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 28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뜻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예순 번의 겨울을 겪으면서 나의 따뜻했던 겨울은 언제였을까.먼 과거,철모르던 유년의 겨울로 돌아가면그 온기 아직 남아있을까.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이 겨울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 뭐가 빠져있길래 이리 차고 공허한걸까. 이 시가 그리는 ..

시읽는기쁨 2012.01.31

겨울 아침의 산길

서울로 나가는 아내를 바래주고 겨울 아침의 산길을 걷는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으나 산에 드니 따스하다. 이미 봄이 잉태된 소리를 듣는다. 올겨울에는 눈을 보기 어렵다. 살짝 몇 번 흩날렸을 뿐 땅에 쌓인 적은 없다. 발걸음 따라 건조한 흙먼지가 날린다. 날 포근해지면 강원도로 달려가 눈과 겨울 바다를 보고 싶다. 칠사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주 시내의 모습. 내가 사는 동네를 가운데에 넣었다. 칠보사 마당에 있는 목련의 솜털에 윤기가 돈다. 그러나 아직은 추위에 몸을 도사리고 있다. 딱새도 만났다. 누군가가 나뭇가지에 먹이를 걸어놓았는데 그 주위를 배회하며 떠나지 않는다. 나를 경쟁자로 생각하는지 "삐- 삐-", 경고음을 내며 어서 가라 독촉한다. 어제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이는 무지하기 때..

사진속일상 2012.01.30

소음 수행

'소음 수행'이라 부르기로 한다. 아파트 이웃을 잘 만난 덕분이다. 층간소음을 경험한 사람은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알 것이다. 뾰족한 해결 방안도 없이 그저 견뎌내야 한다. 소음을 이젠 마음 다스리는 기회로 삼기로 한다. 수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명상하려고공동묘지를 찾기도 한다. 극한 환경을 일부러 찾아 나선다.층간소음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어떤 소음이나 방해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훈련의 기회이다. 선원이나 수도원에서만 수행하는 게 아니다. 생활의 모든 장소가 수행 도량이다. 화가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내 마음을 살핀다. 소음 방향으로 쏠리는 마음을 피해 호흡에 집중한다.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내 마음을 바꾸는 방법밖에는 없다. 원망과 짜증을 부려봐야스트레스를 ..

참살이의꿈 2012.01.29

장자[194]

태왕 단보가 빈에서 살 때 북적이 침입했다. 가죽과 비단을 바쳐 사대했으나 받지 않고 개와 말을 바쳐 사대했으나 받지 않고 주옥을 바쳐 사대했으나 받지 않았다. 북적이 요구하는 것은 땅이었다. 태왕이 말했다. "남의 형과 같이 살고자 그 동생을 죽이고 남의 부모와 함께 살고자 그 아들을 죽이는 짓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다. 그대들은 모두 그냥 머물러 살도록 노력해 보라. 내 백성이 되는 것과 북적의 백성이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느냐? 내가 들은 바로는 기르는 수단 때문에 길러야 할 주체를 해치지 말라고 했다." 태왕이 지팡이를 짚고 빈을 떠나자 백성들이 줄지어 그를 따랐다. 그래서 기산 아래에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태왕이야말로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太王亶父居빈 ..

삶의나침반 2012.01.28

표준모형

올해 과학계의 최대 화제는 힉스(Higgs) 입자의 발견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대형강입자충돌기(LHC) 실험을 통해 힉스 입자의 흔적을 포착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올해는 아마 확증의 수준까지 나아가지 않을까 싶다. 힉스 입자의 발견은 표준 모형에 대한 강력한 입증이 된다.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과학은 표준 모형으로 답한다. 표준 모형은 다양한 실험적 검증을 통해 가장 믿을 만한 이론적 체계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우주에는 네 개의 기본 힘이 존재한다.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 중력이다. 왜 하필 우리 우주에는 네 개의 힘이 존재하는 걸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표준 모형은 중력을 제외한..

