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 31

논어[51]

선생님 말씀하시다. "벼슬아치는 인격을 생각하고, 들녘 친구는 땅마지기나 생각한다. 벼슬아치는 법을 두려워하고, 들녘 친구는 남의 동정을 기다린다." The Master said, "The superior man thinks of virtue; the small man thinks of comfort. The superior man thinks of the sanctions of law; the small man thinks of favours which he may receive." 子曰 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 里仁 11 여기서는 군자를 '벼슬아치'로, 소인을 '들녘 친구'로 번역하고 있는 게 흥미롭다. 앞에서는 군자를 '참된 인간'으로 번역했다. 벼슬아치와 참된 인간은 받는 느낌이 많..

삶의나침반 2013.09.30

큰엉겅퀴

이름 그대로 키가 큰 엉겅퀴다. 내 키보다 한 뼘은 더 크다. 2m까지도 자란다니 정말 키다리 엉겅퀴인 셈이다. 엉겅퀴와 또 다른 점은 꽃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 점이다. 무거워서 지탱하기가 힘든가 보다. 큰엉겅퀴꽃을 보고 있으면 옛날 시골집 창고에 걸려 있던 농기구가 떠오른다. 무엇에 쓴 건지는 모르지만 이와 비슷하게 생긴 게 있었다. 사나운 이름과는 달리 정겹게 느껴지는 우리 꽃이다.

꽃들의향기 2013.09.29

청계산 북쪽 능선을 걷다

용두회에서 전철 신분당선을 이용해 청계산에 올랐다. 청계산입구역에서 만나 산에 오른 뒤 북쪽 능선을 타고 양재화물터미널로 내려가 양재시민의숲역까지 이어진 산행이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석 달 만에 만났다. 용두회 산행은 회원들 체력 관계로 짧고 쉬운 코스를 택한다. 이번에도 정상까지 오르지는 않고 산의 한쪽 면만 걷는 길이었다. 원터골에서 진달래능선을 따라 옥녀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경로였는데 두 시간이면 될 길이 세 시간이나 걸렸다. 어제까지는 맑은 가을 날씨였는데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고 간간이 비도 뿌렸다. 바람도 차게 느껴졌다. 용두회 산행은 각자 준비해 오는 간식거리가 즐겁다. 특히 M 형의 도시락은 소녀가 갖고 온 것처럼 이것저것 오밀조밀해서 늘 감탄한다. 양재동 원주추어탕에서 늦은 점심을 하..

사진속일상 2013.09.28

마지막 4중주

푸가 현악4중주단 네 단원의 인생 이야기가 음악과 아름답게 어우러진 영화다. 가장 연장자인 첼리스트 피터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숨겨졌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네 명은 서로 스승과 제자, 부부, 친구, 옛 연인 등으로 긴밀한 인간적 유대를 맺으며 25년간 4중주단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1바이올린과 2바이올린 사이의 갈등, 사춘기 자녀와의 마찰, 친구 딸과의 사랑, 건조한 부부관계, 외도, 외로움 등 보편적인 인간 문제에 대한 고민이 있다. 요란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잔잔하게 인생의 모습을 풀어 보여서 감동을 주는 영화다. 어차피 인생이란 삐걱거리고,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튜닝이 안 되어 있다고 연주를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다. 불협화음이 생기더라도 우리는..

읽고본느낌 2013.09.27

국수봉에서 본 광주

광주 시내를 조망하기에는 동쪽에 있는 국수봉(國守峰)이 제일 낫다. 국수봉 일대는 병자호란 때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가던 지원군과 청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다. 산 밑에 쌍령동(雙嶺洞)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아마 이 쌍령 고개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아군은 참패를 하고 결국 인조의 항복으로 이어졌다. 가을 하늘이 맑게 펼쳐진 날, 국수봉에 올랐다.

사진속일상 2013.09.26

소리에 둔해지기

우리 나이가 되면 몸의 기능이 저하되는 걸 실감한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나 예외가 있다. 청력만은 젊었을 때와 전혀 차이가 없다. 오히려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 어디서 들은 얘긴데, 늙어서도 계속 자라는 것이 귀라고 한다. 그래서 귀가 큰 사람이 장수한다는 말도 생겼는가 보다. 귀는 외형뿐만 아니라 성능에서도 제일 오래 버티는 기관인지 모른다. 100세 넘게 사셨던 외할머니도 마지막 몇 년을 빼고는 청력만은 정상이셨다. 옆에서 소곤소곤하는 얘기도 들으시고는 참견을 하셨다. 그게 싫었던 어머니는 어떻게 젊은 사람보다 귀가 더 밝느냐고 혀를 찼다. 귀 때문에 외할머니는 지청구를 많이 들으셨다. 늙어서는 못 들은 척해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귀가 밝다는 건 축복이기보다는 성가신 일이다. 상하좌우로 다..

