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구원으로서의 글쓰기

샌. 2018. 1. 16. 11:07

지은이인 나탈리 골드버그는 글쓰기와 명상을 결합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들으며 마음공부에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공감하고, 자신의 고민을 잊고, 안도감을 느낀다. 글쓰기를 통해 삶을 버텨낼 힘을 얻고, 경험한 것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며, 자기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 책 <구원으로서의 글쓰기>는 단순한 글쓰기의 테크닉을 말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수행의 한 과정이고 치유의 수단이다. 지은이가 1주일에 걸쳐 진행하는 '삶과 언어 수련회'의 대부분이 '좌선, 걷기, 쓰기'에 할애되어 있다. 한 단어는 곧 한 걸음과 같다.

 

<구원으로서의 글쓰기>만 아니라 전작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도 제목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지은이는 쉬운 글쓰기를 강조한다. 연습의 하나로 카페에서 30분간 주변 광경을 묘사하는 글을 써보라고 한다. 일주일간 계속해 보면 글쓰기에 대해 배우는 게 있을 것이라고 한다. 어떤 글이라도 쓰다 보면 삶이 바뀌는 계기를 만난다. 물론 꾸준한 쓰기가 필요하다.

 

책에 나오는 이 글이 지은이가 말하려는 핵심을 말한다. "삶이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수행이며, 글쓰기는 그곳에 이르는 오솔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나를 가두는 일상의 사슬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의 일부인 진실한 나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대체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나 역시 블로그를 통해 뭔가를 끄적거리기 때문이다. 적어도 30분 이상은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만들어나가리라 믿는다. '구원'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삶의 위안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책을 읽으며 두 대목에 마음이 갔다. 사소한 예로 나오지만 나에게는 여러 모로 생각하게 하는 울림이 있었다.

 

하나는, 선(禪)에 관한 에피소드다. 지은이의 스승인 가타기리 선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선(禪)이 뭔가요?" 선사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가부좌를 하고 있었는데, 책을 한 권 들더니 '우리는 책을 이렇게 떨어뜨릴 수도 있고....' 하면서 그 책을 아무렇게나 책상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아니면 이렇게 내려놓을 수도 있지요' 라며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책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두 번째 방식이 선입니다."

 

또 하나는, 소음을 극복한 지은이의 체험이다. 글을 그대로 옮긴다.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을 말해야겠다. 나는 개를 싫어한다. 그런데 우리 옆집 사람들은 치와와 네 마리를 기른다. 어미 개가 새끼를 세 마리 낳았는데, 그 집 사람들은 한 마리도 남에게 주지 않았다.

날마다 그러는 건 아니지만 개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짖어 댔다. 자기들이 짖을 수 있다는 걸 자랑하는 것 같다. 나는 분노가 쌓이다 못해 머리가 돌아버릴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그 상황을 이겨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닫고 지내는 겨울은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봄이 되어 개들이 마당으로 뛰쳐나와 짖어 대는 소리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해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나는 이렇게 주문을 외운다. "나탈리, 너의 존재가 개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니."

"그래도 나는 조용히 지내잖아. 남의 평화를 방해하진 않는다고." 이렇게 변명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하기로 했다.(옆집에 사는 두 여성은 낚시로 잡은 신선한 송어를 나누어 줄 정도로 마음씨가 좋은데, 개 짖는 소리를 소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담 너머로 두 사람이 개들에게 다정하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어서 안다.) 개들이 쉬지 않고 짖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나탈리,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나는 천사가 아니라 밤에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덜 들리도록 선풍기를 튼다.)

지나고 보니 개 짖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능력 덕분에 나는 큰 즐거움을 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 나흘 동안은 한 번도 왈왈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치와와들은 지금도 거기에 사는데, 그렇게 시끄럽던 개들은 어디로 간 걸까?

 

소음 문제는 현재 나도 겪고 있다. 아파트 위층이 바로 이 글에서 개 키우는 이웃집과 같다. 한두 달도 아닌 8년째지만,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두세 시간은 잠을 설치는 게 예사다. 어젯밤에는 어쩔 수 없이 인터폰으로 부탁을 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조용해졌지만 오래 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윗집에서는 아랫집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명상 전문가인 지은이는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으로 이를 극복했다. 상대가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마음이 너그럽다가도 막상 그때가 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린다. 나도 이렇게 주문을 외어야 할까.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 그래도 개 짖는 소리보다는 낫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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