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 13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 도종환 2009년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 시가 내 인생에서 꼭 간직하고 싶은 시 1위를 차지했다. 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 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이런 시를 찾았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2.07.25

자식의 은혜

"당신은 전생에 자식한테 빚을 엄청나게 졌는가 봐." 종종 아내에게 농으로 하는 말이다. 그만큼 아내는 자식 보살핌이 극진하다. 출가한 두 딸이건만 아직 품 안에 있듯이 이런저런 염려가 가득하다. 반찬 하나라도 더 해 주지 못해 마음 아파한다. 아마 운전을 할 줄 알았다면 수도 없이 딸 집을 왕래했을 것이다. 내가 볼 때는 집착인데, 아내 말로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건 부모 역할의 반도 못 된단다. 어찌 되었든 못 말리는 모성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자식에 대한 애착이 남자보다 강하다. 자식이 성인이 되었으면 제 살 길은 제가 알아서 가도록 지켜보면 될 텐데 간섭과 보살핌이 그치지 않는다. 시집장가 보내도 마찬가지다. 부부다툼에서 제일 많이 차지하는 부분이 자식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남자가 볼 때 ..

참살이의꿈 2012.07.24

장자[213]

송나라에 조상이란 자가 송왕을 위해 진나라에 사자로 갔다. 왕진을 가면 여러 대의 마차를 얻는데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고는 백 대의 마차를 더 얻었다. 송나라로 돌아와 장자를 만나서 말했다. "대저 선생처럼 궁벽한 마을의 좁은 골목에서 곤궁하게 신발을 깁고 마른 목덜미에 누렇게 뜬 얼굴을 하는 짓은 저로서는 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승의 군주를 한 번 깨우쳐주고 백 대의 수레를 따르게 하는 것이 장기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진나라 왕은 병이 나면 의사를 부르는데 종기를 째고 고름을 빠는 자는 마차 한 대를 얻을 수 있고 치질을 핥으면 다섯 대의 마차를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치료하는 곳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얻는 마차도 많아진다고 한다. 그대도 치질을 빨았는가? 어찌 얻는 마차가 많은가? 당장 ..

삶의나침반 2012.07.20

어처구니 / 이종문

온통 난장판인 어처구니 없는 세상, 제일로 그 중에도 어처구니 없는 것은 知天命, 이 나이토록 어처구닐 모른 그 일. - 어처구니 / 이종문 요사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전되면서 블로그 내용이 엉망이 되었는데, 3천 개가 넘는 글을 하나하나 수정하고 있다. 사진 수백 장이 사라졌고, 글은 줄이 맞지 않고, 띄어쓰기도 제멋대로 되었다. 가장 심각한 건 5천 개가 넘는 태그 단어가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나는 카테고리가 단순해 태그가 아니면 내용 분류를 하기가 어렵다. 태그가 없으면 반신불수 블로그로 변한다. 파란 측에 질의했건만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없어진 사진은 자료를 찾아 다시 넣어야 하고, 태그도 일일이 달아줘야 한다. 이 작업만도 몇 달이 걸릴 것이다. 난민..

시읽는기쁨 2012.07.18

두 개의 문

2009. 01. 20 03:00 경찰 특공대 출동 명령 03:30 현장 도착 06:16 진압 크레인 설치 06:30 컨테이너 투입 06:50 망루 진입 07:06 화재 발생. 철거민 5명, 특공대원 1명 사망 2009. 02. 09 검찰, 철거민 7명 구속 기소, 15명 불구속 기소 2009. 10. 28 용산 1심 재판부, 망루 생존 철거민 전원 유죄 판결 2010. 11. 11 대법원, 망루 생존 철거민 7명에 원심(4~5년) 확정 판결 '두 개의 문'은 2009년 1월 20일에 일어났던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생존권을 호소하며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을 시작했던 철거민들은 갓 하루가 지나 불에 탄 시신으로 내려왔다. 살아남은 자들은 범법자가 되어 지금도 형을 살고 있다...