길위의단상 2013.09.26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 윤재철

바퀴는 몰라 지금 산수유가 피었는지 북쪽 산기슭 진달래가 피었는지 뒤울안 회나무 가지 휘파람새가 울다 가는지 바퀴는 몰라 저 들판 노란 꾀꼬리가 왜 급히 날아가는지 바퀴는 모른다네 내가 우는지 마는지 누구를 어떻게 그리워하는지 마는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고독한지 바퀴는 모른다네 바퀴는 몰라 하루 일 마치고 해질녘 막걸리 한 잔에 붉게 취해 돌아오는 원둑길 풀밭 다 먹은 점심 도시락 가방 베개 하여 시인도 눕고 선생도 눕고 추장도 누워 노을 지는 하늘에 검붉게 물든 새털구름 먼 허공에 눈길 던지며 입에는 삘기 하나 뽑아 물었을까 빙글빙글 토끼풀 하나 돌리고 있을까 하루해가 지는 저수지 길을 바퀴는 몰라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너무 오래 달려오지 않았나 -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

시읽는기쁨 2013.09.25

무사시의 작약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에게 이런 일화가 전한다. 무사시가 당시의 최고 검객이었던 세키슈샤이에게 진검승부를 신청했다. 그러나 세키슈샤이는 감기 때문에 도전을 못 받아주는 대신 작약꽃을 칼로 베어 무사시에게 전했다. 꽃이 베어진 단면을 보고 무사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나는 세키슈샤이 명인에게 이길 수 없다. 그야말로 내가 본 중에 최고의 검객이다." 그리고는 세키슈샤이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이 정도 되면 검술은 예술의 경지에 든 것이다. 고수는 고수가 알아본다든가, 꽃이 베어진 단면을 보고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는 무사시도 고수다. 그는 검을 통해 선(禪)의 경지에 이르렀다. 무사시는 '칼로 싸우지만 마음으로 이긴다'라는 말도..

참살이의꿈 2013.09.24

논어[50]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은 세상일을 처리할 때, 꼭 그래야 할 것도 없고, 안 할 것도 없다. 옳은 길을 택할 따름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 里仁 10 에서도 '의(義)'가 강조되는 걸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공자라고 하면 부드러운 할아버지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주로 인(仁)에 대해서만 듣고 배웠기 때문이다. 의(義)에서는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과 실천 의지가 읽힌다. 공자 정신을 어떻게 삶으로 구현하느냐를 고민할 때면 이 의(義)의 문제와 부딪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보다는 '정의'라는 말이 그나마 오염이 덜 되었다. 의(義)의 길이 어떤 길인가는 각자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덜 ..

삶의나침반 2013.09.23

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에서 펴낸 젊은 작가의 소설을 두 권 읽었다. 김애란의 과 김학찬의 였다. 둘 다 30대 초반의 작가답게 신선하고 경쾌하며 재미가 있었다. 은 조로증에 걸린 열일곱 살 소년의 마지막 1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열일곱이지만 육체 나이는 여든을 넘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병에 시달리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산 소년은 책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찾아낸다. 두근거리는 사랑도 경험한다. 무거운 주제일 수 있지만 극한 상황에서도 빛나는 인간성이 젊은 작가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그려졌다. 는 붕어빵 명인인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려는 스물아홉 청년의 독특한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까지 가서 타꼬야끼를 굽는 비법을 전수받고 온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갈등, 불안한 젊은 세대의 고민 등이 함께 그려진다..

읽고본느낌 2013.09.22

고향집 과꽃

고향집 화단에서는 봄, 여름, 가을, 언제나 꽃을 볼 수 있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정성 들여 가꾸는 덕분이다. 마을에서 우리 집처럼 꽃이 많은 집은 없다. 같은 계절이라도 해마다 꽃의 주종이 바뀐다. 올 추석에 눈에 띈 꽃은 과꽃이었다. 과꽃은 고향과 어울리는 꽃이다. 그만큼 향토색이 진하게 느껴진다. 또 과꽃이라고 부르는 어감에서는 왠지 모를 슬픔이 배어 나온다. 그건 아마 이 동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과꽃은 우리나라 북부 지방에서 자생하는 종이었지만 유럽으로 건너가 원예용..

