 아름답다. 우리의 세계가 우리 가슴에 아름답게 느껴오는 까닭은 이 터전이 우리 사람의 머리만으로 가늠해볼 도리가 없는 깊고 깊은 신묘함에 싸여있기 때문일 게다. 만약 인간의 뜻대로 요리되고 조종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곳은 기껏해야 컴퓨터 게임기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지루하고 처참한 곳이지 않겠는가.

 

퇴곡리에서 세번째 여름을 맞고 있다. 퇴곡리를 나의 거처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나이 마흔이 넘어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였다. 늙은 부모가 있는 퇴곡리는 직장 다니랴 아이들 기르랴 살림하랴 정신없이 살던 나에겐 샘터와 같은 곳이기도 했지만 그 퇴곡리의 의미가 진정으로 내 가슴에 스며온 것은 부모가 모두 떠난 후였다.

 

어머니마저 떠나던 해 남편의 전근으로 동경에서 살고 있던 나는 가신 이에 대한 회한으로 <녹색평론>에 첫 투고를 했다. 그후 십오년이 지나 녹색평론사에서 퇴곡리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을 내도록 배려해 주셨으니 퇴곡리와 <녹색평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세기 이상이 흐른 내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은 아무래도 퇴곡리에 돌아온 일인 것 같다. 나는 날마다 퇴곡리 듬바우골 분교 세세골골에 계신 무수한 스승님들께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이곳을 떠나는 날까지 부디 이 배움에 게으름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퇴곡리의 풀과 나무들에게 빌어본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0) 2014.12.29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0) 2014.12.21
목숨  (0) 2014.12.10
녹두장군 전봉준  (0) 2014.12.05
인간, 우리는 누구인가?  (0) 2014.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