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 40

용문사 은행나무(2)

천 년의 나무를 보러 용문사에 간다. 마음이 소란해질 때면 문득 당신을 만나고 싶어진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시대 때 태어난 당신, 천 년을 한결같이 한 자리에서 한 마음으로 살고 계신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당신의 기상은 여전히 대단하다. 천 년이 하찮은 듯 잎은 더욱 빛나고, 열매는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당신 옆에 서면 내 좁은 소견이 부끄러워진다. 속마음을 들켰으니 그저 합장만 할 뿐이다. 새로 만든 안내판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렀으며, 조선 세종 때에는 정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

천년의나무 2012.09.27

박새에게 세들다 / 복효근

감나무 뒤 가까운 담벼락 돌틈 사이 박새 부부 둥지를 틀었나 보다 3월도 중순 너머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안방에 둥지를 트는 것도 아니어서 새소리 몇 가락으로 세를 받기로 하고 새끼 깔 그동안만 전세 내주지 담벼락 앞 감나무 사이 나무 하나 더 심으려 무심코 정말 무심코 오늘 구덩이 하나 파려는데 갑자기 박새 부부 내 앞을 달겨든다 네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하다 점유권을 주장한다 아차차 그동안 몇 조각 새소리 미리 받아 들었던 게 죄로구나 엉겹결에 구덩이를 포기하고 나무 심기를 포기하고 이 봄을 저 박새 부부에게 맡기기로 하는데 저 부부 정말 전세 등기라도 한 모양 당당해서 아무 말 못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 나무란 나무 제 식탁으로 대숲 그늘은 제 주방으로 저 하늘 구름은 제 신혼이불로 내 안..

시읽는기쁨 2012.09.27

이배재에서 남한산성까지 걷다

옛 동료와 만나 산길을 걸었다. H 선배와는 2년 만에 만났다. 손주를 봐주느라 그동안 두문불출하시다가 오늘 겨우 시간을 내셨다. 사모님이 편찮으시니 선배가 아이 보는 일을 도맡을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산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신다. 선배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는데, 손주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봐주어야 한단다. 정말 자식이 뭔지 모르겠다. 오후에는 유아원에 보낸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고 해서 산행을 짧게 했다. 이배재에서 남한산성까지였다. 산야는 가을로 물들고 있었다. 설악산에서는 벌써 단풍 소식이 들린다. 지금부터 11월 초까지가 산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남한산성 오복집에서 두부전골로 점심을 하고 광주행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그동안 남한산성을 수도 없이 다녔지만 버스를 타고 하산한 것은..

사진속일상 2012.09.26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 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 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구절초꽃 / 김용택

꽃들의향기 2012.09.25

긴 싸움이 끝나다

국세청과 벌인 긴 송사가 끝났다. 재작년 여름에 세무서에서 밤골 생활에 대해 중과세를 한다는 통고가 왔으니, 그때로부터 2년이 넘게 걸린 다툼이었다. 세무서에 과세적부심 심사를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했고, 이어서 국세심판원에 심판청구를 했으나 역시 기각당했다. 어쩔 수 없이 법원에 소송을 냈고, 1심에서 이겼으나 피고가 항소를 해서 2심까지 갔다. 고등법원에서도 이겨서 끝나는가 했더니 끈질긴 국세청은 대법원에까지 상고를 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이렇게 악착같이 달라붙을 줄은 예상을 못 했다. 그런데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중에 부과한 세금을 반환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빼앗겼던 돈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졌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그동안 국세심판원과 행정법원, 고등법원을 거치며 여러 번 법정에 출석했..

