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 32

돌콩

작고 볼품없는 사람을 놀릴 때 돌콩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작지만 알차고 단단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돌콩은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콩으로 우리가 먹는 콩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옛날 원시인들은 아마 이 돌콩을 먹었을 것이다. 열매는 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돌콩 맛도 보고 싶다. 돌콩밥을 해 먹으면 그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 몇 년 전에 미국 농무부에서 한반도 원산의 종자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중에는 콩 901점, 돌콩 351점 등 콩 종류가 제일 많았다. 미국이 1901년부터 1976년 사이에 한국에서 수집해 간 재래종 콩은 무려 5,496점이나 되었다. 미국은 이것으로 우량품종을 육성해 다시 한국에 역수출하고 또 세계 각국에 수출해서 콩 수출 세계 1위가 되었다. 우리..

꽃들의향기 2013.08.31

엄마가 아이를 망친다

교직에 있으면서 엄마의 지나친 교육열이 아이를 망치는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결손가정이나 방임 때문에 생기는 문제보다 이쪽이 훨씬 더 심각했다. 자식을 잘 키우려다 오히려 반편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독립심을 길러주고 놓아주어야 하는데 엄마는 끝까지 보살피려 한다. 내 자식은 특별하게 키우려는 엄마의 욕심 때문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건 대견하지만, 엄마에게서 떠나려는 건 받아들이지 못한다. 딸보다도 아들한테서 이 문제는 심각하다. 엄마한테서 받은 스트레스로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경우도 여럿 보았다. 겉모습은 그럴듯하더라도 온실 속에서 길러진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어린아이로 남아 있다. 심지어는 결혼한 뒤에도 모든 걸 부모에게 의지하려 한다. 안쓰럽다고 그걸 다 받아주는 얼빠진..

참살이의꿈 2013.08.30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줄이 내려오고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

시읽는기쁨 2013.08.29

흰무릇

분홍색 무릇 사이에서 가끔 흰무릇을 볼 수 있다. 무릇이 청초한 새색시 같은 이미지라면, 흰무릇은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 같다. 가녀린 모습에 밴 슬픔이 안스럽다. 같은 꽃이라도 색깔에 따라 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그때 여름 밤골에는 무릇이 무더기로 피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맑은 햇살에 역광으로 반짝이던 무릇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지금은 이슬처럼 모든 게 사라져갔다. 꼭꼭 숨어 보이지도 않는 가녀린 두 잎에서 쏘옥쏘옥 살포시 어쩜 그리도 긴 긴 꽃대가 팔월 풀밭 구월 하늘 더미더미 무더기 송이송이 조르르 어쩜 그리고 고운 분홍꽃이 - 무릇 / 김종태

꽃들의향기 2013.08.28

아내와 남한산성을 일주하다

여름의 막바지에 아내와 성곽을 따라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았다. 수없이 남한산성을 찾았지만 아내와 일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용한 평일날 부부가 함께 길을 걷는 행복을 누렸다. 또한 아내의 체력이 많이 회복된 걸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동문에서 출발하여 반시계방향으로 느릿느릿 한 바퀴 도는데 4시간이 걸렸다. 솔숲에서 쉬는데 어느 외국인이 지도를 보이며 'West Command Post'로 가는 길을 물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것이 수어장대를 가리키는 말인 줄 알았다. 외국인만 대하면 왜 머리가 하얘지는지 모르겠다. 뭉게구름이 키자랑을 하며 솟아올랐다. 더위의 기세도 이제 많이 누그러졌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거리기도 했다. 인생길도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법이었다. 일..

