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 32

시집보내다 /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나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몇 년 전 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시읽는기쁨 2014.07.31

학림사 소나무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 남쪽에 위치한 학림사(鶴林寺)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1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주변 산세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학포지란(鶴抱之卵)의 형국이라고 해서 학림사라 명명되었다 한다. 서울에 가까이 있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절이다. 학림사 대웅전 옆에 노송 한 그루가 있다. 절을 품에 안고 있는 듯한 기품이 대단한 소나무다. 소나무 옆 돌의자에 앉아 절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안내문이 없어 잘 모르겠으나 수령이 삼사백 년은 넉넉히 돼 보인다. 학림사의 보물 같은 나무다.

천년의나무 2014.07.30

수락산에 오르다

여름 땡볕 속에서 수락산(水落山, 637m)에 올랐다. 다행히 습도가 낮고 바람도 선선히 불어 무덥지는 않았다. 당고개에서 오르는 코스는 햇볕을 등지고 걸을 수 있어 따가운 햇볕도 피했다. 서울에 인접한 산이건만 산길에서 사람을 드문드문 만날 정도로 한적해서 좋았다. 수락산 정상은 근 20년 만에 오른 셈이다. 그때 탈서울을 기념한다고 여름방학 한 달 동안 서울 가까이 있는 모든 산을 섭렵했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산에 오른 과정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마치 처음 오르는 산 같았다. 북한산과 도봉산에 가려 수락산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이번에 그 매력을 한껏 접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암봉이 웅장한 멋진 산이었다. 전체적으로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이 고양되면서 편안한 그런 산이었다. 이..

사진속일상 2014.07.30

논어[94]

재아가 물었다. "사람 구실하는 사람은 '함정 속에 사람이 빠졌습니다' 하면은 뛰어듭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왜 그렇기야 할라구! 참된 사람은 가보기는 하겠지만 풍덩 빠지지는 않을 거다. 둘리는 수도 있지만 속아 떨어지지는 않지." 宰我問曰 仁者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 雍也 20 원문은 '우물에 인(仁)이 있다면'인데, 번역은 '함정 속에 사람이 빠졌다면'으로 되어 있다. '인'으로 보면 철학적인 질문이고, '사람'으로 보면 구체적인 상황이 된다. 어찌 되었든 재아의 질문은 교묘하다. "우물 속에 사람이 빠졌는데 인자(仁者)라면 뛰어듭니까?" 뛰어든다고 해도, 안 뛰어든다고 해도 꼬투리를 잡힐 것 같은 질문이다. 군자의 행동은 이성적이고 합리..

삶의나침반 2014.07.29

특이점이 온다

8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담고 있는 내용도 그만큼 충격적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이만큼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분석한 책도 드물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진화가 인류를 어떻게 변모시킬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 준다. 특이점이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를 말한다. 블랙홀에서 사건의 지평선이 물질과 에너지를 끌어당기며 그 패턴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과 유사하다. 특이점은 생물학적 사고 및 존재와 기술이 융합해 이룬 절정으로서, 생물학적 근원을 훌쩍 뛰어넘은 세계를 탄생시킬 것이다. 특이점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특이점이 임박한 시기에 ..

읽고본느낌 2014.07.28

세미원 연꽃

답답해하는 아내를 위해 세미원으로 연꽃 구경을 갔다. 장마중이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세미원에서는 연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꽃 풍년이 되면 오히려 빨리 식상해진다. 어렵게 꽃을 찾아내는 기쁨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말했다. "꽃이 많으니 그게 그거고, 심드렁해지네." 만약 이 넓은 데서 연꽃 한 송이만 피어 있다면 얼마나 애지중지 지켜볼 것인가. 꽃은 여일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하늘에 별이 많으면 별을 찾기 어렵고, 땅에 꽃이 많으면 꽃에 감탄하기 쉽지 않다.