꽃들의향기 2013.09.21

2013 추석

동생네가 도착하기 전 셋이서 미리 송편을 빚었다. 모양새도 사람에 따라 세 가지로 나왔다. 나는 큼직하게 양손으로 눌러 만드는 데 익숙하다. 그러면 손가락 자국이 굵게 나온다. 어머니가 시집왔을 때 손가락 자국이 나는 건 상놈이 빚는 송편이라면서 절대 누르지 못하게 배웠다 하신다. 아내는 어릴 때 익힌 전라도 식이다. 송편소로는 콩, 깨, 밤 세 가지를 썼는데 내 몫은 콩이었다. 나중에 보니 콩을 너무 많이 넣어 송편인지 콩떡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송편을 찔 때 전에는 솔잎을 깔았는데 몇 해 전부터는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 송편이 '솔잎 떡'이라는 의미의 '송병(松餠)'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다음에는 번거롭더라도 뒷산에 다녀와야겠다. 아무래도 솔 향기가 배어야 제맛이 날 것 같다. 아무리 먹을 게 풍성하..

사진속일상 2013.09.20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 / 한영옥

무더운 어느 하루라도 큰 회화나무에서 떨어진 꽃무늬는 참 좋다 줍고 싶을 만큼 태가 흐르는 것도 아니고 쓸어버려야 할 만큼 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제 그늘 안쪽으로 살풋하게 내려앉은, 흰빛에서 연둣빛 사이를 오가며 엮은 수수한 돗자리처럼 보이는 심심한 무늬가 두어 평 남짓 안에서 고요하다 수수한 자리에 슬며시 들어서서 몹시 우는 매미를 열심히 받아주노라면 이해 불가능에서 이해 가능으로 길이 꺾이고, 꺾이자마자 길은 곳곳이 맘 좋은 초록이다 몇 송이 꽃잎을 더 내려 앉혀주며 여름은 편하게 제 깊이를 다 펴고 한숨 잔다 고요한 그 사람의 속 깊은 염려 속인가, 생각수레 덜컹거리지 않아 악의(惡意)도 잘 잔다 꺾인 길섶으로 한참은 더 초록이 좋으리 큰 회화나무 꽃 떨어진 무늬는 좋기도 하지. - 큰 회화나무 ..

시읽는기쁨 2013.09.17

논어[49]

선생님 말씀하시다. "진리를 탐구한다 하면서 음식과 옷맵시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위인과는 탐탁스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 里仁 9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의식주가 인간의 기본 욕구이긴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예수 공동체나 공자 공동체나 스승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같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하늘의 섭리에 대한 절대 신뢰다. 그러나 악의악식악주(惡衣惡食惡住)에도 불구하고 담담할 수 있는 갑남을녀가 얼마나 될까? 하물며 그걸 즐기는 경지랴.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며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고 공자는 칭찬했다. 에서 '선비[士]'라는..

삶의나침반 2013.09.16

팔석정

팔석정(八石亭)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흥정천에 있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이곳 경치에 반해 정자를 짓고 여덟 개의 바위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정자는 소나무가 있는 큰 바위 위에 있었음 직하다. 양사언은 강릉부사로 있을 때 수시로 이곳을 찾아 경치를 즐긴 모양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옛 그림에 나올 법한 모양의 바위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물과 세월에 깎인 마알간 바위의 속살이 좋다. 양사언이 붙인 바위 이름 중에 '석평위기(石坪圍碁)'가 있다. '바둑 두기 좋은 바위'라는 뜻이다. 지금은 글씨가 마모되어 어느 바위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위가 평평한 바위일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바위는 여러 개가 있다. 언젠가 바둑판을 들고 와 저 위에서 바둑 한 수 두고프다. 물소리, 바람..

사진속일상 2013.09.15

약수리 느릅나무

수령이 460년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느릅나무가 아닌가 싶다. 키도 크고 풍채도 우람하다. 안내문에는 키가 25m, 줄기 둘레가 5.5m로 적혀 있다. 평창을 지나는 국도 31호선 가에 있다. 옆으로는 평창강이 흐른다. 나무는 강과 도로 사이에 끼여 옹색한 게 아쉽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음식점 이름이 '느티나무집'이다. 아마 이 나무를 느티나무로 착각한 것 같다. 느티나무도 느릅나뭇과니 둘은 비슷한 데가 많다. 느릅나무를 한자로는 '유(楡)'라고 쓰는데, 예부터 목재로서의 가치가 아주 높았다. 나무 재질이 그만큼 단단하다. 또 느릅나무 껍질은 소나무 껍질처럼 구황식물로 이용되었다. 어렸을 적 기억인데 이웃집에서 느릅나무 잎과 가지를 삶아 약으로 드시는 것도 보았다. 느릅나무가 지금은 생소하지만 ..

