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이완용 평전

샌. 2017. 11. 11. 08:26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인간에 내재하는 특수한 악마성을 부정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아이히만은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 누구라도 악인이 될 수 있다. 반인륜적이거나 반민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매국노로 비난받는 이완용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격적으로 이완용은 술도 마실 줄 모르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다. 조선 왕실 입장에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기도 했다. 더구나 친일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독립협회 회장을 맡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이라는 글씨도 이완용이 쓴 것이다.

 

이완용을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매국노라고 비난하며 망국의 책임을 그에게만 떠넘기기 전에 그가 어떻게 변절을 했고, 조선 왕실과 당시 지도자들은 어떤 책임이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같은 우를 범할 확률이 낮아진다. <이완용 평전>을 쓴 지은이의 의도면서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구한말의 정치 정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된 것이 기쁘다. 한 마디로 자주성의 결여, 즉 외세 의존이 문제였다. 왕으로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외세를 끌어들이는데 서슴치 않았다. 친청, 친러, 친일로 나누어서 이전투구로 싸웠다. 갑신정변 때만 정신을 차렸어도 나라가 그렇게 결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에서는 아예 '대원군'의 민비 시해라고 적고 있다. 칼을 든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쳐들어갈 때 대원군도 함께 있었고, 민비 제거 음모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실행은 일본인이 했지만 대원군이 주도했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민비 시해와 관련해 일본인만 욕하고 대원군의 책임을 비판하지 않는다면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할 것이다.

 

민비도 마찬가지다. 민비의 관심은 오로지 친정 일족을 권력에 앉혀 복록을 누리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백년대계나 소신은 아예 없었다. 민비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러시아에 붙었다가 결국은 일본에 의해 제거 되었다. 당시 궁궐의 상황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요사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 구한말과 비슷하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나라의 기본이 엉망진창이었던 그때와 비교하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닮은 건 있다. 외세에 의존하는 나쁜 버릇이다. 미국을 구세주처럼 떠받들고 그 힘을 빌려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 천 년이 넘는 역사 동안 중국에 사대한 습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친명에서 친일, 친미로 이어지는 악덕 유산을 끊을 때는 언제인가.

 

구한말의 역사를 보면 지도자의 기본 조건이 나온다. 현대의 지도자는 자주적이면서 당파를 초월해야 한다. 제 당파의 이익에 매이면 쓰라린 역사를 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러자면 정확한 역사 인식이 있어야 한다. 특정 나라에 빌붙지 않으면서 당당한 자주 외교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새 정부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책을 읽으며 안타까웠던 한 가지가 있다. 1883년 5월에 미국이 조선 주재 공사를 파견하자 조정에서는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보냈다. 민영익을 대표로 한 8명이었는데,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는 최초의 공식 사절단이었다. 사절단은 7월에 인천에서 출발하여 9월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워싱턴에 도착했다. 대통령을 예방하고 일행은 11월에 귀국길에 올라 유럽을 돌아보고, 지중해와 인도양을 돌아 다음 해 5월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세계 일주를 한 셈이다.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은 일행 중 한 사람은 귀국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눈이 부시는 광명세계에 갔다 왔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누구 하나도 그 놀라운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양 문물을 배우고 전하기 위한 기록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이하다. 당시 지도층의 마인드가 그랬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 들어와 3개월간 머물다 돌아간 로웰은 자신의 짧은 체험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으로 남겼다. 공자 왈 맹자 왈 읊으면서 정작 소용이 될 기록 문화 미비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책으로 접한 이완용은 변신의 귀재였다. 그가 한 말 중 일부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무릇 천도에 춘하추동이 있어 이를 변역(變易)이라 하며, 인사에 동서남북이 있어 이 또한 변역이라 한다. 천도와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변역의 논리를 그는 교활하게 이용했다. 그리고 실리와 성치를 좇느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무시해 버렸다.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에나 볼 수 있는 인물상이다.

 

책 끝에서 지은이는 말한다. 이완용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 역시 이성적인 역사 인식이 아니다. 한일합방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사건이 아니며 러일전쟁이 끝났을 때 나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 구한말은 매국노 천지였다. 지배 집단은 제 발로 설 줄 모르고 허구한 날 보호국 품으로만 들어가려다가 나라를 그 꼴로 만들었다. 일제의 침략 야욕만 강조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소홀히 한다면 역사에서 배울 것은 없을 것이다.

 

이완용은 만고의 매국노다. 그러나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비나 대원군이 역사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과는 결코 이완용에 못지않다. 이완용에 대한 단죄와 함께 모든 매국노에 대한 공정한 역사의 심판이 있어야 한다.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묻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역사의 이지메이며, 그를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 전가가 된다고 <이완용 평전>을 쓴 지은이는 말한다. 지은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윤덕한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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