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공기 / 이시영

샌. 2015. 11. 17. 11:19

공기를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편의점마다 공기가 동나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산화탄소 배출량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는 이제 툰드라나 아이슬란드 혹은 노르웨이, 핀란드에서 수입한 공기를 구입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부자 동네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다량이 공기를 매점해버렸기 때문에 서민들은 겨우 1리터의 공기 팩을 사기 위해 세븐일레븐과 GS25, 미니스톱을 향해 뛰었으나 품절되고 말았다. 병원 응급실마다 산소통이 반입되지 못해 환자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며, 영유아들은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정부는 긴급대책으로 뉴질랜드로부터 대량의 공기선(船)이 들어온다고 발표했으나, 격분한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지금, 당장 마실 공기를 달라!"고 외쳤다. 경찰 벽에 가로막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한 시민들이 관공서를 습격했으나 거기도 공기가 텅텅 비어 있었으며, 이제는 성북동 장충동 부자들 담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경비원들이 가스총을 쏘며 제지했으나 성난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하 벙커에 저장된 공기 팩들을 훔쳐 나오긴 했으나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공기를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이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했으나 21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이런 참혹한 사태에 직면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뉴질랜드 공기선이 부산항에 입항했으나 전 국민의 일주일치 소비량에 불과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북유럽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고, 심지어는 남극이나 북극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지구의 4분의 3이 일산화탄소로 질식해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최빈국이 몰려 있는 사하라 이남의 광대한 아프리카 대륙이 유일한 대안이었으나, 이미 그곳은 미국 중국 유럽연합들이 선점하고 있어서 입국허가를 받을 수조차 없었다.

 

공기를 사러 다니는 꿈을 꾸었다. 소나무들은 괴사하여 발치에 쓰러져 있었고, 새들도 높이 날지 못한 채 추락했다. 나비들은 시든 꽃잎에 앉아 졸고 있었으며, 귀뚜라미도 더이상 울지 않았다. 이제 이 지구별이 멸망 직전인 것이 분명했다. 아프리카 대륙이 옛 중동 OPEC처럼 공기수출국이 되어 세계의 나머지를 향해 석유보다 비싼 공기를 공급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아직도 거기에는 코뿔소와 사자들이 초원을 가로지르며 싱싱한 산소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신생 '공기수출국기구'도 왕년의 오일달러를 주무르던 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오로지 그곳만이 인류의 허파였다. 저개발이 이제 세계의 유일한 희망의 근거인 셈이다. 인류라는 종이 첫울음 울고 태어났던 그곳이!

 

- 공기 / 이시영

 

 

가게에서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사다 먹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기름값보다 물값이 비싸다는 얘기는 너무 황당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불가사의해 보였던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은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산다. 시에 나오는 것처럼 공기도 사다 마시는 때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미 캔에 담긴 청정공기가 상품으로 나왔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미세먼지 경보가 내리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찾는다. 이 상황이 더 악화된다고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지구의 공기조차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미래는 멀리 있지 않다. 제 몸 타는 줄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부나비를 어리석다고 말 할 자격이 없다. 이미 마지막 제동의 때도 놓친 듯한 이 광란 열차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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