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샌. 2015. 6. 20. 11:55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천주교 신자냐고 물으면 확신이 없다. 성경에서 서술하는 하느님을 믿지 못한다. 미사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는 입이 다물어진다. 역시 글자 그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우주에 존재하는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내 안의 종교심도 부정할 수 없다. 전통적인 신앙인과는 거리가 멀지만 종교인이라는 말까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어정쩡한 상태다. 그래서 사서 읽은 책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다. 알랭 드 보통이 썼다.

 

저자는 무신론자다. 그렇다고 종교가 가진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전제다. 종교의 관념과 실천 가운데 일부를 세속적인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책은 가톨릭 전통의 서구 사회 기준으로 되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무신론과 종교는 전혀 배타적이 아니다. 그러나 유럽인에게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는 한 몸을 의미한다. 무신론자가 증가하는 현대에 종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종교란 하늘나라에서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양자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교의 껍질은 버려도 종교의 핵심 정신은 인류의 지혜로 존중받아야 한다. 신앙의 교의가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는 측면이 많다. 인간 삶에서 나타나는 고통과 대책 없는 질환들을 치유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해결책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보수적 신앙인과 반종교주의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취하고 있다. 2천 년 간 내려온 종교의 전통을 한순간에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골동품을 껴안고 있을 수도 없는 딜레마가 보인다. 양쪽에서 모두 비판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그런 균형적 견해로 대표적인 사람이 오귀스트 꽁트다. 꽁트는 종교가 없는 세속 사회는 오직 부의 축적, 과학적 발견, 대중오락, 낭만적 사랑에만 전념할 것임을 경고했다. 결국 견디기 어려운 사회적 병리 현상에 시달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해결책으로 꽁트는 종교의 전통에서 타당하고 합리적인 측면을 찾아내어 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새로운 인류 종교의 창시였다.

 

저자의 생각도 꽁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꽁트가 좌절했듯 그런 중간 지점이 얼마나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지는 의문이다. 책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불교나 동양 종교가 가르치는 지혜가 훨씬 더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쇠퇴하는 자리를 동양 정신이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다. 종교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지적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초자연적인 믿음이나 기복주의, 딱딱한 교리의 껍질을 걷어내고 신앙의 에센스를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인류 의식에서 무지의 구름이 벗겨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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