사진속일상 2013.08.27

논어[46]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아직 사람 구실을 즐기는 이나, 못된 짓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사람 구실을 즐기는 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못된 짓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사람 구실을 함에 있어서 못된 버릇이 제 몸에 젖지 않도록 한다. 단 하루일망정 애써 사람 노릇 하려고 하는 이가 있는가 몰라! 나는 아직 힘이 모자라서 못한다는 사람은 보지 못햇다. 아마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다." 子曰 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 好仁者無以尙之 惡不仁者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 里仁 6 '사람 구실을 즐기는 것'[好仁]과 '못된 짓을 싫어하는 것'[惡不仁]은 같은 것이다. 맹자가 불의(不義)를 미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삶의나침반 2013.08.26

포기하지 않으면 꾸준히 는다

서봉수 사범은 환갑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선에서 맹활약이다. 최근에는 공식 대국에서 10연승을 거두었다. 서 사범이 바둑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포기하지 않으면 꾸준히 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실력이 최전성기였던 90년대보다 세다고 단언했다. 그때는 응씨배를 우승하고, 진로배에서도 9연승을 했다. 바둑 실력이 20대 때 절정이었다가 점차 줄어든다는 게 통념이다. 객관적 성적도 그걸 증명한다. 그런데 서 사범은 안 된다고 포기하지 않으면 꾸준히 는다는 것이다. 바둑 두는 사람은 기력 향상이 최고의 소원이다. 젊었을 때는 죽순이 자라듯 실력이 부쩍부쩍 늘었지만 지금은 제자리 걸음이다.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쉽게 나이 핑계를 댄다. 그러나 가만히 관찰해 보면 늙었다고 기력이 줄어드는 것 같지는 않다. 다..

길위의단상 2013.08.25

설국열차

빙하기로 멸망한 지구 위에서 인류의 마지막 생존터인 설국열차가 17년째 달리고 있다. 질주가 멈추면 파멸에 이르는 비유가 현대 사회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현재 스스로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지젝의 지적대로 종말을 향한 폭주로 설국열차의 이미지가 딱 맞는다. 계급에 따라 칸으로 나누어져 있고 질서와 균형을 강조하는 열차 안은 인간 세상의 작동 시스템과 유사하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체제 전복을 꿈꾼다. 결국 커티스를 중심으로 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앞칸을 차례차례 점령해 나간다. 메시지가 강한 영화다. 나로서는 서구문명의 몰락과 새로운 인류 사회의 탄생이라는 희망으로 읽힌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양 소녀와 흑인 소년으로부터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건 15세기부터 역사를 주..

읽고본느낌 2013.08.24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 후쿠다 미노루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즐겁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유쾌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의 시간을 재는 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행복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몸에 좋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마음에도 좋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건강하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다투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자연에게 다정해진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남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진정한 평화.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지구를 계속 사랑하는 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우주.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나다. -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 후쿠다 미노루 2001년에 일본에서 '분발하지 않기 운동'이 일어났었다. 이와테 현의 지사를 지낸 마스다 히로야 씨가 이끈 운동으로, 다른 지역..

시읽는기쁨 2013.08.23

논어[45]

선생님 말씀하시다. "재물이나 지위는 사람마다 탐내는 것이지만 억지로 차지할 것까지는 없다. 가난과 천한 직업은 사람마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절로 굴러 떨어진 것이면 피해서는 안 된다. 사람 구실을 떠나서 인물 말을 들을 수 있나! 참된 인간은 밥 먹는 동안에도 사람다운 것이니, 급할 때도 그렇고 거꾸러질 때도 그래야 한다."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 里仁 5 사람은 누구나 부귀를 좇는다. 인간 활동의 대부분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억지로 부귀를 얻으려 말라." 또 사람은 빈천을 싫어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찾아오는 빈천을 피하지 말라." 이것이..

삶의나침반 2013.08.22

어떤 꿈을 꿈

꿈과 야망은 다르다. 꿈이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바람이라면, 야망은 되어야 하는 욕구다. 꿈이 이타성에 바탕을 둔다면, 야망은 나 중심의 에고에서 출발한다. 꿈꾸는 사람은 평화롭지만, 야망을 가진 사람은 칼처럼 날카롭다. 꿈은 기쁨과 여유를 주지만, 야망은 불안하고 조급하다. 꿈은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꿈 자체로 행복하다. 킹 목사가 외친 "I have a Dream"이 바로 꿈이다. 어떤 꿈을 꾸느냐에 그 사람됨이 있다. 홍순관 님이 자신의 이력을 꿈 중심으로 소개한 걸 보았다. 독특하고 재미있어 여기에 옮긴다. 1962년 지구에 태어남 1963년 유모차를 타고 깊은 꿈을 꿈 1964년 장난감방에서 하루 종일 놀면서, 노는 꿈을 꿈 1965년 집에 있던 포도나무에 호기심을 보임, 앵두나무에도 호기심을 ..