참살이의꿈 2012.09.25

짝짓는 계절

짝짓는 계절이다. 요사이는 결혼식장 찾아다니기 바쁘다. 지난 주말에는 세 군데를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했다. 몸은 바빠도 친지의 경사를 축하해주고, 겸해서 격조했던 사람들과도 만나니 즐거운 일이다. 다녀보면 결혼식 분위기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예전보다 훨씬 분위기가 밝고 경쾌해졌다. 정해진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다. 토요일 낮 예식에서는 주례를 신랑 아버지가 맡았다. 처음 볼 때는 어색했는데 고정 관념을 깨는 발상이 재미있었다. 저녁 예식은 더 파격적이고 흥겨웠다. 우선 신랑, 신부가 같이 손을 잡고 입장했다. 가끔 보기도 하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작년에 딸을 보낼 때 나도 신랑과 신부의 동시 입장을 바랐지만, 딸이 꼭 아빠와 함께 들어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또 결혼 예식은 ..

사진속일상 2012.09.24

핵발전 없는 세상을 위한 우리의 실천

천주교 창조보존연대에서 '창조 질서 거스르는 핵발전소,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으로 핵발전을 반대하는 팸플릿을 냈다. 만화로 재미있게 그려져 있는데 내용이 알차다. 마침 강론에서는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독일에 유학 중인 어느 신부님이 독일 교수로부터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성장 배경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80, 90년대에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당시는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가톨릭 교회는 국민의 열망에 호응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런 가톨릭의 입장이 국민의 호감을 샀고, 많은 사람이 천주교에 입교한 이유였다는 게 신부님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독일 교수는 그게 정답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답이 ..

참살이의꿈 2012.09.24

피에타

나에게는 무척 거칠게 느껴진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눈 감고 싶은 추악한 현실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를 통해 돈으로 미쳐버린 세상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무대가 된 청계천 공구상가의 어두운 분위기가 영화와 잘 어울린다. 거기는 세상에서 낙오된 패배자들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 주인공 '강도'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채무자를 불구로 만들거나 목숨까지 뺏는 악마 같은 짓을 서슴치 않는다. 그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가장 잔인한 가해자가 된다. 돈의 노예가 된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이다. 세련되게 포장하기는 했지만 본질에서는 다름이 없는 우리들 ..

읽고본느낌 2012.09.23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empathy'와 연민을 뜻하는 'sympathy'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엠퍼시'라면, 가슴으로 느끼는 게 '심퍼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고나 불행한 소식들에 반응하는 감정은 대부분 엠퍼시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이런 엠퍼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간이 사이코패스인지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심퍼시라고 부..

시읽는기쁨 2012.09.22

공갈빵 /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

시읽는기쁨 2012.09.21

장자[219]

막막하여 형체가 없고 변화무상하니 죽음도 삶도 더불어 하고 천지의 아우름과 더불어 하고 신명의 운행과 더불어 한다. 망망한데 어디로 갈 것이며 순간인데 어디까지 갈까? 만물이 모두 그물인데 근원으로 돌아감만 못하리라! 笏漠無形變化無常 死與生與 天地竝與 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 莫足以歸 - 天下 3 우주 만물의 근원을 도(道)라고 할 때, '홀막무형변화무상(笏漠無形變化無常)'은 장자학파에서 생각하는 도의 속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 중국 사상을 관통하는 중심 단어가 '변화무상(變化無常)'이 아닌가 싶다. 서양에서는 영원불변하는 실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탐색하는 작업이 철학의 기본 흐름이었다. 초기에 나타나는 원소설에서부터 이데아론에 이르기까지 불변하는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삶의나침반 2012.09.20

광주 두리봉

경기도 광주에 있는 두리봉(457m)은 남한산성 남쪽에 있는 산이다. 망덕산에서 동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가 두리봉을 지나 군두레봉까지 이어진다. 이배재고개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망덕산을 거쳐 두리봉으로 향했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깨끗했고 공기는 맑았다. 망덕산을 지나서부터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알맞은 길이다. 부드러운 산길이 능선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졌다. 달콤한 숲의 향기가 가득했다. 여기는 인간의 소란함으로부터 벗어난 별천지였다.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렇다. 소유하지 않아도 내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때나 찾아가 마음껏 걸을 수 있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나 결국은 내 것, 네 것의 구분도 없어진다. 아서라, 다 부질없는..

