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내가 왜 이러지

샌. 2016. 10. 21. 11:40

며칠 전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어리둥절한 장면과 맞닥뜨렸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한 노인이 세면대에 소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해서 고추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확인을 했다. 그 노인은 옆에서 바둑을 두던 노신사라고 불러도 될 멀쩡한 사람이었다.

 

모르고 그러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상황이 전혀 분간되지 않았다. 그래도 못 본 척할 수 없어서, 여긴 세면댄데요, 라고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노인은, "어, 내가 왜 이러지?"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바지를 추스르고 세면대를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 "늙으면 어쩔 수 없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당사자는 얼마나 민망할까를 생각하니 차차 그 노인에게 연민이 생겨났다.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노인이 치매 환자일 가능성이다. 그렇지만 노인이 기원에 와서 소일할 수 있다는 건 심신의 건강이 받쳐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요양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둘째, 노인이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다. 세면대에 오줌을 누면 소변기보다 더 편한 측면도 있다. 혹시 집에서는 세면대에 볼일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 가능성이 작다.

 

셋째, 바둑에 집중하느라 앞뒤를 분간 못 했을 가능성이다. 바둑 수에 빠져 있을 때는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 기능이 차단된다. 생리 현상을 해결하러 화장실에 갔지만 머리는 여전히 바둑판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면 소변기와 세면대를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젊은이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

 

세 번째 경우라면 노인의 집중력이 도리어 상찬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동도 않고 바둑판을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을 보니 더 그랬다. 기원에는 대부분 70대 내외의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수읽기의 힘이 확연히 떨어진다. 오래 집중하는 게 불가능하다. 체력적으로도 힘이 든다. 그래서 오락으로 건성건성 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이를 불문하고 하나에 몰두한다는 건 바람직하다. 이리저리 산만한 정신보다는 훨씬 낫다. 노인이 비록 실수는 했지만 바둑에 집중하는 정신만큼은 본받을 만하다고 좋게 해석해 본다. 처음에 마음속으로 뇌까렸던 "늙으면 빨리 죽어야 돼"라는 말은 아무래도 취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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