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봄밤 / 김수영

샌. 2015. 3. 1. 16:02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 봄밤 / 김수영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고래(古來)의 명언이다. 인간 사는 세상에서 따스했던 날이 얼마나 있었던가. 서로 뜯어먹느라 약자에게는 늘 간난의 세월이었다. 올봄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안팎의 독재가 흥하는 게 보인다.

 

김수영 시인이 살아있다면 이 시대를 뭐라고 할까. 훨씬 화려하고 흥청거리는, 잠 못 들게 하는 봄밤이다. 누가 울리는 북소리인 줄도 모른 채 넋 빠진 춤을 추는 어릿광대들의 봄밤이다. 시인이 말하는 '절제'와 '영감'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봄밤이다. 그래도 시인은 말할까,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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