사진속일상 2012.09.19

조선 혁명 선언

대통령 선거가 석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저께는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문재인 씨가 선출되었고, 내일은 안철수 씨가 출마 선언을 할 예정이다. 둘이 단일화를 이루어 여권의 박근혜와 맞붙을 것 같다. 볼만한 싸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문재인 씨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들으며 문득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혁명 선언'이 떠올랐다. 온건한 이미지의 문재인 씨의 얼굴을 보며 왜 하필 단재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는 단재의 과격한 사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디의 비폭력 정신에 매료되었던 때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단재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조선 혁명 선언'을 읽으며 선생의 의기를 다시금 느껴본다. 선생은 혁명의 길은 파괴에서 시작한다고 선언하고, 구체적으로 파괴해야 할 대상 다섯 가지를..

길위의단상 2012.09.18

발 등에 떨어진 불

첫째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임신 과정을 지켜보며 한국에서 아이를 갖는다는 게 무척 힘들다는 걸 느꼈다. 우선 병원의 과잉(?) 진료비에 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권하는 검사를 안 받는다, 할 수도 없다. 첫째도 초음파 정밀 검사, 양수 검사, 유전자 판별 검사 등을 받느라고 2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검사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외국에서는 35세가 넘는 고령 임산부가 아니면 초음파 이외의 검사는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우리나라는 조금만 이상이 보여도 온갖 정밀 검사를 받으라고 권한다. 두 달 전에는 태아에게 다운증후군이 염려된다고 해서 특별 검사를 받기도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가족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의사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질병 ..

길위의단상 2012.09.17

제비동자꽃

선자령에서 귀한 꽃을 만났다. 제비동자꽃이다. 석죽과 동자꽃속인데 길게 갈라진 꽃잎이 제비 꼬리를 닮았다고 하여 제비동자꽃이라 불린다. 동자꽃은 흔히 만나지만 제비동자꽃은 보기 어렵다. 산길을 걸어내려오다가 계곡 물가에 피어 있는 제비동자꽃을 우연히 발견했다. 워낙 눈에 잘 띄는 꽃색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붉은 계열의 색깔이 강렬하면서 오묘하다.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 신비한 힘이 있다. 그러나 때가 지났는지 시들어가고 있어서 아쉬웠다. 8월 중순 경이면 그 화려한 색감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꽃들의향기 2012.09.15

산길

앞산에서..... 산길은 산을 닮아 있다 산을 닮은 산길은 산을 배반하지 않는다 산이 둥글면 둥글게 길을 열고 산이 각지면 각지게 길을 열고 산의 높이만큼 산의 깊이만큼 오르내리면서 산과 함께 하고 산길은 나무를 사랑할 줄 안다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나무들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비어 있는 곳으로 다니고 산길은 사람을 알아본다 사람을 알아보기에 사람을 대할 줄 안다 성질 급한 사람은 급하게 걷다 지치게 만들어 천천히 가게 하고 차분한 사람은 차분하게 걷다 산 깊은 맛을 보게 하고 사람에 맞게 길을 가게 하고 산길은 산을 닮아서 좋고 산길은 나무를 사랑할 줄 알아서 좋고 산길은 사람을 알아봐서 좋고 그래서 산길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 - 산길 / 이대의 뒷산..

사진속일상 2012.09.14

설악동 소나무

외설악의 설악산탐방안내소 앞 삼거리에 있다. 천연기념물 35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품 소나무다. 높이 17m, 줄기 둘레 4.1m로 훤칠하게 잘 생겼다. 그러나 하체에 비해서는 상체가 빈약하다. 원래는 큰 줄기가 3개 있었으나, 2개는 죽었고 가운데 줄기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부러진 줄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설악동 마을의 서낭당 나무였으나 관광지구로 개발되면서 마을은 사라지고 나무만 덩그마니 남았다. 소나무 앞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놓아 만들어진 큰 돌무더기가 있었다는데 도로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옛 모습은 잃었으나 나무는 보호를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설악동을 상징하는 대표 소나무다.

