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등대지기

샌. 2017. 11. 10. 19:46

한때 등대지기를 꿈꿔 본 적이 있었다. 나처럼 혼자 잘 노는 게 특기인 사람은 누구나 그런 소원을 품어봤을 것이다. 사실 훈장 길에 들어설 때부터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나마 무난할 듯하여 선생을 선택했으나 사범 교육을 받으면서 오산이라는 걸 알아챘다. 선생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했다. 은둔형은 할 직업이 아니었다. 교직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엄청 심하기 때문이다.

 

첫 발령을 받기 전부터 다른 길을 생각했다. 첫 번째 시도가 신학이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Y대 신학대학원인데 당당히 시험을 보고 합격한 것이다. 1년 정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그러나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등 하다가 결국은 접었다. 만약 그때 신학의 길로 갔다면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두 번째는 선생을 3년 정도 하고 난 뒤였다. 선생이 내 직업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걸 체험으로 확인했다. 지금은 선생이 못 돼서 난리지만 70년대 후반에는 능력 없는 사람만 교단을 지킨다는 인식이 있었다. 보수가 좋은 대기업으로 많이 빠져나갔다. 나는 회사원이 될 주제도 아니어서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소싯적부터 흥미가 있었던 천문학 공부를 하기로 했다. 교직은 싫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천문대에서 별을 관측하며 연구하는 로망을 품었다. 사람의 세계와 절연되어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나름대로 준비했으나 대학원 시험에서 떨어졌다. 예상보다 문제가 어려워서 만만치 않다는 걸 알았다. 일찍 포기해 버렸다.

 

세 번째는 40대를 넘어서였다. 문득 등대지기를 해 보고 싶었다. 등대지기도 정식 공무원이니 시험을 봐야 했다. 시험 과목을 알아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너 달씩 외딴 섬에서 홀로 지낸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을 끌었다. 은둔형 인간에게는 딱 맞는 직업이었다. 답답해서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조건이 오히려 나에게는 맞을 듯했다. 단조로운 생활에서 풍요를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등대지기에 대해 알아보면서 놀란 사실이 있었다. 의외로 경쟁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뽑는 것도 아니고 결원이 생겨야 보충하는데 보통 수십 대 일, 어떤 때는 백 대 일까지도 오른다고 했다.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많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언제 시험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보다 아이 둘을 둔 가장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처음부터 선택하기 어려웠던 희망 사항이었다.

 

가끔 등대지기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는 걸 본다. 그럴 때면 과거의 내 꿈이 떠올라 빙그레 미소 짓는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등대지기는 한 번 도전하고 싶은 직업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유인등대가 점점 무인등대로 대치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체 등대지기는 현재 40명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래에는 등대지기라는 직업 자체가 없어질지 모른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빨리 태어나야 한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은 바꾸어 놓았다고

 

지나놓고 보니 내 선택은 늘 사람들이 많이 간 길이었다. 어느 길을 택했든 선택은 항상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누구에게나 그런 인생의 분기점이 있다. 지나고 보면 늘 아쉽고 후회가 된다. 가을이 짙어가니 더욱 그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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