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샌. 2015. 3. 25. 08:28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밥그릇 경전 / 이덕규

 

 

한 학승이 조주(趙州, 778~897) 선사를 찾아왔다.

"저는 공부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요."

이에 선사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아침 먹었느냐?"

"예."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조주세발(趙州洗鉢) 화두다. 무엇을 이루겠다는 사념의 굴레에 갇히지 말라는 뜻인가, 그러나 화두는 답이 없다. 학승이 어떤 깨우침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밥 먹고 밥그릇 닦는 밖에서 도(道)를 찾지 말라. 제 밥그릇 하나라도 제대로 씻는 게 도일 것이다. 멀리 나가지 마라. 지도무난(至道無難)이다. 잘 닦인 밥그릇 옆에 보살 한 분 앉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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