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샌. 2017. 3. 18. 10:35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칠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것들 때문에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눈이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작은 머리카락이 눈동자에 붙어 있다고 했다. 떼내고 났더니 금방 개운해졌다. 보일락 말락 하는 크기였다. 눈은 아주 작은 이물질도 감당하지 못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비유는 그만큼 일심동체라는 뜻일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살면서 동시에 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면 가슴으로 울 일도 없다. 가까이는 자식이나 가족을 생각해 보면 안다. 그러나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눈물이 눈망울을 더 맑게 하고, 그 눈물이 반짝이는 새 길을 만들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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