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샌. 2015. 11. 24. 11:54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린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시인의 대표작인 '직소포에 들다'를 시인이 직접 하는 말소리로 듣는다. 산문집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에 실린 글로, 제목은 '폭포 소리가 나를 깨운다'이다.

 

내가 폭포를 처음 본 건 일곱 살 때였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던 길에서 개울로 떨어지는 긴 물줄기를 보았다. 빛깔이 구름보다 더 하얬다. 폭포 옆에 주황색 산나리꽃이 신이 난 듯 화들짝 피어 있었다. 폭포의 물보라를 맞고 핀 꽃들은 물소리에 놀라서 갑자기 피어버린 듯했다. 그처럼 폭포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꽃들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의 꽃들은 다 아슬아슬한 빛깔이고, 이 세상의 폭포는 다 사자후 같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말이 아닐지.

 

어려운 일은 한꺼번에 닥치는 것일까. 부모 자식 다음에 아리는 말이 부부라는데, 부부의 길은 국토종단의 길보다 더 먼 길이라는데, 나는 1974년 한 해에 모두를 다 잃었다. 부모님은 그 해에 세상을 떴고 아이도 남편도 길 밖의 사람들처럼 멀어져갔다. 그땐 내가 하는 말도 내 감정을 감추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세상의 모든 인연이 끊어진 자리에 내가 있었다. 모든 관계는 고통이었다. 자존심은 말없는 폭력에 짓밟혔고 사랑에 대한 믿음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청천벽력이란 말은 맑게 갠 하늘에서 치는 날벼락이 아니라 사람이 나에게 치는 날벼락이었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나는 그 충격으로 사흘 동안 눈이 보이지 않았다. 일생에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 눈물은 허물어짐에 대한 회한이었고, 눈이 보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내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삶은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해서 사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거미은 어떻게 집을 짓나? 나팔꽃은 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나?' 생각하며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관찰력을 일깨우는데, 또 어떤 이는 야간작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시를 읽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아려움을 견딘다는데, 나는 병이 들어 죽을 생각만 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린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아이와도 헤어지고 남편은 남의 편이 되었다. 나는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였고, 밤에도 자지 않는 새였다. 입속에 새끼를 넣어 기르는 시클리드 물고기가, 자식에게 제 살 뜯어먹히는 가시고기가 나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인간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었고,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였다.

 

내가 처음으로 직소폭포를 찾은 것은 1979년 7월이었다. 33년 전의 일로 내 나이 서른일곱 살 때였다. 혼자 산 지 5년이 흐른 뒤였다. 서울에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하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갔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 '직소'라는 단어에 이끌려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다. 이왕이면 선비의 정신처럼 곧은 직소에서, 직언하는 충신처럼 생을 끝내고 싶었다. 직소폭포는 내소사에서 30분쯤 걸어가 길이 끝나는 곳에 있었다. 비 온 뒤라서인지 작은 폭포지만 소리는 우렁찼고 물길은 생각대로 수직으로 곧았다. 물의 길도 곧아야 숭고해 보인다.

 

그때 그 산(내변산)엔 아무도 없었고 폭포 소리만 '천추의 큰 울음'처럼 우렁찼다. 끝없이 넓은 들판을 보고 연암 박지원이 '호곡장(好哭場)'이라며 울기 좋은 곳이라 했고, 이를 읽은 추사 김정희가 '천추의 큰 울음'이라 했다는데, 비록 작은 폭포지만 나에게 직소폭포는 '내가 울기 좋은 곳'이었다. 폭포의 곧은 물줄기를 바라보다 굽은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나는 폭포처럼 울었다. 우는 동안 그 울음 속에서 "인생은 한 줄의 보들레르만도 못하다."고 자살한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떠올랐다. 나는 물었다. "류노스케 씨, 죽어서 생각해도 인생이란 한 줄의 보들레르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나요?"

 

몇 시간을 바위 위에 바위처럼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옆으로 조금 기우뚱했다. 그때 마치 빛이 눈을 뚫고 들어온 듯 앞이 탁 트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라운 것은 지금껏 어둑했던 마음이 환해지면서 처음으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너는 죽을 만큼 살아보았느냐'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고 들리는 것은 폭포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는 내게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소리였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고 나만의 신비한 체험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듯이 생각도 의지도 시간이 지나면 뿔처럼 단단해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이 궁벽할 때 새벽을 생각하고 몸이 만신창이일 때 병고로 약을 삼으려고 했다. 그 생각은 아마도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겠다던 굽은 마음을 직소폭포의 곧은 물줄기가 곧게 일으켜 세워준 때문일 것이다.

 

직소폭포를 만난 지 13년 만에 '직소폭에 들다'라는 시를 완성했다. 내 시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된 시이다. 죽음에서 나를 건져낸 직소폭포! 내가 이 시를 가장 아끼고 대표시로 생각하는 것은 내 정신의 긴 투쟁 끝에 살아남은 시이기 때문이다.

 

처음 직소폭포에 죽으로 갔을 땐 폭포처럼 울었는데 33년이 지난 뒤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폭포 소리를 폭소처럼 생각하면서, 이 말을 하고 싶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는 '우리'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왜냐하면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므로.

 

나는 오랜 침묵 끝에 말하는 사람처럼 "그래, 존재가 있으니까 고통스럽고 몸이 있으니까 추운 거지.... 이게 수고로운 인생일까?" 중얼거려본다. 인간은 누구나 '조'와 '울'의 상태를 왕래하고 길항하면서 살아간다고들 한다. 그래서 모든 작품과 모든 삶은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고 한 것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폭포 소리처럼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길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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