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샌. 2017. 9. 17. 09:42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와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으로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 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어렸을 때 제일 무서웠던 게 통시에 사는 귀신이었다. 고향에서는 뒷간을 통시라고 불렀다. 밤이 되면 시커먼 손으로 볼 일 보는 어린아이를 통째로 똥통 속으로 끌어당긴다고 했다. 어른들은 토째비 얘기도 자주 했다. 안말로 가는 산자락에 토째비가 있어서 밤에 혼자 가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사람 앞뒤로 줄넘기하듯 뛰어넘으며 정신을 홀리게 한다 했다. 감히 밤길을 걸을 수 없었다. 다 쓴 빗자루에도 귀신이 있다고 했다. 못 쓴다고 그냥 불에 태우면 귀신이 나와 해코지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사물 뒤에 숨어 있는 영적인 존재를 믿었다. 귀신이라기보다는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다. 어린아이에게는 두려운 존재였겠지만 인간을 도와주는 신도 많았다. 조상들은 그런 신들과 함께 살았다. 토테미즘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인간 정신을 지배했다. 며칠 전 일본의 신사 몇 군데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신도(神道)라는 종교의 형식으로 토테미즘을 승화 발전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테미즘을 무지와 두려움에서 나오는 외경심으로 볼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옳고 그름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미신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에 대한 공경이 중심이다. 타자를 수단이나 이용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그 때는.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끼니 / 고영민  (0) 2017.09.30
강냉이 / 권정생  (0) 2017.09.22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0) 2017.09.09
석유장수 / 심호택  (0) 2017.08.31
산다 / 다나카와 슌타로  (0) 2017.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