참살이의꿈 2013.08.21

거미

노인 혼자 사는 집에는 거미줄이 많다. 사랑마루 위에도 거미 한 마리가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매미 한 마리가 제물이 되었다. 주로 잠자리가 잘 걸렸는데 거미로서는 횡재를 한 것이다. 거미줄을 뿜으며 포획물을 꽁꽁 묶는 정성이 대단하다. 그러다가 아뿔싸, 포획물을 놓쳐 버렸다. 줄이 끊어지고 매미는 땅에 떨어졌다. 거미는 한동안 멍해 있다. 왜 그런 실수를, 지금은 뼈아픈(?) 자책을 하는지 모른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인내의 기다림이 시작된다. 저 자세로 꼼짝을 하지 않는다. 몇 시간이 지난 뒤 쳐다봐도 여전하다. 끝까지 기다린다. 미세한 떨림의 순간을....

사진속일상 2013.08.20

합리적 행복

'불행 또한 인생이다'라는 부제가 눈에 띄어서 이 책을 읽었다. 지은이인 영국의 저널리스트 올리버 버크만은 '긍정적 사고'를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이론에 반기를 들고 도리어 비관론이 진정한 행복의 세계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내가 젊었을 때도 노만 빈센트 필 목사로 대표되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낙관론이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 사람은 자기가 머릿속에 그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즉, 성공이라는 긍정적 시각화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일종의 자기 계발서류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방이 시궁창인데 과연 긍정적 사고라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일까? 일시적인 마취제 역할밖에 못 한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깨닫게 되었다. 인생은 외롭고 슬프고 ..

읽고본느낌 2013.08.19

갖고 싶은 카메라

내가 샀던 첫 카메라는 모델명이 '캐논 GⅢ'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형의 레인지파인더 카메라였는데 1970년대의 어느 해에 한 푼 두 푼 월급을 모아서 산 것이었다. 그 뒤로는 니콘의 SLR을 주로 사용했다. 마지막에 샀던 F3는 지금도 장롱속에서 잠자고 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필름카메라는 골동품이 되었다. 아날로그 시대에 비해 지금은 카메라 가격이 싸졌고 성능은 엄청나게 좋아졌다. 디지털에서는 필름값과 현상비도 들지 않는다. 찍은 사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될 뿐 아니라 SNS를 통해 전 세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다. 세상 좋아졌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한다. 그러나 디지털의 편리함으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잊혀지는 건 아니다. 도리어 디지털의 경박함이 아날로그 시대를 더욱 그립게 한다. 지..

길위의단상 2013.08.18

남한산성행궁 느티나무

작년에 남한산성 행궁이 완전 복원되었다. 병자호란 시 인조가 피난했고, 그 뒤에도 여러 임금이 순행 때 묵어간 곳이다. 전에는 행궁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민가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남한산성 호텔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궁이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행궁 주변에 보호수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각각 300년, 400년 된 느티나무다. 나이로 볼 때 행궁의 역사와 함께하는 나무들이다. 둘 중에서 400년 된 느티나무는 줄기가 통째로 썩어서 보형재로 채워져 있고, 가지는 철제 지지대로 버텨 놓았다. 그래도 여름에 보는 나뭇잎만은 싱싱하다. 최근에 복원된 새 건물의 생뚱함을 이 고목들이 그나마 중화시켜 준다. 이 느티나무 그늘에 앉으니 1636년의 현장이 안타깝게 그려졌..

