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샌. 2015. 3. 31. 08:59

"모란과 작약 꽃대를 보듯 책을 보며 살았다." 책머리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장석주 작가의 독서록이다. 작가는 엄청난 다독가다. 표지에는 '문장노동자며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에게 책 읽기는 구도 과정과 닮았다. "책 읽기는 내 존재를 지탱하는 광합성작용이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 속에 독서에 대한 작가의 믿음이 들어 있다.

 

독서광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 적어도 한 권 넘게 독파해야 자격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종일 책과 함께 살고 있다. 일 년에 천 권 정도의 책을 보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책의 세계에 파묻혔다. 매일 한 권씩 읽으며 감상을 적고 그 결과를 일 년 뒤에 책으로 펴냈다. 책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록이다.

 

나도 주변 사람보다는 책과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일 년에 백 권 정도는 읽을 것이다. 어느 해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 목록을 보았더니 그만큼 되었다. 물론 프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러나 책을 사랑하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제일 반갑다. 현실에서는 어렵지만 책에서는 마음이 통하는 벗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책을 좋아하게 된다.

 

'니체에서 콜린 윌슨으로, 가스통 바슐라르에서 미셸 푸코로, 프로이트에서 라캉과 지젝으로, 들뢰즈와 레비나스에서 알랭 바디우로, 레비나스에서 서동욱으로, 발터 벤야민에서 지그문트 바우만과 조르조 아감벤으로, 다시 니체에서 메를로퐁티와 들뢰즈로,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에서 롤랑 바르트와 데리다로, 김우창에서 문광훈으로, 김수영에서 김지하로, 고은에서 백낙청으로, 김용옥에서 최한기로, 노자와 장자에서 <주역>으로, 정약용에서 정민으로, 박지원에서 고미숙으로, 다윈에서 에드워드 윌슨으로, 다시 도킨스와 정재승과 최재천으로, 카프카에서 보르헤스로, 움베르토 에코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로, 다시 이진경과 이정우로, 김현에서 정과리로, 김병익에서 고종석으로, 가라타니 고진에서 조영일로.'

 

작가가 책을 통해 만난 사람들을 보면 주눅이 든다. 반 이상이 이름도 생소하다. 나는 현대 철학을 접하고 싶어도 난해해서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작가는 <천 개의 고원>을 다섯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독서가에도 레벨이 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가는 가랭이가 찢어진다. 나는 내 능력 범위 안에서 책 읽기를 즐기면 된다.

 

독서는 의무가 아니다. 즐거움이 있어 책을 손에 든다. 독서가는 제일 행복한 시간이 책과 함께 있을 때라고 말한다. 그러면 된다. 지금 내 손에 있어 기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제일 좋은 책이다.

 

도연명(陶淵明)은 마흔한 살에 벼슬자리를 팽개치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책 읽기와 술을 친구로 삼아 유유자적 살았다. 도연명의 삶은 진정한 독서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비움과 독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생각을 끊고 번뇌를 끊어야 책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다.

 

책 읽기의 목적이 지식의 습득은 아니다. 책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자아라는 비좁은 울타리를 넘어 다른 세계로 건너간다. 책 읽기란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가는 행위인 것이다.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책 속의 지식과 지식들이 충돌하며 일으키는 사유의 불꽃들과 함께 타오르며, 즉 책 읽기의 열락을 사유의 향연으로 바꿀 때, 그리하여 독서의 총량을 지렛대 삼아 지식 생산자로 나설 때 비로소 진정한 독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정한 독서인만이 자기를 넘어서서 초인류가 될 수 있다."

 

"세상에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그보다 조금 덜 읽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 책을 더 읽었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몰입하고 뭔가를 창조해낸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보다 더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밥을 먹듯이 날마다 책을 골라 읽어라. 세상의 혼란과 잡담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척도로 온전히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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