길위의단상 2012.01.27

신과 인간

1996년 3월 27일, 알제리에 있는 티베린 수도원에서 프랑스인 수사 일곱 명이 반군에게 납치되었다. 반군은 인질과의 교환 협상을 벌이다가 거부당하자 두 달 뒤 수사 전원을 살해했다. '신과 인간'은 이 실화를 다룬 영화다. 이슬람 근본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로 무장한 반군은 사전에 수사들에게 알제리를 떠날 것을 경고한다. 정부 쪽도 같은 권고를 한다. 그러나 수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기로 결정한다. 거듭된 생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일상 생활을 하면서 신의 부름에 충실히 따른다. 영화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들의 고뇌와 의지를 그려 나간다. 영화에는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기관총을 장착한 전투용 헬기가 굉음을 내며 수도원 바로 위에 떠서 협박한다. 그 소리에 맞서 수사들은 수도원 안에 함께 모여 찬송을..

읽고본느낌 2012.01.26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들어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시읽는기쁨 2012.01.25

2012 설날

아이들이 떠난 올 설은 단촐했다. 어머니를 포함해 넷이서 차례를 지냈다. 설 전날 오전에 일찌감치 차례 준비를 마치고 오후에는 햇빛바라기를 하며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았다. 떡국을 먹다가 아내는 눈물바람을 했다. 귀하게 키워서 남의 집에 주었다고 어머니도 한 소리 거들었다. 공주 대접 받고 있을 텐데 뭘 그러느냐, 했지만 내 마음도 한 쪽이 슬펐다. 광주에 돌아오니 딸과 사위가 세배를 왔다. 고향에서는 자식이 되었다가, 내 집에서는 부모가 된다. 통영에 다녀온 둘째는 싱싱한 해산물을 사 가지고 왔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대구가 엄청 컸다. 자식들은 떠나갔고 다시 둘이 남았다. 집은 잠시 적막에 잠긴다. 쓸쓸한 듯, 흐뭇한 듯, 집안에 묘한 기운이 감돈다. 이 또한 삶이 노년에 주는 새로운 맛이고 선물이 ..

사진속일상 2012.01.24

대금산에 오르다

트레커 팀 네 명과 가평 대금산에 올랐다. 대금산(大金山, 704m)은 이곳에 있었던 광산에서 많은 금이 나와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가평 쪽 산 아래 마을이 두밀리(斗密里)다. 예전에는 심심산골 오지였다는데 지금은 산자락까지 팬션과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다. 우리는 마을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산에 들었다. 700m급이지만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서면 멀리 축령산과 천마산이 한눈에 보인다. 전망이 참 좋다. 정상에서 우리는 청우산 방향으로 향했다. 이러면 두밀리를 출발점으로해서 원을 그리는 모양으로 한 바퀴 라운딩을 할 수 있다. 산길은 명지지맥을 따라 적당한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마을에 다 와서는 길을 가로막은 전기 울타리 때문에 잠시 헤맸다. 가평에 나와 '인천집'에서 먹은 늦은 점심도..

사진속일상 2012.01.19

장자[193]

순임금은 천하를 선권에게 선양하려 했다. 선권은 말했다. "나는 우주의 중앙에 서 있다. 겨울에는 모피를 입고 여름에는 갈포를 입으며 봄에는 밭 갈고 씨 뿌리며 몸은 만족스럽게 노동을 하고 가을에는 추수하며 몸은 만족스럽게 휴식한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며 천지에 소요하니, 마음과 뜻이 만족하거늘 내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슬프다! 그대는 나의 이 행복을 알지 못하다니!" 선권은 천하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속세를 떠나 버렸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舜以天下讓善卷 善券 曰 余立於宇宙之中 冬日衣毛皮 夏日衣葛치 春耕種 形足以勞動 秋收斂 身足以休息 日出而作 日入而息 逍遙於天地之間 而心意自得 吾何以天下爲哉 悲夫 子之不知余也 遂不受 於是去 而入深山 莫知..

삶의나침반 2012.01.18

Live Light, Eat Right

"Live Light, Eat Right." 어느 분이 소개해 준 이 말을 올 한 해 나의 화두로 삼기로 한다. "가볍게 살고, 바르게 먹자." 둘 중에서 '바르게 먹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최근에 현대식 양계 공장에서 닭을 키우는 얘기를 들었다. '대형 양계 공장에서는 닭들이 좁은 곳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살기 위해 오로지 먹는 일만 되풀이한다. 모든 본능이 차단당하자 심한 스트레스로 닭들은 서로 부리로 쪼며 공격한다. 공장에서는 상품 가치 보호 차원에서 닭들의 부리를 미리 자른다. 그리고 닭들은 성장 속도를 높이기 위해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가 다량 투여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 달 남짓이면 육계가 되어 고스란히 우리 식탁으로 올라와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대형 농장에서 키워지는 닭의 운명은 태생부..

