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 32

다시 논밭으로 / 서정홍

마을 회관에 보건소 소장님 오셨다. 조그만 가방 안에 설사약 감기약 위장약 피부약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아무래도 돼지고기 먹은 게 탈이 났는갑다. 온종일 설사하느라 일을 할 수 있어야제. 이런 데 먹는 특효약 없나?" "특효약이 어디 있소. 나이 들수록 조심조심해서 먹는 게 특효약이지." "나는 허리가 아파 똥 누기도 힘들고 온 만신이 다 아픈데 우짜모 좋노." "수동 할매, 여기 안 아픈 사람이 어딨소? 쇠로 만든 자동차도 오래 쓰모 고장난다 카이. 그만큼 살았으모 아픈 기 당연하지. 안 아프모 사람이 아니라요." 보건소 소장님은 안 아픈 데가 없는 산골 마을 늙으신 농부들의 몸과 마음을 도사처럼 훤히 꿰뚫어 본다. 그리고 단돈 구백 원만 주면 약도 주고 주사도 놓아 준다. 보건소 소장님 다녀가..

시읽는기쁨 2013.11.29

우리 시대

아일랜드에 가 있는 친구가 한국이 왜 이리 어수선하냐며 메일을 보내왔다. 차라리 인터넷이 없었으면 싶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봤을 때는 거의 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나 보다. 신부가 강론 중에 한 시국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들이려 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종북'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너무 답답하다. JTBC '뉴스9'에서 손석희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신부가 가난한 이에게 빵을 주면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지만, 그가 왜 가난한 것인지 사회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빨갱이라 비난을 듣게 된다."

길위의단상 2013.11.28

올해 나온 카메라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향상되어 가는 카메라 성능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모델 교체 주기도 엄청나게 빨라졌다. 기계를 좋아하지 않지만 카메라는 예외다. 탐나는 카메라에는 갖고 싶은 욕심이 동하지만 덜컥 사지는 않는다. 카메라 회사의 소비자 지갑 털기 전략이 어느 정도는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나이 또래에서는 카메라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고 여러 기종을 만져 보았다. 금년에도 기술적으로 혁신을 이룬 제품이 등장했다. 올해 나온 카메라 중에서 관심이 가는 것을 골라 보았다. 1. 소니 A7 소니에서 세계 최초로 풀 프레임[FF] 미러리스를 만들었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FF 바디에 대한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DSLR은 가격이 비싸고 무거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니가 드디어 미러..

길위의단상 2013.11.27

1984

젊었을 때 읽은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1984년이 다가올 미래였지만, 지금은 지나간 과거다. 소설에서 그린 것과 같은 1984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래에 대해 자꾸 비관적이 되는 건 왜일까? 시절이 더 수상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세상을 더 사실적으로 보게 된 탓일까? 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개인의 마음까지 당이 장악한다.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초강대국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계급사회다. 오세아니아는 맨 꼭대기에 빅 브라더가 있고, 그 밑에 당원이 있으며, 하층의 노동자 계급으로 되어 있다. 세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지만 이는 공포를 조성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를 조작하고, 아예 인간성을..

읽고본느낌 2013.11.26

논어[58]

선생님 말씀하시다. "곧은 마음씨는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니." 子曰 德不孤 必有隣 - 里仁 18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 어릴 때부터 눈에 익었던 문장이다. 친구 집이었을까, 학교 현관이었을까, 붓글씨로 쓰인 액자를 자주 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었다. 지금 이 구절을 다시 만나니 덕은 외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외로운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인의(仁義)의 길이 드물고 외로운 길이라면, 덕(德)의 길도 마찬가지다. 인간 세상에서 그 길을 걷는 게 고독하지 않을 리가 없다. 고(孤), 홀로 우뚝하므로 당당한 길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외롭게 보여도 외로운 게 아니다. 도리어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것이 ..