천년의나무 2013.08.17

논어[44]

선생님 말씀하시다. "진실로 사람 구실에 뜻을 두면 나쁜 짓은 못하느니라."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 里仁 4 공자가 평생을 여일하게 지킨 삶의 뜻은 '사람 되기'[仁]였다. 공자가 강조한 공부의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언젠가 자공이 마음속에 지닐 한 마디를 청했을 때 공자는 '서(恕)'라고 답하면서,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했다. 사람 되기의 제일 원리가 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사람 되기에 뜻을 두었다면 나쁜 짓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또다시 학교와 공부를 돌아본다. 다들 공부 잘해 일류대학 나오고, 출세하려는 욕망만 가지고 있다. 사람 됨됨이는 꼬리로 밀렸다. 선생의 역할도 현실에 충실히 복무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공부는 공해가 ..

삶의나침반 2013.08.17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

시읽는기쁨 2013.08.16

태양초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굳이 태양초만을 고집하신다. 요즈음은 대부분 건조기를 사용해서 힘들게 햇볕으로 고추를 말리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집에는 고추 건조기를 다 갖추고 있다. 뙤약볕 아래서 고추를 따는 일도 고되지만, 고추를 말리는 것도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8월 한 달 내내 고추를 따고 말리는 과정이 반복된다. 올해의 불볕더위가 고추 말리는 데는 아주 제격이다. 비라도 며칠 내리면 고추는 불을 땐 방으로 모셔야 한다. 그러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생도 그만큼 더 늘어난다. 고추를 말리는 데는 어머니만의 노하우가 있다. 바깥에서 말린 고추는 비닐하우스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온다. 그 타이밍은 감으로 판단하는데도 거의 완벽하다. 건조되어 바삭거리는 고추를 보면 작품이라 아니 할 ..

사진속일상 2013.08.15

남한산성 연무관 느티나무

남한산성 연무관(演武館)은 군사 훈련을 위하여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세워졌다. 옆에 있는 남한산성초등학교 운동장이 훈련하던 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무관 주변에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둘 다 수령이 500년 내외로 안내문에는 적혀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두 나무는 수령 차이가 꽤 나는 것 같다. 첫 번째 느티나무는 흙을 찾아 뻗어나가는 뿌리의 모양이 그로테스크하다. 아무튼 500살이 되었다면 병자호란의 현장도 이들 느티나무는 지켜보았다는 얘기다.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 주는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3.08.13

춤추는 평화

가톨릭 미사중에 신자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순서가 있다. 이때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며 전후좌우 사람과 인사한다. 참 아름다운 인사다. 미사가 지루하더라도 이때가 되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당신에게 내재된 신성에 경배합니다'라는 뜻이라는 네팔의 "나마스떼!" 인삿말과도 비교된다. 미사의 중심인 성체를 영하기 직전에 드리는 기도의 마지막도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이다. 가톨릭 언론기관 명칭도 '평화방송', '평화신문'이다. 천주교의 중심에는 평화가 있다. 평화는 개인의 심적인 혹은 영적인 평온함을 가리킬 뿐 아니라 사회 정의의 실현으로 구현되는 평화도 당연히 포함된다. 보통은 전자가 강조되어 신자들이 사회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건 유감이다. '평화(平和)'를 파자해 보면 '고를 평'..

읽고본느낌 2013.08.11

마십시오

"당신이 다만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기주의 속에서 혼자 떨어져 살고 있다면 '우리'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매일 아들로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과 물질적인 성취를 혼동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고통스러울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약도 없이, 집도 없이, 직장도 미래도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형제에 대한 한을 품고 있다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계속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

참살이의꿈 2013.08.10

산등성이 /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 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흙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다며 갈 데까지 아주 멀리 가보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

시읽는기쁨 2013.08.09

논어[43]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다운 이만이 남을 좋아하기도 하려니와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 The Master said, "It is only the virtuous man, who can love, or who can hate, others."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 里仁 3 인(仁)이 단순히 어질다거나 무조건 참고 용서해주는 무한 사랑이 아니다. 남을 미워할 줄 아는 것도 인(仁)이라고 공자는 말씀하신다. 거짓과 불의(不義)를 미워하는 것이 인이다. 예수도 화를 낼 때는 분명히 화를 내셨다. 특히 종교적 위선에 대해서 그랬다. 민중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지도자들의 죄악은 드러내고 비난해야 한다. 영적이든 정치적이든 마찬가지다. 옳지 못한 줄 알면서 타협하는 것은 인이 아니다. 제대로 미워하고 제..