꽃들의향기 2014.07.27

제비

제비는 참 특이한 새다. 대부분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도망가는데 제비는 사람 집을 찾아와서 둥지를 짓는다. 사람과 한가족이나 다름 없다. 사람이 지은 농작물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해충을 잡아먹으니 여러 모로 이로운 새라 할 수 있다. 날렵한 생김새며 지지배배 소리도 호감이 간다. 아마 지저귀는 소리에서 제비라는 말도 생겨났을 것이다. 제비만큼 사람과 가까운 새도 없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봄에서 여름까지는 항상 제비와 함께 살았다. 추녀에 제비가 집을 짓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그 밑에다 널빤지를 달아주었다. 제비 똥이나 불순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문 바로 위에 제비 둥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널빤지는 제비 새끼가 아래로 떨어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서로 말은 못해도 제비는..

사진속일상 2014.07.26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

시읽는기쁨 2014.07.25

세상이 무섭다

사람들은 고기 한 마리 던져준 데 눈이 팔려 정작 바다의 비극은 잊고 있다. 이제 새로운 화젯거리가 생겼으니 또 몇 달 우려먹을지 모르겠다. 정작 중요한 건 내팽개쳐두고 말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국가 개조란 언감생심이다. 세월호 참사 100일째다. 그래도 이번에는,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괴물이 된 것 같다. 거대한 톱니바퀴는 더 무서운 가속도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보신과 이기주의의 고치 안으로 숨는다. 세상이 무섭다.

길위의단상 2014.07.24

논어[93]

선생님 말씀하시다. "술잔이 술잔답지 않으면 술잔일까! 술잔일까!" 子曰 고不고 고哉 고哉 - 雍也 19 이 말은 사람이 사람답지 못함에 대한 공자의 한탄일 것이다. 어느 날 제나라 경공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공자가 강조하는 것 중 중요한 것이 이 '~답다'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길을 성실히 걸어간다면 나라는 저절로 바로 서게 된다. 이것이 공자의 도덕정치다. 그러나 지배층은 '답다'는 걸 오용하여 피지배 계급이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데 이용한다. 전 ..

삶의나침반 2014.07.23

양평 백운봉

두 주일 전에 백운봉을 오르려고 사나사로 갔다가 군대 포사격 훈련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되돌아선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안전한 용문산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해서 백운봉에 올랐다. 꽃 사부님인 Y와 동행했다. 백운봉(白雲峰)은 해발 940m의 꽤 높은 산으로 용문산과 연결되는 줄기에 있다. 서쪽에서 보면 삼각형의 뾰족한 모양이 알프스의 봉우리를 닮았다. 정상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게 보이는데 오르는 데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는 용문산으로 이어지는 연봉들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두리봉과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이날은 옅은 안개가 끼어 제대로 전망을 즐기지는 못했다. Y와 함께 걸으며 꽃과 식물 공부를 많이 했다. 꽃이 없으면 풀이나 나무 이름에서 나는 문맹이 된다. 심지어는 철쭉과 진달..

사진속일상 2014.07.22

사람의 맨발

한승원 작가의 장편소설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렸다. 세상 부조리에 대한 싯다르타의 고뇌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출가에 초점을 두었다. 소설은 싯다르타가 열반한 뒤 스승의 부음을 듣고 달려온 카사파에서 시작된다. 카사파가 슬퍼하고 있을 때 관이 터지며 싯다르타의 발이 밖으로 뻗어 나온다. 싯다르타의 두 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표상이다. 싯다르타가 두 발을 카사파에게 보인 것은 만천하의 인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험한 길을 걸어다닌 맨발의 의미를 잊지 말라는 당부인 것이다. 싯다르타는 사카 왕국의 임금으로 인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 카스트 신분 제도를 신의 뜻이라며 강요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계급사회를 싯다르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