천년의나무 2013.09.14

봉평 허브나라

봉평에 있는 허브나라농원은 예쁘게 꾸며 놓은 꽃정원이다. 한국 최초의 허브농원이고, 최고의 생태정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안에는 야외 공연장과 팬션도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아기자기한 동화의 나라에 들어온 듯 하고, 푸짐한 꽃 잔치에 초대 받은 듯도 하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다. 어느 건물 벽에 걸려 있는 시 한 편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착역에서 당신이 걸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절망과 좌절에서 걸어 나오기를 미움과 증오에서 걸어 나오기를 불평과 불만에서 걸어 나오기를 열등감과 우월감에서 걸어 나오기를 수치심과 두려움에서 걸어 나오기를 우울과 무력감에서 걸어 나오기를 부정적인 생각과 허무에서 걸어 나오기를 봄은 겨울에서 힘차게 걸어 나오는 것들의 이야기입니다..

꽃들의향기 2013.09.13

블로그 10년

블로그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었다. 2003년 9월 12일에 한미르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첫 글을 올렸으니 오늘로 꼭 10년이 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 하루에 하나의 글을 쓰자고 다짐했는데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켜온 게 우선 기쁘다. 포스트의 양보다 꾸준함이 스스로 대견하다. 블로그를 하기 전에도 일기를 계속 썼으니 매일 글 쓰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블로그는 공개되는 일기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블로거들과의 소통에 뜻을 둔 건 아니었다. 그건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방문해 댓글을 다는 이웃 블로거는 거의 없다. 내가 나들이 나가는 경우도 드물다. 내 블로그는 그저 독백 수준의 자기만족으로 그만이다. 블로그에서는 블로그 주인의 성격이 나타난다. 오지랖이 넓지 않은 건 블로그 세계에서도 마..

길위의단상 2013.09.12

김영민의 공부론

한자로 쓴 '공부(工夫)'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장인 공[工]'과 '지아비 부[夫]'로 된 의미가 지금 사용하는 공부의 뜻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전통적 의미의 공부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공부와는 달랐음이 분명하다. 김영민 선생이 쓴 은 본래적 의미의 공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부란 체계와 에고이즘으로부터 어긋냄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몸부림에서 시작한다. 이걸 선생은 '몸을 끄-을-고'라는 표현으로 쓴다. 공부란 머리로 하는 지식놀이가 아니다. 생각만이 많은 사람들은 입과 펜으로 관념의 사상누각이나 이론의 만리장성을 쌓지만, 몸을 끄-을-고 나온 사람들은 온갖 지식과 이론을 담으면서 비우고, 쓰면서 지우며, 알면서 모른 체하는 과정을 통과하여 몸이 좋은 사람들로 변화해 간다. 이 과정에서 '체계와의..

읽고본느낌 2013.09.11

우리 시대 산상수훈 / 고정희

내 뒤를 따르고 싶거든 남의 발을 씻겨주라 씻겨주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기 자랑 시대, 남의 발 씻기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몸종이라 부르네 내 십자가를 지고 싶거든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남북분단 시대, 그대를 세상은 빨갱이라 부르네 내 기적을 알고 싶거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밀고 오 리를 가라 하면 십 리까지 따라가라 따라가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먹이사슬의 시대, 몸을 달라 하면 쓸개까지 주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창녀라 부르네 내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땅에서 가난하라, 땅 위에 재물을 쌓지 마라, 주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본독점 시대, 오직 가난한 이 여기 있으니 그대..

시읽는기쁨 2013.09.09

논어[48]

선생님 말씀하시다. "진리를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子曰 朝聞道 夕可死矣 - 里仁 8 번역이 깔끔하다. 직역하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지만, 괜히 아침, 저녁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여기서 공자가 말한 '문도(聞道)'가 뭔지 나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단순하게 '진리를 깨달음'으로는 만족이 안 된다. 정신적, 영적 깨달음에 대한 간절한 바람으로 그치는 걸까? 공자는 세상에 도가 펼쳐지기를 바랐다. 그 목적을 위해 14년 동안이나 온갖 고생을 하며 이 나라 저 나라를 찾아다녔다. 그래서 '문도(聞道)'를 개인적 깨달음으로 보다는 도(道)가 실천되는 세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 이렇게 해..