읽고본느낌 2012.07.17

우주의 풍경

(The Cosmic Landscape)은 '끈 이론'과 '메가버스'(Megaverse, 다중우주)를 주제로 한 교양과학서이다. 제목에 나오는 '풍경'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끈 이론에서 유도되는 가능한 진공들의 공간을 말하는 과학 용어다. 메가버스로 대변되는 우주의 풍경에는 무한한 종류의 우주가 무한하게 출현할 수 있다. 이 책은 유니버스(Universe)에 익숙한 우리의 우주관을 깨뜨리는 혁명적인 개념을 소개한다. 책의 초반부에는 '인간 원리'에 대한 설명이 길게 나온다. 우리 우주는 왜 생명체가 존재하도록 설계된 듯 보이는 것일까? 자연법칙은 생명과 인간이 탄생되도록 미세 조정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자연법칙이나 물리상수 중 하나가 조금만 달라졌어도 우주는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지 못하고 생명도 탄생할..

읽고본느낌 2012.07.16

난민의 설움

파란이 없어지면서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옮겨졌다. 파란 블로거들은 집단 난민이 되어 낯선 티스토리에 새 터를 잡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벌써 두 번째의 강제 이주다. 한미르에서 파란으로, 이번에는 파란에서 티스토리로,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 경험이 있어서 많이 걱정했는데 이번에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초기에 올렸던 사진들은 'invalid file'이라는 글이 뜨며 나오지 않는다. 파란에서 티스토리로 이관되면서 빠진 파일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줄 간격과 띄어쓰기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시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크다. 또한, 내용 검색도 되지 않는다. 가장 답답한 건 태그 내용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태그가 없으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정리하는데 너무 애로사항이 많다. 옛 모습..

길위의단상 2012.07.15

장자[212]

성인은 자연에 맡기는 것을 편안해하고 맡기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에 맡기지 않는 것을 편안해하고 자연에 맡기는 것을 불안해한다. 聖人安其所安 不安其所不安 衆人安其所不安 不安其所安 - 列禦寇 2 성인이 가는 길은 일반 사람들과 반대다.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갈 때, 성인은 올라간다. 사람들이 "예스" 라고 할 때, 성인은 "노" 라고 한다.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갈 때, 성인은 좁은 길을 찾는다. 성인이란 편안한 자리를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편안한 자리를 불안하게 느낀다. 그런 가치전도적 상황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장자는 이것을 '하늘에서 도망치려는 형벌'[遁天之刑]이라고 불렀다.사람들이 희희낙낙하는 것은 형벌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가 차라리 고맙다고 할까.

삶의나침반 2012.07.05

종교는 행(行)이다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 불교를 행(行)의 종교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이때까지 불교를 마음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 알고 있었다. 깨달음을 통해 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열반의 세계에 드는 것이 불교를 믿는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깨달음과 행이 분리된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의 행이 쌓여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정진하는 힘이 된다.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믿음이란 행이며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는 자비행, 보살행, 신수봉행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신수봉행(信受奉行)이란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불교만이 아니..

참살이의꿈 2012.07.03

시치미떼기 / 최승호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 뚱뚱한 노파가 오더니 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 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 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 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 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 어제는 눈앞에서 똥누는 고양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누는 걸 보고 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 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 도처에서 번들거린다 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놓고 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으니 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 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 - 시치미떼기 / 최승호 시치미란 사냥매의 꼬리에 매어두는 인식표였다. 사냥매가 귀하고 비싸기에 남의 매..

시읽는기쁨 2012.07.02

골프 권하는 친구

퇴직하고 나서 제일 많이 받은 권고가 골프를 배우라는 것이었다. 물론 골프를 즐기는 친구들로부터다. 골프를 못 치니 그들과 어울리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아쉬울 건 없지만, 이왕이면 다양하게 친구를 사귀는 데는 약점이 된다. 그래서 아주 잠깐이지만 골프를 배워볼까 하고 망설인 적도 있었다. 골프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운동이라는 골프 예찬론을 듣는다.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며, 또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는데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이상하게 나에게는 골프에 대한 거부감이있다. 골프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골프장을 생태적 측면에서는 '녹색 사막'이라고 부른다. 골프장은 동식물이 어우러진 다양한 생태계를 파괴하고 녹색 잔디로..

길위의단상 2012.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