읽고본느낌 2014.07.21

가은산에 오르다

가은산은 월악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해발 575m의 풍광 좋은 산이다. 청풍호를 옆에 끼고 금수산과 옥순봉 사이에 있다. 멀리서는 그저 평범한 산으로 보이지만 직접 올라보면 주변 조망이 훌륭하고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도 자주 만난다. 오래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산이다. 오랜만에 트레커에 합류하여 가은산에 올랐다. 마른 장마가 계속되는 습도 높고 무더운 날이었다. 다행히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어 연신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산행 들머리는 옥순대교, 날머리는 상천리였다. 비가 오지 않아 청풍호가 바싹 말랐다. 이곳 사람 말로는 수위가 이렇게 낮아진 건 처음 본다고 했다. 옥순대교 아래 강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줄었다. 가은산 능선에서 보는 풍경은 한 폭의 동양화다. 시야가 뿌연 게 오히려 신비한 느낌을 더해..

사진속일상 2014.07.20

덕진공원 연꽃

전주에 처음 갔을 때 소개 받은 곳이 덕진공원이었다. 30여 년 전이었다. 대개 첫 기억은 선명히 뇌리에 남아 있어 지금도 전주라는 말을 들으면 덕진공원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덕진공원은 여름 연꽃이다. 넓은 덕진호를 가로지르는 현수교와 팔각정도 그때와 같은 모습이다. 너무 많은 게 빨리 변하는 도시에서 늘 여전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는 건 드물다. 사연이 어떠하든 가끔씩 전주를 찾아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람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전주 시민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다. 보수하며 옛 모습을 지켜 나가는 것이 어쩌면 더 귀할지 모른다. 연꽃은 현수교를 기준으로 한 쪽 호수를 가득 채우고 있다. 보통 같으면 지금이 한창 때지만 올해는 이미 절정을 지나고 연밥이 여물기 시작한다. 그래도 시차를 두고 피어나는 늦둥..

꽃들의향기 2014.07.18

일색변 / 조오현

1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소리 들을라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2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3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沒弦琴)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4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소리 들을라면 언제 어디서 봐도 거문고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5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6 놈이라고 다 중놈이냐 중놈소리 들..

시읽는기쁨 2014.07.16

논어[92]

선생님 말씀하시다. "지혜 있는 이는 물을 즐기고, 사람다운 이는 산을 즐긴다. 지혜 있는 이는 서성거리고, 사람다운 이는 고요하다. 지혜 있는 이는 경쾌하고, 사람다운 이는 장수한다."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 雍也 18 지혜 있는 이의 특징은 물[水], 움직임[動], 즐김[樂]이고, 사람다운 이의 특징은 산[山], 고요함[靜], 장수[壽]다. 물과 산의 이미지가 지(知)와 인(仁)으로 잘 연결된다. 굳어져 고여 있으면 지혜라 할 수 없다. 또한 인은 산처럼 움직임이 없다. 감히 내 경우에 적용시키면 나는 지(知)보다는 인(仁)의 성향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보다는 산, 움직임보다는 고요함을 좋아하는 안정적인 성향이 그렇다. 주변의 사람을 지자와 인자로 구분해 보는..

삶의나침반 2014.07.15

인간의 선

고분고분하거나 말을 잘 들으면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어렸을 때는 이런 칭찬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달라진다. 정신적 미성숙자가 아니라면 그런 칭찬은 더 이상 칭찬이 아니다. 권위나 체제는 순종하는 인간을 원한다. 잘 길들여진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목표를 내걸지만 속내는 지금도 여전하다. 착하다, 선하다, 바르게 산다는 의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선해, 착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고 할 때 선하고 착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선하지 않다면 개인의 선량함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체제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결..

참살이의꿈 2014.07.14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랑스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걷기 예찬서다. 책은 걷기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중에 하나를 고르면 이렇다. 걸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걷기만 하면 순수한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고, 어린 시절을 만들어낸 삶의 소박한 즐거움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걷기는 부담을 덜어주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도록 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그 영원성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걷기가 어린아이의 놀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날의 날씨와 태양의 광채, 나무의 크기, 푸른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걷기다. 경험이나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너무 많이 걷거나 너무 멀리..

