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샌. 2018. 5. 16. 11:08

안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장석주 작가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 소박한 삶을 살자는 흐름은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소비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반감이자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운동이다. 작고 단순함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문명이 주는 안락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불편하더라고 적게 소비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사는 것, 그게 내 방식의 삶이다. 하루의 보람은 사과 한 알 먹는 거, 세 시간 이상 햇볕을 쬐며 걷는 거, 8시간 정도 읽고 쓰는 거, 심심함 속에 머무는 거 따위다. 그리고 이타적 생각을 하며 살기,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 되기를 실천해야 삶이 온전해진다."

 

작가는 시골에 살며 그런 삶을 실천한다. 도시에서 출판사 일을 했지만, 자신의 행복을 찾아 접고 귀향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었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에는 욕심을 버리고 소박함을 사랑해야 행복해진다는 작가의 신념이 담겨 있다.

 

작가는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으면서 동시에 쾌락주의자에 가깝다. 둘이 상치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 없이 행복은 없다. 대신 욕구를 최소화하라. 자연적이면서 소박한 욕구의 충족에서 행복을 찾는다. 금욕적인 에피쿠로스라고 할까. 작가는 행복의 원천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다.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다면 오늘 아침, 그걸 어떻게 굴릴까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내가 너무 가난하다면, 끼니 끓일 것을 걱정하며 의기소침해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큰 부자도 아니고, 엄청 가난한 사람도 아닌 것은!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며, 작은 소유에 기꺼워하며 사는 사람이다. 거문고도 배우지 못하고, 미인과 함께 살지는 못한다 해도 큰 욕심은 버리고 소박하고 단순함을 사랑하는 삶에 기뻐하는 것이 바로 내 행복의 원천이다."

 

물리학 이론처럼 본질은 단순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단순할수록 본질의 가치에 가까워진다. 단순한 삶은 성공과 소유의 신화를 버리고 가치와 충만함을 추구한다. 제 안의 욕망을 비우고 생활 방식을 단순화한다. 그래야 행복한 자족의 삶이 가능하다. 그러자면 문명의 유혹을 덜 받는 시골에 터를 잡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사람과의 교류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내 고개는 여전히 시골을 향하지만 두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책에 나온 글 중에서 감미롭게 읽은 '당신에게'를 옮긴다.

 

당신에게

 

여름 초입인데, 햇빛은 벌써 빙초산같이 뜨겁습니다. 정수리를 꿰뚫듯 작열하는 땡볕 아래에서 존재 자체가 곧 녹아 내릴 듯합니다. 서운산 산딸나무는 흰꽃을 피우고, 산벚나무 열매는 까맣게 익어 갑니다. 오전 내내 감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던 유혈목이는 그늘진 수돗가 시멘트 바닥에서 긴 몸을 늘어뜨린 채 쉬고 있습니다. 물통을 들고 나가다가 유혈목이의 휴식을 방해할까 봐 돌아섭니다. 해가 울울창창한 밤나무숲 너머로 지고, 황혼이 새의 깃털처럼 떨어지겠지요.

 

날개 달린 것들은 공중에 떠서 날고, 더위에 지친 날개 없는 것들은 지상에서 고즈넉한 저녁을 맞습니다. 내 안의 눈동자도 문설주 아래로 내려오는 초록늑대거미를 바라보며 고요합니다. 이 저녁 당신은 멀리 있고 나는 박복한데 그 박복이 데면데면하기만 합니다. 이 불운과 박복을 위로하려면 심오한 기쁨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유리 감옥 주홍빛 밀랍에 갇힌'(보들레르) 포도주를 한 병 땄습니다. 그 붉은 포도주가 영혼으로 들어와 불러줄 '빛과 우애 가득한 노래 한 곡'을 기다립니다. 모란 작약이 필 무렵 잠시 보았던 당신, 지금은 그 노래의 후렴처럼 아득하고 멀기만 합니다.

 

낮엔 안성 시내에 나가 '우정' 집에서 냉면 한 그릇을 먹고, 마침 장날이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삼죽에서 왔다는 할머니가 벌여 놓은 노점에서 잡곡 몇 가지, 호박, 가지, 감자 따위를 샀습니다. 저녁이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쳐 나무들이 살랑댑니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한 구절,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가 저절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습니다. 결국 내가 삶에 지나치게 편향된 인간이란 걸 실토하지 않을 수 없네요.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워서 얻은 자유에 대해 숙고합니다. 잘 살았다고,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떠나고 싶습니다. 바둑에서 일국一局의 승패는 덧없는 것이지요. 결국은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원하라, 가질 수 있느니!' 젊은 날에는 그렇게 뭔가를 쥐려고 열망했고, 그 열정으로 여기까지 달려왔겠지요. 소유하는 자는 결국 소유당한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 건 천만다행이지요. 이제 적게 소유하며 한량으로 사는 것의 자유로움만이 내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지 마라, 자유롭게 되니리!'라는 금언을 자꾸 가슴에 새기는 것이지요.

 

어느덧 밤입니다. 섬돌 밑 풀벌레 노래는 높고, 공중에 높이 뜬 달은 조도照度를 한껏 올린 채 뜰에 서성입니다. 검은 수풀 위로 반딧불이가 날아와 군무를 추었습니다. 집 안팎 불들을 다 끄고 오래 그 군무를 감상했습니다. 다시 불을 켜고 <논어>을 읽었습니다. 공자는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는 마치 조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하고,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는 마치 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말합니다. 그게 '예禮'라는 것이죠. 늦도록 책을 읽고 깜빡 덧창을 닫는 걸 잊은 채 잠이 들었나 봅니다. 서늘한 기운에 깨어나 덧창을 닫고 다시 무명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남은 잠을 청합니다. 수백 마리의 새 떼들이 날아와 지저귀는 소리에 깨어나는 이 청량한 아침의 아늑한 늦잠이라니!

 

나이를 먹는 데도 여전히 꿈을 갖는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리스 여행을 위해 그리스어를 배우는 당신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나는 삼백 가지의 꿈을 꾸고, 이백아흔아홉 개는 버렸습니다. 끝내 이루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나를 만든 건 바로 기어코 이룬 한 개의 꿈이 아니라 그 이백아흔아홉 개의 덧없이 버려진 꿈이었지요. '자신이 쓰지 않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사는 법을 배우라'(에피테토스)고 하는데, 잘 산다는 것은 뭐, 그런 걸까요? 삶을 만드는 건 우리가 걸어온 길이겠지만, 정작 우리 마음을 끌고 가는 건 가 보지 못한 그 수많은 길들 아니던가요?

 

풀잎에 맺힌 이슬은 함초롬하고, 빨래들은 잘 마르고, 잠은 달콤합니다. 여름에 이루어지는 이별의 예식들은 짧아야만 합니다. 여름은 생각보다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와 추분 사이에서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는 짧게 끝나고 나무들은 저마다 제 발등 아래에 유순한 그림자들을 키우겠지요. 뜰안 대추나무 가지마다 매달린 대추들에 붉은 빛이 감돌겠지요. 그리고 곧 동지冬至의 밤들이 서리와 초빙初氷과 첫눈을 몰아오겠지요. 오늘밤도 당신에게 숙면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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