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금란교회의 추억

샌. 2020. 9. 6. 08:07

금란교회 하면 개신교 신자든 비신자든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등록된 교인 수가 14만 명이 되는 감리교회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교회다. , 워낙 유명세를 탄 김홍도 목사가 시무한 교회로 보수 반공 이념의 중심지 역할을 했. 지난 2일에 김홍도 목사가 별세했는데, 전광훈을 길러낸 스승이었다는 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나도 금란교회와 김홍도 목사와의 짧은 인연이 있으므로, 그분의 부고에 잠시 숙연해지며 거의 50년 전 옛일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나는 1970년대 초중반에 금란교회 신자였다.

 

1972, 대학교 2학년생일 때 금란교회에 처음 나갔다. 같은 과 친구가 소개해 주면서 담임목사의 영적 능력이 굉장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김홍도 목사가 금란교회에 막 부임했을 때였다. 처음 교회를 나가면서 영적 능력이 뭔지 알겠는가, 제일 구미를 당긴 건 예쁜 여학생 C가 있어서였다. 친구는 같이 학내 기독 활동을 하던 C를 만나게 해 주었고, C는 금란교회 신도였으므로 내가 교회 생활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앙에 별 흥미가 없던 내가 교회를 꾸준히 다니게 된 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C를 만나는 재미 때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밖에서는 한 번도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C가 나에게 보인 친절이 결코 인간적인 호감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금란교회에 끌리게 된 데는 이름도 한몫을 했다. 지금까지 '금란(金蘭)'만큼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교회를 보지 못했다. '금란'이라고 하면 귀한 난 향기가 날 것 같다. '금란'은 어느 이름으로 써도 좋을 것 같은데, 심지어 절 이름으로 써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금란사(金蘭寺), 멋있지 않은가. 기독교와 불교라는 두 종교의 벽을 허물고 포용할 것 같은 찬란한 이름이다. '금란'이라는 이름은 이 교회를 세운 분이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기 때문이다. 50년대에 교회를 세울 때 그분 이름에서 두 글자를 취해 지었다고 한다. 내용이야 어찌 됐든 이름만은 세계 제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1970년대는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던 시기였다. 특히 금란교회는 엄청나게 신자 수가 증가했다. 내가 처음 나갔을 때는 작은 건물에 마루 위에서 방석을 깔고 수십 명이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 곧 포화 상태가 되었고 새 건물을 지었다. 붉은 벽돌 건물이었는데 당시에는 근방에서 제일 높았다. 이 건물도 오래 못 가고 다시 더 큰 건물이 들어섰다. 금란교회의 양적 팽창은 무엇보다 김홍도 목사의 개인적인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김홍도 목사는 신자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망을 받았다. 그만큼 카리스마가 있고, 설교 역시 힘이 있었다. 영혼 구원과 성령을 강조하면서 교회를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게 전도였다.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망우동 일대로 수시로 전도를 나갔다. 둘씩 한 조가 되어 버스 전도를 하기도 했다. 파트너가 예수를 믿으라고 웅변을 토하는 동안 나는 승객들에게 전도지를 돌렸다. 그런데도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금란교회를 부흥시킨 힘은 담임목사의 공격적인 전도 캠페인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주일 동안 수업을 빼먹고 부흥회에 참석한 일, 철야 산상 기도를 한다고 북한산 캄캄한 동굴 속에서 주님을 부르며 울부짖던 일, 새벽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새벽기도회에 나갔던 일, 적응하기 어려웠던 통성기도, 은사를 갈구했지만 부족한 믿음만 드러날 뿐이었고, 한 마디로 금란교회 분위기는 나와는 맞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를 재촉하며 교회의 가르침에 맞추느라 나름 노력했다교회에 나가면서 방황이 정리된 게 아니라 내적 갈등은 오히려 깊어졌다. 이성으로 납득되지 못하는 신앙은 모래 위에 심은 풀과 같았다.

 

마지막 발버둥이 엑스플로 대회였다. 19748월에 여의도에서 열린 개신교 부흥 집회였다. 대회 이름도 성령 폭발을 뜻하는 엑스플로였다. 나는 그때 지구 준비 집회 일을 맡아 몇 달 전부터 동분서주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지구 청년 모임을 수시로 열었다. 본 대회는 8월 중순에 일주일간 열렸는데 여의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숙식을 하며 참가했다. 그러나 이 대회를 계기로 나는 이런 신앙 운동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믿음은 뿌리가 깊을 수 없다. 신앙은 고정된 스타일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걸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한다. 교회는 그 과정을 격려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신학대학원 입학 준비를 하게 되었다.