읽고본느낌 2014.07.13

칡꽃

칡꽃이 피기 시작한다. 칡이라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꽃이 화려하다. 등꽃과 비교될 정도로 잘 관리하면 관상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칡과 등은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갈등(葛藤)도 이 둘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칡은 오른쪽으로, 등나무는 왼쪽으로 다른 나무를 감아 올라간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산을 쏘다니다가 칡뿌리를 씹으면 씁쓸달콤한 맛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칡은 외양과 달리 뿌리와 꽃에 향기를 잔뜩 품고 있다. 여름 산길을 걷다가 칡꽃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도 크다.

꽃들의향기 2014.07.12

광주 금봉산

예년 같으면 장마 기간이지만 기다리는 빗줄기는 행방불명이다. 장기 예보를 봐도 앞으로 열흘 안에는 비 소식이 없다. 기상 변화가 하수상하니 장마라는 말도 이젠 소멸되어 가는 것 같다. 태풍은 일본 내륙을 관통해 지나가고 한반도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하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아내와 인근에 있는 금봉산에 올랐다. 금봉산은 경기도 광주시의 팔당호를 끼고 있는 높이 233m의 야트막한 산이다. 날씨 탓인지, 너무 오랜만에 산에 올라선지, 2백 미터급 산을 오르는데도 무척 힘들었다. 들머리는 분원리 백자자료관이다. 자료관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이 길은 금봉산 외에 해협산 등 다른 산들과도 연결된다. 분원리를 중심에 두고 산줄기를 따라 한 바퀴 돌 수도 있다. 산길이 순해서 산책 코스로 적당하다. 정상에서..

사진속일상 2014.07.11

깨알 같은 잘못 / 이창숙

졸업이구나, 너희들과 헤어지게 되어 아쉽다. 선생님, 그동안 우리들이 속 썩여서 미안해요. 너희들이 속은 무슨 속을 썩여. 그냥 말 좀 안 듣고, 숙제 안 해 오고, 귀청 떨어지게 떠들고, 쌈박질 좀 하고, 수업 시간에 뛰쳐나가고, 음, 와장창 유리창 깨고, 다른 선생님한테 걸려서 귀 잡혀 들어오고, 꼬박꼬박 대들고, 봄날 병아리들처럼 비실비실 졸고, 욕 좀 하고, 몰래 침 뱉고, 무릎 까져서 피 질질 흘리고, 음음, 높은 곳에서 떨어져 간 떨어지게 하고, 입 아프게 설명해도 단체로 멍 때리고, 저번에는 참, 다섯 분이 한꺼번에 땡땡이도 치셨지? 아무튼, 그런 일들밖에 없었는걸 뭐. 그러네요. 헤헤헤헤 히히히히 - 깨알 같은 잘못 / 이창숙 동시의 대상이 아이들이다 보니 학교 소재가 많다. 어떻게 하면 ..

시읽는기쁨 2014.07.10

논어[91]

번지가 지혜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백성들의 옳은 사람 노릇에 철저하며, 귀신은 공경할 뿐 이를 멀리하면 슬기롭다 하겠지." 사람 구실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 구실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은 도맡고, 이익은 남에게 돌리니, 그러면 사람답다고 할 수 있겠지."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 先難而後獲 可謂仁矣 - 雍也 17 지(知)와 인(仁)에 대한 공자의 답변이다. 물론 제자 번지에 해당하는 맞춤 대답일 것이다. 공자의 말을 분석해 보면 제자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다. '귀신을 공경할 뿐 멀리하면 슬기롭다'는 말은 공자의 현실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되 허무맹랑한 미신은 배격해야 한..