천년의나무 2012.09.14

한정록

빗소리를 들으며 을 읽는다. 은 허균(許筠)이 42세 때, 중국의 고서들에서 선비들의 한적한 삶을 그린 글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당시는 어렵게 진출했던 공직에서 쫓겨나는 등 허균으로서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아마 그 자신 은둔의 삶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서(序)에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응석받이로 자라 찬찬하지 못하였고, 또 부형父兄이나 스승 또는 훈장이 없어서 예법 있는 행동이 없었다. 또 조그마한 기예技藝는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하지도 못하면서도 스물한 살에 상투를 싸매고 과거를 보아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경박하고 거침이 없는 행동에 당세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나는 마침내 노장老莊이나 불교 같은 데로 도피하여, 형해形骸를 벗어나고 득실得失을 ..

읽고본느낌 2012.09.13

마타리(2)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그런데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를 떠올리며. 다시 소년은 한 웅큼을 꺾어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 황순원의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소녀가 말한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마타리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는 대표적인 꽃이다. 들판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마타리를 보면 가을이 가까이 왔음을 실감한다. 양평의 황순원문학촌에 '소나기마을'이 있다는데 거기도 지금쯤 마타리가 한창일까? 가 보고 싶다.

꽃들의향기 2012.09.13

권금성 소나무

설악산 권금성의 암봉에서 자라는 쌍둥이 소나무다. 풀도 자리지 못하는 곳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이만큼 싱싱하게 살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싹을 내고 이렇게 클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여름에 뜨겁게 달아오른 바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는 어떻게 견뎌냈을까? 등산을 하다 보면 이렇듯 바위와 어울려 사는 소나무를 자주 본다. 그들은 고행하는 수도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안이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고 푸르게 살아내는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더구나 권금성의 소나무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자신을 지켜내고 있다. 성자(聖者)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소나무는 왜 바위를 좋아할까 바위의 세계에서 다른 나무가 사는 걸 보았느냐 깎아지른 가파른 바위가 한 치의 틈을 주지 않아도 비집고 들어가..

천년의나무 2012.09.12

안락암 무학송

설악산 권금성 가까이에 안락암(安樂庵)이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권금성과 달리 안락암은 찾는 사람이 거의 없이 조용하다. 나도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굳이 내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락암 앞 바위 절벽에 소나무 거목이 날렵하게 서 있다. 춤추는 학 모양이라 하여 무학송(舞鶴松)이라 부른다. 수령이 800년이나 되었다. 강풍으로 가지가 한 쪽으로만 자라고 있다. 바위 틈에서 이만큼 성장한 생명력이 놀랍다. 이곳에서 보이는 설악산은 마치 동양화에 나오는 풍경 같다. 맞은편에는 토왕성폭포의 긴 물줄기가 보인다. 바위, 소나무, 폭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장 경치가 좋은 곳에서, 그 자신도 하나의 멋진 풍경이 되고 있는 무학송이다.

천년의나무 2012.09.12

방심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 방심(放心) / 손택수 '방심'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대개 경계하는 뜻으로 쓰인다. 사전을 찾아보니 '긴장이 풀려 마음을 다잡지 않고 놓아 버림'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이라는 두 번째 의미도 있다. '방심하다'라는 말은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시읽는기쁨 2012.09.12

은고개-남한산성-검단산-이배재

집에서 하루를 보내려 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고운 하늘에 끌려서 배낭을 꺼냈다. 집에 그냥 있기가 너무 아까운 날이었다. 이런 때는 무조건 집을 나서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가면 된다. 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일하기가 너무 싫었다. 그때는 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른다. 이제 그런 자유와 행복이 주어졌다.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은고개에서 내렸다. 그리고 남한산성으로 연결되는 산길을 걸었다. 시야가 열릴 때마다 눈부신 가을 하늘이 축복으로 다가왔다. 벌봉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고 남한산성 본성으로 들어가 성곽길을 따라 걸었다. 북문을 거쳐 남문에 이르렀다. 남문에서 성곽을 빠져나와 검단산 쪽으로 향했다. 시멘트 길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 검..

