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자유죽음

샌. 2016. 5. 30. 07:57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한들 실제 죽을 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노예에게 이렇게 외치게 시켰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어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연사보다는 태반이 이런저런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옆에서도 힘든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싶다. 그럴 때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죽느냐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몇 해 전에 본 인도 영화 '청원'이 생각난다. 전신마비가 되어 마지못해 살아가는 전직 마술사인 주인공은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법원에 청원한다. 기각되지만 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친구들이 모인 가운데 서로 격려하고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이별 의식이 인상적이다. 불치의 병에 걸린 환자를 생명만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인도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살'이나 '안락사'라는 용어는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자유죽음'으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종교에서는 자살을 살인과 마찬가지로 중한 범죄로 규정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기 스스로 끊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다. 그러나 예외가 있어야 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거나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남은 생이 고문이어서 의미가 없다고 의료진이나 가족이 동의하는 경우다. 편안하게 생을 마칠 권리도 환자한테는 있다.

 

나는 의료 시스템이 품위 있고 편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병을 고치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몇 년 더 산다고 의미 있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름답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고통 완화 의술 및 호스피스 병동이 확충되어야 한다.

 

온전한 의식을 갖춘 환자일 경우 자유죽음을 선택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허용하자. 그러자면 우선 우리의 죽음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옛 성현들은 죽음을 결코 기피하지 않았다.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내가 행복하고 너희가 불행한지 누가 알겠느냐." 이승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죽음을 두려워한다. 심지어 천국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도 죽음 앞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동물의 죽음은 의외로 평안하다. 죽음의 때가 오면 스스로 음식을 끊는다. 끊는 건지 먹을 수 없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냥 가만히 엎드려 죽음을 맞는다. 인간처럼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배울 만하다. 사람의 경우도 그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다. 받아들이는 자세의 문제다.

 

생로병사의 숙명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당당해지고 싶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자신감은 내 의지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와 관계가 깊다.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죽음이 보장된다면 병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것 같다. 환자가 원할 경우 지원할 수 있는 의료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한 번 가는 인생, 이왕이면 멋있고 아름답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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