 

엑스플로에 참가하던 8월 15일에 짬을 내 잠깐 시내에 나갔다. 그날 개통된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타보기 위해서였다. 그전까지 종로는 지하철 공사하느라 늘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거리는 말끔해졌고 생전 처음 본 지하철에 황홀한 날이었다. 8월 15일은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날이기도 했다.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엑스플로와 지하철과 육영수, 이 셋으로 선명히 기억되는 1974년 광복절이다.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년이었다.

 

금란교회 청년회에서는 성경 공부 시간을 만들어 신앙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김홍도 목사가 이를 용인하지 않았. 기독교 신앙은 이성으로 따지는 게 아니다. 오직 믿음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목사의 소신이었다. 우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교회 안에서 김홍도 목사의 파워는 막강했다. 그때 교회에는 김건도 전도사도 있었다. 김홍도 목사의 형제는 넷인데 모두 목사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막내가 김건도 전도사였는데 그때는 아직 목사 안수를 받기 전이었다.

 

김건도 전도사도 형 못지않게 카리스마가 있었다. 당시 청년회를 지도했는데 워낙 주관이 강하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 소위 믿음 좋은 청년 외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달막한 체구를 빗대 우리끼리는 "짜몽"(짜리몽땅의 줄임말)이라고 은밀히 불렀다. 누가 그 별명을 부르면 같이 재미있어하면서 쉿,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담임목사보다는 나이대가 비슷해서인지 김건도 전도사와는 스스럼없이 지냈다. 강단 아래서 보게 되는 인간적인 면이 솔직해서 좋았다. 김건도 전도사는 형 밑에서 수련하면서 일찍부터 해외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김홍도 목사는 성경에서 일점일획도 건드릴 수 없다고 믿는 분이었다. 그분이 자주 하신 말이 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절대진리 그 자체다." 기독교 외에는 사탄의 종교였다. 자유 사상이 교회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근본주의의 씨앗이 그때부터 내재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술, 담배를 하다가 걸리면 교회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어찌 그런가. 청년회 모임이 끝나면 가끔은 막걸릿집으로 우르르 몰려가기도 했다. 한 가지 고마운 건 있다. 내 젊은 시절에 그나마 술과 담배를 절제한 건 오로지 금란교회 덕분이었다.

 

당시는 박정희의 철권통치 시대였다. 학교에 나가면 돌멩이를 들었지만, 교회에서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둘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다. 대부분의 교회는 정치 현실에 침묵했다. 동조했다는 말이 맞을지 모른다. 독재 정권은 교회가 필요했고,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위해 싸우셨는지 그때는 깊이 탐구하지 못했다. 물론 교회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때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대통령 욕만 해도 붙잡혀 갔다. 술에 취해 택시에서 시국을 불평했다가 기사의 신고로 옷을 벗은 공무원이 내 가까이에도 있었다. 감옥에 안 간 것만도 다행이라 했다. 그때는 입도 벙긋 못 했던 위인들이 지금 정부를 독재라고 비난하며 태극기를 흔드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남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 주변의 독재부터 청산했는지 묻고 싶다.

 

"하나님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성경이 전하는 제일 계명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여기서 '이웃'이 같은 신앙 동아리만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소위 구령(救靈) 사업에만 전념했을 뿐 이웃 사랑에서는 소홀했다. 금란교회가 위치한 망우동은 서울에서도 가난한 동네였다. 교회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부지기수였다. 교회는 소외되고 약한 자와 함께 있어야 했고 가르쳐야 했다. 그러지 못한 대가를 작금의 코로나 시국에서 받고 있는 게 아닐까. 참된 신앙은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치우침 없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금란교회에서 그런 걸 배우지 못한 게 아쉽지만, 당시는 대부분의 교회가 그러했으니 금란교회만 책잡을 일도 아닐 것이다.