삶의나침반 2013.11.25

김장은 힘들어

고향에 내려가서 김장을 했다. "내려와 같이 김장을 담그자." 아직은 어머니의 파워가 막강하시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니요, 저희는 여기서 따로 담을 께요." 아마 아내의 속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절인 배추를 신청만 하면 집까지 택배로 보내주는 편리함이 자꾸 손짓한다. 그러나 김장에 대한 어머니의 정서는 다를 것이다. 김장을 함께 한다는 것은 가족이라는 동질감을 확인하는 한 해의 마지막 행사인지도 모른다. 배추를 심지 말라고 말려도 안 된다. 내 손으로 기른 채소를 자식에게 먹인다는 뿌듯함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연세가 많으셔도 이만큼 기력이 있으시다는 게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고향에서 하는 김장은 배추에서부터 모든 재료가 어머니가 손수 지은 것이다. 시장에서 사서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

사진속일상 2013.11.24

구름체꽃

솔체꽃과 너무 닮았다. 꽃 모양새만으로는 둘을 분간하기 어렵다. 구름체꽃은 천 미터 이상의 고산 지대에서 자라니 둘을 헷갈릴 염려는 없다. '구름'은 그만큼 높다는 의미고, '체'는 꽃봉오리 모양이 떡가루를 고를 때 쓰는 체를 닮았대서 구름체가 되었다고 한다. 자라는 장소와 꽃 모양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재미있는 이름이다. 야생 상태에서는 만나지 못했고, 전주수목원 화단에서 보았다.

꽃들의향기 2013.11.21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유리도 귀했던 때 창호지 문에 조그맣게 유리 한 조각 발라 붙이고 인기척이 나면 그 유리 통해 밖을 내다보았지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 차라리 상상력이 더 길었던 때 여백이 많았던 때 문풍지 우는 바람이 아름다웠던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던 때 - 창호지 쪽유리 / 윤재철 날씨가 차가워지니 고향 생각, 어릴 적 생각이 자주 난다. 추웠고, 먹을 것 부족했고, 모든 게 궁핍했던 그 시절이 자꾸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벽난로를 피우고 거실 한쪽 벽면을 유리창으로 환하게 만들어도, 그 옛날 창호지 유리 한 조각만큼 따뜻하지는 않다. 호롱불 아래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밤이었다. 추워서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누우면 싸락눈이 사각거리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되면 온통 어둠..

시읽는기쁨 2013.11.20

논어[57]

선생님 말씀하시다. "옛 사람들은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실행이 못 미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선생님 말씀하시다. "쓸모 있는 인간은 말은 더듬되 실행은 재빠르게 하느니라." 子曰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 里仁 17 말을 지나치게 하게 된다는 점이 트위터의 해악이라면서 어느 분이 트위터를 끊었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끊임없이 들리는 '카톡'이라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린다. 문명의 이기 덕분에 이젠 멀리 있는 사람과도 쉼 없이 재잘거릴 수 있다. 하나 정작 옆에 있는 사람과는 소통이 잘 안 된다. 현대인은 너무 말이 많아졌지만 오히려 외로워졌다. 말이 많아진 반면 생각하고 음미할 시간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이 트위터를 그만둔 게..

삶의나침반 2013.11.19

첫눈이 내리다

뒷산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올겨울의 첫눈을 맞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온몸으로 받았다. 10여 분간 내리더니 이내 그쳐 땅에 쌓일 정도는 아니었다. 맛보기로 보여준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 나오던 꼬마가 손을 내밀며 "눈이네요!" 한다. 다른 꼬마는 생긋 웃으며 내 옷에 붙은 눈을 털어준다. 한 할머니는 자동차 유리문을 내리고 환한 얼굴로 손주에게 눈 구경을 시켜준다. 한 살 정도 된 아기도 해맑게 웃는다. 남녀노소 모든 이의 얼굴에 미소와 탄성을 자아내는 첫눈이다. 아파트 뜰에 산길에 생을 마감한 낙엽이 뒹굴고 있다. 각각 색깔은 달라도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모두 가볍고 아름답다. 이 시기면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 '고엽(枯葉)'으로 알려진 'Autumn Leaves'다. 에릭 클랩튼..

사진속일상 2013.11.18

고마운 천적

윗집 때문에 생활 패턴이 변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던 것이 자정 이후로 늦춰졌고, TV를 보는 시간도 늘었다.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이다. 어린아이 둘이 있는 윗집은 밤 10시가 넘으면 소란이 시작된다. 그 시간이 되어야 가족이 다 모이는 것 같다. 짧으면 한 시간 정도지만, 길면 1시까지도 이어진다. 잠이 들었다가도 쿵쾅대는 소리 때문에 깬다. 다시 잠들기 위해서는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신경이 쓰이면 책을 읽어도 집중이 안 되고 아무것도 못 한다. 소음에는 마인드 컨트롤도 안 통한다. 그래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너무 심할 때는 인터폰으로 연락하지만 자주 싫은 소리 하는 것도 서로에게 스트레스다. 말을 해봤자 감정만 상하지 별 효과도 없다. 어린아이 발목에 족쇄를..