참살이의꿈 2012.01.17

물리학의 최전선

오랜만에 물리학 책을 읽었다. 아난타스와미(A. Ananthaswamy)가 쓴 이다. 그래도 전공이랍시고 물리 용어를 접하니 반가우면서 마치 고향을 찾은 듯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 책은 지은이가 세계 곳곳의 실험물리학의 최전선을 찾아가서 현장을 직접 보고 과학자들을 인터뷰해서 썼다. 세계에서 가장 춥고, 깊고, 높은 곳에서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실험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남극 대륙의 반물질 탐사,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힉스 입자를 찾는 대형강입자충돌기(LHC, Large Hardron Collider), 시베리아 바이칼 호의 뉴트리노 검출 장치, 수단 광산의 극저온 암흑 물질 탐사, 우주 배경 복사 탐사 위성, 그리고 칠레, 하와이, 남아프리카 등의 초대형 망원경 프로젝트가..

읽고본느낌 2012.01.16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낯익은 사람들이 한둘씩 내린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겠다 버둥대다가 우악스런 손에 끌려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웃음을 머금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반쯤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바깥은 새까맣게 얼어붙은 어둠 열차는 그 속을 붕붕 떠서 달리고 나도 반쯤은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땀내 비린내로 숨막히는 열차 속 새 얼굴들과 낯을 익히며 시시덕거리지만 내가 내릴 정거장이 멀지 않음을 잊고서 - 숨막히는 열차 속 / 신경림 몇 년 전 직장 건강 검진에서 심전도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 재검사를 받으라는 통보가 왔지만 무시했다. 요사이 겨울 찬 바람 속을걸을 때면 가슴에 통증이 올 때가 있다. 정말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심장 쪽 질병은 대개 급사로 이어진다...

시읽는기쁨 2012.01.15

한 장의 사진(17)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J가 세상을 떴다. 10년 넘게 병마에 시달리다가 안식에 들었다. 상태가 많이 나빠졌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으나 한 번 찾아가 보지를 못했다. 부고를 접하니 그게 제일 미안하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재작년 어느 결혼식장에서였다. J는 성치 않은 몸으로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지방에서 올라왔었다. 피로연에서 옆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도 부인이 도와주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J는 키가 작지만 당찬 성격이라 동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J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지금도 말한다. 산골 집에서 중학교까지 10km를 3년 내내 걸어 다니면서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과외 한 번 받은 적 없었다. 집이 가난해서 방학 때는 아이스케키 장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

길위의단상 2012.01.14

안흥지 애련정

이천에 있는 안흥지(安興池)는 지역에서 안흥방죽으로 불리는 오래된 저수지다. 방죽은 방축(防築)이 순화되어 불리는 이름이다. 조선 세조 때 축조되었는데 우리나라 연못의 전형적인 모습인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 둘레 길이가 1250척(약 400m)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흥지는 질 좋은 이천 쌀을 생산하는 논에 물을 공급했다. 당시 조선시대 대신들은 안흥지 인근의 논을 소유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한때 수원 고갈로 폐허가 되었으나 10여 년 전에 복구공사를 벌여 옛 모습을 되찾은 유서 깊은 저수지다. 안흥지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애련정(愛蓮亭)도 복원되어 있다. 애련정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성종 5년(1474)에이천 부사 이세보(李世珤)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

사진속일상 2012.01.13

장자[192]

노자가 말했다. "너는 눈을 부릅뜨고 거만하니 너는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위대한 결백은 더러운 듯하고, 성대한 덕은 부족한 듯하다." 양자거는 움칠하며 얼굴빛을 바꾸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예전에는 숙객들이 그를 자기 가문의 대인처럼 맞이했으며 주인은 자리를 펴고, 처는 수건과 빗을 들고 숙객들은 자리를, 불 쬐던 자들은 화로를 양보했으나 이번에 돌아오자 숙객들이 그와 벗하고 자리를 다투었다. 老子曰 而휴휴우우 而誰與居 大白若辱 盛德若不足 陽子居?然變容曰 敬聞命矣 其往也 舍者迎將其家 公孰席 妻孰巾櫛 舍者避席 煬者避조 其反也 舍者與之 爭席矣 - 愚言 2 이 짧은 일화에서 장자의평등사상을 엿볼 수 있다. 양자거는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당장 삶으로 실천한다. 그는 높은 데를 버리고 낮은..

