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봄날은 간다 / 최금진

샌. 2016. 5. 25. 15:39

사슴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 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댓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키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키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라 출렁거렸네

늙은 돼지 몇 마리를 몰고 나와 배웅하는 농장 주인과

순록떼처럼 킁킁 웃으며 돌아가는 사람들 뒤

사과꽃잎에 핏물자국 번지며 봄날이 가고 있었네

 

- 봄날은 간다 / 최금진

 

 

가는 봄날을 붙잡으려고 입술에 피를 묻히는 것일까? 우아한 행실 뒤 인간의 짓거리가 다 그렇다. 부질없어라. 아무리 몸부림쳐도 봄날은 간다. 아름다움과 폭력성을 함께 드러내어 대비시킬 때 효과가 배가되는 걸 이 시에서 확인한다. 인간사에는 늘 이 둘이 공존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봄은 더욱 빛나는 것인가. 그래서 '봄날은 간다'라고 여기저기서 노래하는 건 인간 존재에 대한 고해성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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