참살이의꿈 2013.11.18

그래비티

우주를 무대로 한 영화 중에 이만큼 사실적이고 실감 나게 그린 작품도 없는 것 같다. 보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하는 영화다. 종래의 영화 인식을 바꿀 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포스터에 나오는 것처럼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 내용은 단순하다. 우주정거장 사고와 그 이후의 귀환 과정에 대한 얘기다. 등장인물도 단 두 명이다. 궤도에서 보는 우주와 지구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화면에 몰입되면서 마치 내가 우주인이 된 듯하다. 그러나 고요하고 평화롭던 우주는 한순간에 공포로 변한다. 진짜 우주의 모습인지 모른다. 지구 품을 벗어난 곳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력은 만물을 연결하는 힘이다.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 절대 고독의 외톨이다. 중력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인간 ..

읽고본느낌 2013.11.17

검단산을 넘다

연일 안개 자욱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안개 때문에 헬기가 아파트와 충돌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오늘 검단산 산행도 한낮이 지날 때까지 짙은 안개와 구름을 헤치며 걸었다. 산봉우리 정상부만 제외하고 모든 게 구름의 바다에 묻혔다. 600m급의 낮은 산이지만 덕분에 고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치를 즐겼다. 안개와 구름의 차이를 설명할 때 지면에 접해 있으면 안개, 떨어져 있으면 구름이라고 가르쳤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어디까지가 안개이고 구름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출발할 때는 안개였는데, 산에 올라서니 구름이었다. 안개나 구름이나 같은 원리로 생기는 것인데, 억지로 나누는 건 인간의 머리 궁리일 뿐일 것이다. 검단산(黔丹山)의 '검(黔)'은 검다, '단(丹)'은 붉다는 뜻이다. 직역하면 검..

사진속일상 2013.11.16

연이은 착각

두 번의 연이은 착각을 했다. 지지난주에는 결혼식장에 갔더니 혼주가 엉뚱한 사람이 서 있었다. 청첩장을 꺼내 보니 축하해줘야 할 친지 결혼식은 다음날이었다. 날짜를 하루 착각한 것이다. 지난주 결혼식은 식장에 갔더니 이미 끝난 뒤였다. 시간을 두 시간이나 오해해 주인공을 보지도 못하는 실례를 했다. 깜빡하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나 이렇게 연달아 실수하고 보니 내 정신이 녹슬어가는 게 실감 난다. 운전을 해보면 안다. 내비의 안내를 받지만 엉뚱한 길로 들어설 때가 잦다. 여러 갈래 길에서 정확한 결정을 못 내린다.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감각만으로도 길을 잘 찾아갔다. 이제는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고작 선택한 게 정답이 아니다. 총기가 떨어졌다는 뜻이다. 도로가 복잡해져서 그렇다고 자기 위안을 해 보지만 자..

길위의단상 2013.11.15

억새(3)

억새는 씨를 날려 보내기 위해 날개를 단다. 억새의 하얀 깃털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큼 가을의 정취를 표상하는 것도 없다. 잎과 줄기가 부딪치며 서걱대는 음향효과가 더해진다. 억새, 참억새, 물억새, 금억새, 가는잎억새 등 종류도 여럿이다. 억새와 갈대를 구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세세히 나누는 건 전문가에게 맡기고 그냥 억새라고 통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만난 억새를 좀 색다르게 표현해보려 했다. 똑딱이를 가지고 이 정도 찍은 것에 만족한다. 가을볕 따사로운 오후의 언덕에서 억새를 바라본다. 억새는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 가을 하늘이 아무런 울타리 없이 넓다. 쇄락한 무형(無形)의 놀이터라고 할까. 바람이 잠시 불더니 다시 ..

꽃들의향기 2013.11.14

나의 삶 / 체 게바라

내 나이 15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 가를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 나의 삶 / 체 게바라 공자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는데, 체 게바라는 열다섯에 죽음에 대해 존재론적 고민을 했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고민과..