삶의나침반 2012.01.12

영월암 은행나무

경기도 이천 설봉산에 있는 영월암(映月庵)은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나옹선사가 중건한 아담한 절이다. 절 앞에는 나옹선사가 중건 기념으로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두 개의 줄기가 나란히 붙어 자라는데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나무다. 전설대로라면 수령은 700년 가까이 된다. 나무 높이는 37m로 상당히 큰 편이다. 줄기 둘레는 5m다. 그런데 나무가 위치한 곳이 어수선하고 불안해 보인다. 이 은행나무는 영월암을 상징하는 나무가 아닌가. 주변 정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천년의나무 2012.01.11

설봉산에 오르고 온천욕을 하다

이천에 있는 설봉산(雪峯山)은 따스한 추억이 있는 산이다. 갑자기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졌다. 오후가 되어서야 아내와 집을 나섰다. 이런 게 백수의 좋은 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라도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다. 산 아래 있는 설봉공원은 예전과 달리 깔끔하게 단장되었다. 건물도 많이 들어섰다. 너무 많이 변해 전에 올랐던 입구는 찾지를 못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 길을 따라 산에 들었다. 설봉산 산림욕장이라는 나무문을 지났다. 호암약수터를 지나 능선에 오르면 설봉산성(雪峯山城)이 나타난다. 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 백제의 석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산성 둘레는 약 1km이고, 칼바위 부근에 장대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두 개의 판석이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생겼다. 칼바위 부근에 있는 소나..

사진속일상 2012.01.10

인간과 사물의 기원

재미있는 책이다. 이라는 제목만 보면 무거운 과학 서적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책 제목도 일부러 이렇게 비틀어 정한 것 같다. 지은이 김진송 씨의 기발한 상상력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지은이는 국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후 양평에 내려가 목수가 된 분이다. 최근에는 라는 책을 펴냈다.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지식에 대한 냉소가 상쾌하다. 기존 관념을 혐오하면서 유머러스하게 비튼다. 거기에는 인간 문명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현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서의 세계로 보이지만 지은이에게 합리성과 이성은 질서를 위한 형식이며 억압일 뿐이다.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올바르다고 믿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로는 자신의 억압과 속박..

읽고본느낌 2012.01.09

동안거 / 고재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 동안거(冬安居) / 고재종 겨울이면 깊숙한 숲 속에서 갇히고 싶다. 산골 외딴집에 목화송이 같은 눈이 지붕까지 쌓이면 저절로 안거(安居)에 들 수밖에 없으리라. 지상의 끊어진 길을 반기며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으리. 그렇게 무장무장 하늘로 오르는 길을 꿈꾸리. 한두 달 그렇게 지내면 나에게도 뽀얀 새 살이 돋아나지 않을까. 봄과 함께 연초록 새싹도 피어나지 않을까.

시읽는기쁨 2012.01.08

다육이(2)

십여 종류 되는 다육이 중 하나가 두 번째로 꽃을 피웠다. 베란다에 있을 때는 잠잠하더니 겨울이라 방으로 옮겨주었더니 고맙다는 듯 화답한다. 꽃은 꿩의비름을 닮았는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글쓴이는 인간과 꽃 사이의 알 수 없는 강한 유대감을 궁금해한다. 적지 않은 꽃의 모양이 그토록 인간의 부끄러운 부분을 닮게 된 이유, 인간이 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사랑하는 남녀가 하필 꽃을 열심히 주고받는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다. 글쓴이의 유머러스한 해석은 이렇다. '인간에게 꽃의 의미는 이미 문화적이다. 꽃을 가꾸고 꽃으로 장식하고 꽃을 선물로 주고받는 과정에 대해 어느 부류의 인간도 이의를 제기해 본 적이 없다. 이는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육체적인 성적 표현에 대한 사..