사진속일상 2012.09.11

장자[218]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명예로움을 알고 오욕을 받아들이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사람은 모두 앞서기를 취하는데 나만 홀로 뒤처지는 것을 취하니 이르기를 '천하의 오욕을 감수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실을 취하는데 나만 홀로 허를 취하고 저장하기 않기에 오히려 남음이 있다. 독립 자족하고 여유 있으니 몸소 행함이 느리지만 어긋나지 않으며 인위가 없으며 교활한 지혜를 비웃는다. 사람들은 모두 복을 구하지만 나 홀로 온전함을 따르며 이르기를 '허물을 면했다'고 한다. 깊음을 뿌리로 삼고 검약을 벼리로 삼으며 이르기를 단단하면 부서지고 예리하면 무디어진다고 한다. 항상 사물에 관용하고 남을 깎아내리지 않으니 가히 지극하다 할 것이다. 知其雄守其雌爲天下谿 知其白守其辱 爲天下谷 人皆取先..

삶의나침반 2012.09.10

의상대 소나무

2005년의 산불로 낙산사가 불탔을 때 이곳 의상대(義湘臺) 소나무도 피해를 보았다. 의상대를 둘러싸고 있던 노송들이 사라진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몇 그루는 살아남아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에는 소나무 줄기 사이로 겨우 바다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젠 휑하니 시야가 트였다. 그러나 상실감으로 아픈 풍경이었다. 이곳 의상대 앞바다는 어린 시절부터 추억이 깃든 장소다. 아버지를 따라와서 바다를 처음 본 곳도 여기였다. 그 뒤로도 동해안 여행을 하면 이곳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산불 이후로 의상대는 많이 변했다. 내 기억에 간직된 의상대는 사라졌다. 뭔가가 허전하고 쓸쓸해서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천년의나무 2012.09.10

가시엉겅퀴

최근 보도를 보면 가시엉겅퀴가 약용식물로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논농사에 비해 소득이 3배 정도 많아서 관심이 큰 모양이다. 가시엉겅퀴는 간과 담낭질환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약효 때문에 남획되어 멸종 위기에 몰렸다. 가시엉겅퀴는 갈라진 잎 끝에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비명을 질러야 한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꽃은 색깔이 곱고 예쁘다. 벌 한 마리가 조심스레 꿀을 빨고 있다. 가시에 찔리고서야 알았다 피 멍울멍울 솟아나는 그 생채기 얼마나 쓰리고 아린가를 고혹적인 눈웃음에 홀리지 말아야 했다 다시는 찔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건만 쏘아보는 눈화살에 녹아버릴 줄이야 저만치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잊지만 않았어도 다가가지 않았을 ..

꽃들의향기 2012.09.10

하조대 소나무

양양에 있는 하조대(河趙臺)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이곳에서 잠시 은거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위로 된 빼어난 경치를 바라보는 제일 높은 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하조대 맞은편에 있는 또 다른 바위 절벽 위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독야청청 자라고 있다. 수령은 약 200년이 되었다고 한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돌 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건강하게 자라난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바위 위에 앉은 한 마리 학이 연상되는 날렵한 자태가 멋진 소나무다.

천년의나무 2012.09.09

벌개미취

벌개미취는 들국화 종류 중 제일 먼저 가을 소식을 알려주는 꽃이다. 지금 한국자생식물원에는 넓은 벌판에 벌개미취가 만발해 있다. 이름의 '벌'은 벌판에 핀다는 뜻이다. 벌개미취는 낱개의 꽃보다 군락을 이루고 있을 때 돋보인다. 요사이는 벌개미취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면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강인한 식물이다. 그런데 벌개미취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이다. 학명이 'Aster koraiensis'로 '한국'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Aster'는 '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별개미취'라고 불러도 무난할 것 같다. 가을이면 들판에서 수수하게 피어나는 꽃, 벌개미취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많이 녹아 있다. 또한 우리의 고유종이라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꽃이다.

꽃들의향기 2012.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