삶의나침반 2013.09.08

친구, 동지, 동무

친구 전일하게 다양해진 자본주의와 매고르게 신체화한 상업주의 속에서 부패하고 속물화한 인정투쟁의 일상을 살아 내고 있는 친구들은 그 가차 없고 삭막한 부가가치의 계단을 좇아 스스로를 파편화, 분열화, 원자화시키면서 신분상승의 꿈을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친구들은, 오늘도 정실과 연고, 인맥과 학맥, 그리고 지역과 출신의 그늘을 쫓아다니면서 친구로서의 연대와 실천을 공고히 함을 통해 그 오래된 의리를 충량(忠良)하게 지켜 낸다. 스스로의 존재를 자본의 스케일 위에 환원/환산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들은 물화(物化)의 과정 속에 투신하여 '기계-남자'나 '도구-여자'로 변신, 또 변신하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속에 모여드는 친구에게는 동지들이 추구하는 대의나 이데올로기마저..

참살이의꿈 2013.09.07

손주와 창덕궁 나들이

9개월 된 외손주를 데리고 창덕궁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아이와 함께한 첫 외출이었다. 어느새 유모차를 따라가는 할아버지가 되다니, 내 자식이 유모차에 앉아 있었을 때가 자꾸 생각났다. 손주는 이제 막 길려고 한다. 팔과 무릎으로 버티기는 하는데 아직 앞으로 나가지는 못한다. 아이가 크는 걸 보면 무척 빠르다. 그래도 저걸 언제 키워서 사람으로 만들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창덕궁은 전과 달리 자유 입장이었지만, 후원은 여전히 가이드 인솔하에만 관람이 가능했다. 후원을 자유롭게 다니는 특별 관람이 없어져 아쉬웠다. 우리는 애련지까지만 따라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그런데 후원에서는 통제가 너무 심해 마음 놓고 의자에 앉아 쉬지도 못했다. 잘 보전이 되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창덕궁은 조선 시대..

사진속일상 2013.09.06

엘리시움

서기 2145년의 지구는 전쟁과 환경 오염, 인구 과다로 거대한 쓰레기장 같은 빈민촌으로 변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지구를 도는 궤도에 자신들의 파라다이스를 건설하고 첨단 과학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중의 하나에 무슨 병이든지 몇 초 만에 고치는 의료기가 집집마다 한 대씩 있다. 심지어는 총상을 입은 얼굴도 말끔하게 치유된다. 테크놀로지에 의해 무병장수가 기술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런 상위 1%의 거주지가 엘리시움(Elysium)이다. 미래의 지구 모습이 궁금해 이 영화를 보았다. 굉장히 가능성 있는 예견이다. 지금도 1:99의 사회라고 하지만 130년 뒤의 세계는 양극화가 우주적으로 확대되었다. 엘리시움이 지금의 선진국이라면, 지구는 제 3 세계의 비유가 될 법하다. 밀입국하다가 죽고 추방되..

읽고본느낌 2013.09.05

유방 / 문정희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사춘기 때부터 레이스 헝겊 속에 꼭꼭 싸매놓은 유방 누구에게나 있지만 항상 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깊이 숨겨놨던 유방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랜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나 지금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시읽는기쁨 2013.09.04

걱정하지 마

"어떻게 지내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지 뭐." "일산 킨텍스의 건축 박람회 보러 가자." "나가는 것도 귀찮다. 그냥 집에 있는 게 편타." "야, 너무 그러면 폐인 된다.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 "알겠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뭣 하고 있어?" "똑같지 뭐. 집에 있어." "답답하지 않냐?" "답답하긴, 이게 편하고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하여튼 희한타." "......." 최근에 두 친구와 통화한 내용이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논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다. 한 친구는 끔찍하게도 '생지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사업하는 친구인데 그는 지금까지 일 없이 집에서 놀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닥치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남자가 집에서 빈둥거리면 왜 안 되는 ..

길위의단상 2013.09.03

논어[47]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의 허물은 저 되기에 따라 다르다. 그 허물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지."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 里仁 7 장점보다는 단점을 통해서 사람됨을 더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부정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해 가는 철학적 방법과 유사하다. 이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허물이냐가 그 사람됨을 결정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근에 읽은 함석헌 선생의 글에서는 우리 민족의 단점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심각성이 부족하다. 파고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그래서 시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 5천 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세계를 이끈 심오한 사상이 ..

삶의나침반 201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