꽃들의향기 2012.01.07

소식소동(小食小動)

겨울이 되니 몸을 덜 움직이게 된다. 추운 날씨가 바깥 걸음을 망설이게 한다. 걷는 시간이 다른 계절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겨울은 활동보다는 휴식의 계절이다. 동물도 먹이를 구하는 때 외에는 활동을 자제하고 아예 겨울잠을 자기도 한다. 나무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인간도 겨울에는 적게 활동하는 게 자연의 순리에 맞는 일이다.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산 옛날 농부들은 겨울 한 철을 농한기라고 하여 쉬었다. 그런데 적게 움직여도 먹는 양은 그대로니 살이 찌는 게 문제다. 아침 공복 상태에서도 체중계에 올라가면 지금은 65kg을 훌쩍 넘는다. 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전에는 항상 62kg 사이를 오르내렸다. 그때가 몸 상태가 제일 좋다. 몸무게를 줄이자면 음식을 절제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집에서 노니 ..

길위의단상 2012.01.06

우환이 우리를 살린다

'生于憂患 死于安樂', 어느 음식점 벽에 걸린 액자에서 이 글귀를 보았다.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주인장의 좌우명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환이 우리를 살리고, 안락이 우리를 죽인다', 음미할수록 나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는 내용이다. 편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늘 안락하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지 않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 안락을 바랄수록 우환이 반드시 따르는 법이다. 안락과 우환은 파도가 밀려오듯 교대로 찾아온다. 그래서 옛사람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다. 인생살이에서 어쩔 수 없는 게 우환이라면, 우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안락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환을 긍정적으로 맞으며 극복해 나가는 데 인간 정신의 위대..

참살이의꿈 2012.01.05

남촌동 은행나무

인천시 남동구에 있는 남촌동성당 안에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성계가 조선조를 세우자 고려 왕족 중 한 사람이 이 마을로 피난해 왔는데, 후에 이분의 묘를 쓰면서 심은 나무가 바로 이 은행나무라고 한다. 수령이 600년쯤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나무는 줄기가 둘로 갈라져서 높이 솟아 있다. 10년 전 태풍 때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 성당 지붕이 파손된 일이 있다고 한다. 노쇠한 듯 보이지만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많이 돋아나고 있다. 나무 높이는 31m, 줄기 둘레는 7m에 이른다.

천년의나무 2012.01.04

장자[191]

짐승들의 어리석은 말로 비유하는 우언이 열에 아홉이며 이미 잘 알려진 성인의 이름을 빌려 풍자하는 중언이 열에 일곱이다. 대화를 통해 무지를 폭로하는 치언은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듯 일신하여 자연의 분계를 조화하는 것이다. 寓言十九 重言十七 치言日出和以天倪 - 寓言 1 는 다른 고전과 달리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비유의 형식에는 우언, 중언, 치언이 있다. 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이 이런 비유라고 여기서 설명한다. '우언(寓言)'은 주로 짐승이나 사물, 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빌려 의미를 전하는 방식이다. 이솝 우화가 이에 해당한다. '중언(重言)'은 성인이나 위대한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이다. 에는 노자, 공자, 요와 순임금이 주로 나온다. '치언'은 대화를 통해 무지를 폭로하는 방법이다. ..

삶의나침반 2012.01.03

장기 비상시대

쿤슬러(J. H. Kunstler)가 쓴 는 석유 없는 미래를 다룬 충격적인 책이다. 부제가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이다. '장기 비상시대'는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연료가 고갈된 에너지 위기 상황의 시대를 말한다. 그때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적, 정치적 혼란과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인류는 지금 불타는 집을 나서 몽유병 환자처럼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고 미래가 묵시론적 종말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는 인구나 기대수명, 생활 수준, 지식과 기술, 품위 등의 측면에서 엄청난 상실을 겪게 되겠지만, 결국은 어둠의 통로를 지나고 살아남으리라 예상된다. 저자는 석유 시대 이후의 '장기 비상시대'가 지역농업 중심 시대가 될..

읽고본느낌 2012.01.02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나는 또 무엇부터 적을까? 소학교 운동회날 억지로 스타트 라인에 선 아이처럼 도무지 난감하고 두렵다 이번만은 기필코..... 인생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몇번씩 고쳐 쓰는 답안지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재수인가? 삼수인가? 아니면 영원한 未知修인가? 문득 내 나이가 무겁다 창문 밖 늙은 감나무 위엔 새 조끼를 입고 온 까치 한 쌍 까작까작 안부를 묻는다, 내내 소식 없던 친구의 연하장처럼 근하 신년! 해피 뉴 이어! - 새해를 향하여 / 임영조 나이 예순으로 맞는 새해는 무겁다. 하얀 백..

시읽는기쁨 201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