 

70년대에 남녀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데가 교회였다. 지금은 학교가 대부분 남녀공학이지만 그때는 남학교와 여학교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나마 교회에 가면 서로 섞일 수 있었으니, ‘교회 오빠란 말이 있듯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 연애가 많았다. 여자를 만나러 교회에 오는 엉큼한 늑대도 상당 비율이었을 것이다. 청년회에서도 서로 눈이 맞아 사귀는 짝이 생겼다. 대부분 나중에 알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흔했다. 교회 안에서 소문이 나면 눈총을 견디기 어려웠다. 나와 동기인 LH의 경우도 그랬다. 결혼한다고 발표할 때까지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 교회에서 비밀 데이트를 즐겼을 둘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던 S가 있었다. 면목동에서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공장에 나가고 있던 아가씨였다. 눈이 크고 예뻤으며 마음씨도 천사같이 착했다. 신앙심이 대단해서 교회일에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둘은 모임이 끝나면 버스를 갈아타는 데까지 걸어선 가곤 했다. 보통은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길인데 걷자면 30분은 넉넉히 걸렸다. 그동안에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헤어질 지점에 오면 S는 부리나케 돌아서서 뛰듯이 멀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S는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동행을 해 준 것이었다. 돌아보면 나를 좋아한 여자는 드물었지만, 내가 좋아한 여자는 많았다. 여자(女子)를 붙여 쓰면 '좋을 호(好)'자가 되지 않는가. 여자를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무죄라고 생각하지만 실속은 없었다. 어쨌든 교회를 다니면서 이성에 대해서만 사랑 실천을 열심히 한 것 같아 부끄럽다.

 

주일이 지나면 녹음한 김홍도 목사의 설교 말씀을 풀어 등사해서 다음 주에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팸플릿 제목이 불기둥이었다. 그 일을 담당하던 L이 바쁠 때는 내가 도와주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면 간단하겠지만, 그때는 녹음기를 반복해서 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옮겨적어야 했다. 지루한 작업이지만 재미도 있었다. L은 그 작업을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모은 설교집이 나중에 <불기둥>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표지가 빨간색이었던 기억이 난다.

 

사 년 전쯤에 나를 금란교회에 소개해 준 친구를 부산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친구는 전공과는 관계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교회도 담임목사의 성품을 닮는 듯 분위기가 차분하면서 경건했다. 몰래 가서 주일 예배를 훔쳐보고 친구의 설교를 들은 뒤 목사실에서 거의 50년 만에 재회했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너, 그 교회를 오래 못 다닐 줄 알았다. 금란교회가 네 성향과 맞지 않을 거라 걱정했거든.그렇다면 처음부터 제대로 안내해 줄 일이지, 오래도록 헤맨 책임을 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감히 목사님 앞에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아마 이 친구의 적극적인 권유가 아니었다면 내가 교회를 나갈 일은 없었을 터였다.

 

사람의 기억 창고는 허술하며 뒤죽박죽이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모래알보다 사소한 것이 히말라야보다 크게 과장되어 있기도 하다. 금란교회에 관한 내 기억도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청년회 회원이 이사를 가게 되어 음식점에서 송별회가 열렸다. C가 대표로 홍민의 '석별'을 불렀다. "떠나는 이 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떠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마주 앉은 나를 향해 부르는 노래라고 가슴 떨며 들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 노래가 들려오면 문득 그때로 돌아가 피식 웃게 된다. 이런 애틋한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금란교회를 슬그머니 떠났다. 

 

이태 전에는 망우동에 갔다가 금란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웅장한 교회 건물이 너무 압도해서 여기가 옛날 그 자리였는지 자꾸 주위를 둘러봤다. 고전적 스타일의 붉은 벽돌의 교회 건물, 예배 끝나면 왁자지껄 나누던 인사, 모임 끝나고 들렀던 길 건너 2층 다방, 좀 떨어진 막걸릿집, 크리스마스이브에 새벽송을 돌 때 차가운 하늘로 퍼지던 청춘의 웃음소리, 다 어디로 갔는가. 시선은 허공을 빙 돌 뿐이었다.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했던 내 나이 20대 초반이었던 , 어쩌다 금란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단지 나그네로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을 뿐이었을까. 금란교회가 나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었던가. 김홍도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들으며 시절 인연으로 만났던 그 시절의 사람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지금은 다들 일흔 전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과오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이만큼 와서 돌아보니 알겠다. 그때가 그나마 우리 일생에서 제일 순수했고 열정에 찼던 시기였음을. 내 청춘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던 그때를 아련히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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