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강냉이 / 권정생

샌. 2017. 9. 22. 10:41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다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통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 강냉이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생이 쓰신 여러 편의 동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삼베 치마>라는 동시집이다. 2011년이었다. 이 시는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났던 1950년이면 선생 나이 열세 살 되던 해다.

 

선생의 모든 글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동시도 마찬가지다. 가난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동심을 만날 수 있다. <삼베 치마>에 실린 몇 편의 다른 동시도 옮겨 본다.

 

 

골목길에 우물이

혼자 있다

 

엄마가 퍼 간다

할매가 퍼 간다

 

순이가 퍼 간다

돌이가 퍼 간다

 

우물은 혼자서

물만 만든다

 

엄마도 모르게

할매도 모르게

 

순이도 못 보게

돌이도 못 보게

 

우물은 밤새도록

물만 만든다

 

- 우물 / 권정생

 

 

왕골논 안짝 집

새댁이 치마

노랑 곱슬 삼베 치마

새댁이 물동이 이고

너무 바쁘게 바쁘게

가기 때문에

삭삭삭삭

소리가 나요

 

찡기네 할매 치마

올 굵은 무삼베 치마

찡기가 업힌 채 오줌을 싸도

금방 말라 버려요

홰나무 그늘에

잠간 앉았다 일어나면

무릎까지 말려 올라가

바닥 뚫린

광우리 같애요

 

- 삼베 치마 / 권정생

 

 

올통볼통 골목길

바우네 아빠가

소 등에 거름 싣고 가고

탈싹탈싹 소가

똥을 싸 놓고

 

바둑이 검둥이가

꼬리 치며 뜀박질하고

 

명히야가 무우 나부랭이 들고

엄마 뒤따라오고

모두 가고 오고

 

해님도 저네 집에

꼭꼭 가 버리면

 

골목길엔 가랑잎 하나

도르르 장난짓 한다

 

- 골목길 / 권정생

 

 

빤들 햇빛에

세수하고

어덴지 놀러 간다

 

또로롤롱

쪼로롤롱

 

띵굴렁

띵굴렁

 

허넓적

허넓적

 

쪼올딱

쪼올딱

 

어덴지

어덴지

참 좋은 델

가나 봐

 

- 개울물 / 권정생

 

 

감자는 잠꾸러기다

 

흙 속에 묻힌 걸

캐내도 안 깬다

 

숟갈로 껍데기를

벗겨도 안 깬다

 

삶아 먹어도 잠만 잔다

 

- 감자 / 권정생

 

 

까맣고 예쁜

운동화

몇 달째 두고두고

벼르셨던

울 아버지 읍내 장까지 가서

사 오신

"학교 갈 때만 신으라"

 

풋고추 두 되와

달걀 한 꾸러미

검정 고무신 두 켤레 값

어머닌

"돌멩이 차지 마"

 

학교 갈 때만 운동화

집에 있을 땐 헌 고무신

 

운동화 차 -

고무신 차 -

 

고무신과 운동화가

번갈아 나를 태우고 다닌다

 

집에 오면

마루 밑에 고무신이

기다려 있고

 

학교 갈 땐

운동화가 댓돌 위에서

떠날 준비를 한다

 

- 운동화 /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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