시읽는기쁨 2013.11.14

논어[56]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모의 잘못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여쭈어 가면서 그래서는 안 될 뜻만을 보이며, 공경하는 마음에 틈이 나서는 안 된다. 고되더라도 원망해서는 안 되는 법이야." 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모가 계시면 먼 길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나서게 되면 반드시 가는 곳이 이러저리 안 되도록 하라." 子曰 父母在不遠遊 遊必有方 선생님 말씀하시다.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법도를 뒤집지 않으면 효자라 해도 좋지." 子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모의 나이는 알아두어야 한다. 한편 기쁘기도 하려니와 한편 두렵기도 하지."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 里仁 16 효(孝)에 관한 공자님 말씀이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하기에는 ..

삶의나침반 2013.11.13

고슴도치의 가시

"어느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 바싹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들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떨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추위에 견딜 수 없어 다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가시가 서로를 찔러 그들은 다시 떨어졌다. 이와 같이 그들은 두 악(惡) 사이를 오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발견했다." 쇼펜하우어가 쓴 우화인데, 인간의 외로움과 공허함으로부터 생겨나는 사교의 욕구는 서로를 한 덩어리가 되게 한다. 그러나 너무 가까워지면 불쾌감과 반발심이 일어 다시 떨어진다.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이 인간 세상에서 지켜야 하는 정중함과 예의다. 일종의 중용인 셈이다. ..

참살이의꿈 2013.11.12

오관리 왕버들

옛 홍주관아에는 30동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동헌으로 쓰인 안회당(安懷堂) 등 넷밖에 안 된다. 그중의 하나가 여기 보이는 여하정(余何亭)이라는 정자다. 안회당 뒤뜰에 있는 연못 가운데 세운 것으로 관리들이 업무를 보다가 휴식을 취한 곳이다. 여하(余何)란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까?'라는 뜻이다. 여하정 옆에는 오래된 왕버드나무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1896년에 홍주목사 이승우가 이곳을 정비하고 여하정을 세웠다고 하니 만약 그때 심었던 나무라면 수령이 100년은 넘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 정도가 되어 보인다. 최근에 다시 복원한 정자는 옛 맛이 없어 아쉬우나, 연못과 정자, 왕버들이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풍경을 이룬다.

천년의나무 2013.11.11

오관리 느티나무

홍성군청 마당에 있다. 이곳은 홍주관아(洪州官衙)가 있던 자리로 홍주성이 둘러싸고 있다. 주위에는 여러 그루의 느티나무가 산재해 있는데 대표적인 게 이 두 그루의 나무다. 이 나무는 고려 공민왕(1358년) 때에 심었다고 하니 사실이라면 650년이나 되었다. 그래서 전해오는 전설도 많다. 고을에 액운이 낄 것 같으면 느티나무가 밤을 새워 울었고, 이때마다 관리는 서둘러 예방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역대 목민관들이 홍주에 부임하게 되면 제일 먼저 이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려 놓고 군민의 무고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는데 그 제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아마 홍성을 대표하는 나무인 것 같다. 나무 높이는 각각 17m, 11m이고, 두 나무가 덮고 있는 길이만도 40m가 된다. 오누이처럼 다정한 모습이 보기..

천년의나무 2013.11.11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청춘 시절에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라는 말만으로도 매력적인 철학자였다. 그의 책을 읽고 세상의 허무함을 자각한 여러 사람이 자살했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옛날 노트를 보니 쇼펜하우어의 를 읽었던 느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작 스무 살짜리가 쇼펜하우어를 자네라고 부르며 젊음의 객기를 부리는 모습을 흰 머리가 되어 흐뭇하게 바라본다. 1973/9/27 Arthur Schopenhauer(1788-1860) Schopenhauer에 대한 선입감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독특하고 쓴 웃음이 나오는 묘한 감정 말이다. 처음 그의 저서를 대할 때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높은 산을 정복하기 전의 알피니스트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그의 思想에 젖어보고 싶었으며 특출한 그의 재능이 나에..