삶의나침반 2013.08.08

반가운 소식

그저께 동아일보에 반가운 소식이 실렸다. 기사를 옮기면 이렇다. "SK그룹의 에너지기업 SK이노베이션은 1일부터 구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주지 않는다. 전 사원을 대상으로 지난달부터 '오후 6시 반 의무퇴근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면 '퇴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30분 뒤에는 PC가 자동 종료된다. 지난 한 달간 직원 만족도는 90% 이상으로 나타났다. LG전자도 세탁기 냉장고 등을 만드는 홈어플라이언스(HA)사업본부가 시작한 '수요일 오후 5시 퇴근제'를 최근 다른 사업부로 확대했다. HA사업본부는 조성진 사장의 지시에 따라 2월부터 매주 수요일 전원이 오후 5시에 강제 퇴근해왔다. 6개월이 지난 현재 서울 여의도 본사와 경남 창원공장의 수요일 5시 정시 퇴근율은 97%에 이른다. 지..

길위의단상 2013.08.07

그늘 속을 걷다

소설가 김담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구해 읽은 책이다. 자전적 에세이인 이 책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담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초등학생일 때 성남으로 이사했다. 전형적인 이농 가정이었다. 변두리 도시에서 사는 가난한 이농자의 생활은 궁핍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어렵게 학업을 계속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현실에 눈을 떴고 학생 운동에도 참여했다. 독서와 밑바닥 삶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깊이 몰두하지는 못했다.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간 부모님을 따라 다시 귀향했다. 낯선 고향이었지만 이웃과 숲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 고성은 남북 분단의 비극이 현존하는 곳으로 저자가 현대사의 아픔을 그려내고 싶어하는 무대다. ..

읽고본느낌 2013.08.06

가장 길었던 장마

어제로 장마가 끝났다. 6월 17일에 시작해서 8월 4일에 종료되었으니 49일 동안 이어졌다. 기상 관측을 한 이래 가장 길었던 장마였다. 종전 기록은 1974년과 1980년의 45일간이었다. 장마전선이 주로 중북부에 머물러서 실제 장마를 겪은 건 중부 지방이었다. 남부는 장맛비보다 폭염에 시달렸다. 기상청 자료를 찾아보니 서울은 7월 중에 비가 오지 않은 날이 닷새밖에 안 되는데, 부산은 반대로 비가 온 날이 엿새였다. 반쪽장마라는 말 그대로였다. 좁은 땅인데 전연 다른 여름을 경험한 것이다. 긴 장마였지만 비 피해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7월 한 달간 서울의 강수량이 703mm였다. 대체로 고루 분산되어 내렸다. 생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장마는 여름의 휴식기다. 매..

길위의단상 2013.08.05

예천 태평추 / 안도현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 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시읽는기쁨 2013.08.04

축생의 시대

제 자신과 제 새끼만 아는 시대다. 인간이 축생(畜生)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축생만도 못하다. 짐승은 제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내보낼 줄 안다. 그러나 인간 축생은 죽을 때까지 품안에 가두려 한다. IMF 쇼크 이후 한국 사회가 변했다고 한다. 위기가 결국 생존에만 집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제 먹을 양식은 갖고 태어난다는 믿음에서 내가 다 챙겨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바뀌었다. 깊이가 없는 민족은 고통을 배움의 기회로 삼지 못한다. 사회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파이 조각만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툰다.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다. 새끼 사랑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가정이라는 울타리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제 새끼만 쳐다보느라 눈이 멀어 버린다면 배 부른 돼지에 다름 아니다...

참살이의꿈 201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