읽고본느낌 2013.11.10

버들잎엉겅퀴

엉겅퀴는 전 세계적으로 200여 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도 엉겅퀴, 지느러미엉겅퀴, 큰엉겅퀴, 물엉겅퀴, 가시엉겅퀴, 바늘엉겅퀴, 고려엉겅퀴, 버들잎엉겅퀴, 도깨비엉겅퀴 등 여러 종류를 만날 수 있다. 꽃보다는 잎 모양으로 구분된다. 이름 그대로 잎이 버들잎을 닮아서 버들잎엉겅퀴다. 지느러미나 바늘엉겅퀴처럼 억센 가시는 없다. 상처난 곳에 잎을 찧어서 붙이면 피가 엉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엉겅퀴, 서민의 삶과 닮은 국화과의 다년생 풀이다.

꽃들의향기 2013.11.07

절화행(折花行) / 이규보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미인이 꺾어들고 창 앞을 지나며 살짝 웃음띠고 낭군에게 물었다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낭군이 짐짓 장난을 섞어서 말했다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미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서 꽃을 밟아 뭉개며 말했다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을 안고 주무세요." - 꽃을 꺾어들고 / 이규보 牧丹含露眞珠顆 美人折得窓前過 含笑問檀郞 花强妾貌强 檀郞故相戱 强道花枝好 美人妬花勝 踏破花枝道 花若勝於妾 今宵花同宿 - 折花行 / 李奎報 즐겨보는 프로인 '개콘'에 '두근두근'이라는 코너가 있다. 좋아한다는 걸 대놓고 고백하지 못하는 두 청춘남녀의 수줍고도 풋풋한 사랑을 보노라면 절로 미소가 인다. 은은한 60년대식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시 '절화행(折花行)'에서 받는..

시읽는기쁨 2013.11.06

아침고요수목원 천년향

아침고요수목원을 대표하는 나무다. 원래는 안동에 있는 한 마을의 당산목이었으나, 마을이 수몰되면서 아침고요수목원으로 옮겨졌다. 향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이식 후에도 새 토양에 대한 적응이 빠르고 고사의 위험성이 적다고 한다. 수령이 1,000년 정도로 추정되어서 천년향이라고 이름 붙었다. 줄기는 노쇠했지만 전체적인 풍모는 단아하고 아름답다. 잘 가꾼 인공미이긴 하지만 사람도 저렇게 곱게 늙어가고 싶다.

천년의나무 2013.11.05

논어[55]

선생님 말씀하시다. "잘난 이를 만나면 나도 그렇게 되기를 생각하고, 못난 이를 만나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 里仁 15 유생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나의 스승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다[三人行必有我師焉]. 못난 이더라도 반면교사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가 '배울 학(學)' 자로 시작하듯이 공자에게 배움이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다. 배우고 익혀서 성숙해지는 기쁨을 말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공부는 고통과 괴로움만 준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알면서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공부는 삶의 희열이 된다. 공부의 참뜻은 본래 그런 것이었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면서 지방을 쓸 때 죽은 ..

삶의나침반 2013.11.05

둔리 느티나무

수덕사로 가기 위해서는 수덕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고갯마루에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이 300년 가까이 된 나무들이다. 이곳에 예전에는 주막이 있었음 직한 위치다. 지나던 길손이 이 느티나무 아래서 막걸리를 마시며 다리를 쉬었으리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변에 육괴정(六槐亭)이 있다는 안내문도 있다. '괴(槐)'가 원래 회화나무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느티나무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느티나무 옆에는 지금 현대식 2층 상가가 들어서 있지만 차라리 옛날 주막집을 복원해 놓는다면 더 나을 것 같다. 음식점 네온사인이 영 어울리지 않는다.

천년의나무 2013.11.04

식사의 품위

아내가 날 편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먹는 데에 무던한 것이다. 이제껏 반찬 투정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식사는 간소한 게 좋다는 주의라 군대식대로 늘 1식3찬을 강조한다. 있는 반찬 아무거나 한두 개만 있으면 만족한다. 배고플 때 냉장고를 열고 혼자서도 잘 챙겨 먹는다. 부엌 출입하는데 남편 아내의 구별이 없다.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어도 다행히 삼식이 새끼라는 핀잔은 듣지 않는다. 그래서 유별나게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식탐(食貪)을 하는 사람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까지는 좋으나, TV의 음식점 소개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먹는 걸 탐하는 걸 보면 측은해 보인다. 사는 게 너무 천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

참살이의꿈 2013.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