삶의나침반 2014.07.09

행복의 역습

미국 의사가 쓴 이 시대를 경고하는 책이다. 원제는 '인공행복(Artificial Happiness)'이다. 지은이는 정신작용 약물, 대체의학, 운동요법 등으로 주어지는 인공행복에 대한 맹목적 추구를 비판한다. 그러한 행복 찾기는 인간을 현실에서 유리시키고 진실을 무시하거나 회피하게 만든다. 인공행복은 삶은 비참한데 약물 등의 도움을 받아 마음만은 행복을 느끼는 상태다. 불행은 사라졌지만 불행의 원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공행복의 특징은 삶을 부정하는 힘이다. 인공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은 비참한 삶도 비참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다지 고통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아무리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은 여전히 유쾌하다. 이들은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지만, 그러한 삶의 경험이 깊은 내면을 관통..

읽고본느낌 2014.07.08

부모 된 죄

짐승과 달리 인간 부모는 평생을 자식 지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혼시키고 내보내도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노후의 가장 큰 적은 자식'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자식 나이 스물을 넘기면 어엿한 성인이 되었건만 부모 덕 보지 않고 독립하려는 젊은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뼈 빠지게 가르치고, 결혼시키고, 집 장만해 주고, 손주 봐주고, 허리가 꼬부랑이 되도록 뒷바라지하다가 재수 없으면 자식 사업 자금 대주느라 노후 자산까지 말아먹기도 한다. 드물지 않게 보는 경우다. 자식은 결혼시켰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도리어 시작이다. 이는 시대적 상황 외에 부모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자식을 그렇게 키워 왔으니 말이다. 손주 봐주고 자식 보살피는 일에서 노년의 즐거움을 찾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특별하게 그런 사..

길위의단상 2014.07.07

Z교시 / 신민규

식물은 뿌리, 줄기, 잎, 꽃, 열매로 이뤄져 있다 뿌리는 식물체를 지지하고 물과 양분을 꾸벅한다 줄기는 꾸벅을 지탱하고 물과 꾸벅이 이동하는 꾸벅 잎은 꾸벅을 이용하여 꾸벅을 꾸벅 꾸벅은 꾸벅과 꾸벅이 꾸벅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신민규 뒤로 나가! 번쩍 - Z교시 / 신민규 재미있는 동시다. 흔한 교실의 한 장면이 이렇게도 시가 만들어지는구나. 초등학교 과학 시간인 것 같다. 따분한 설명에 꾸벅이 시작된다. 선생님의 설명과 학생의 꾸벅이 섞이더니 이내 전세가 역전된다. "신민규 뒤로 나가! 번쩍", 결말 부분도 반짝인다. 이 시를 유머러스하게 만드는 데는 제목도 한몫을 하고 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금방 무릎을 쳤다. 평범하게 '꾸벅'으로 붙였다면 맛이 덜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4.07.05

논어[90]

선생님 말씀하시다. "중 이상이 되는 사람에게는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중 이하의 사람에게는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子曰 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 雍也 16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생각난다. 무지를 깨우치는 스승의 역할은 아이가 나오는 걸 도와주는 산파와 비슷하다. 아이를 배지도 않았는데 낳게 할 수는 없다. 공자 말씀도 비슷하다. 교육에 임하는 피교육자의 자세나 자질이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말을 강가까지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책상 앞에 붙들어 놓는다고 교육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 현장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이를 실감한다. 학생의 자질이나 열성과 교사의 인도가 맞아 떨어질 때 교육의 결실이 맺힌다. 이상적인 스승과 제..

삶의나침반 2014.07.04

무지개와 만나다

경안천에 산책을 나갔다가 비를 만났다. 재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옹색하게 비를 피하고 있는데 한참 후 먹구름이 흩어지며 동쪽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다. 무지개를 본 게 도무지 얼마나 전인지 까마득했다. 그동안 하늘과 담을 쌓고 산 탓일 게다. 무지개가 사라지기까지 20분 정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라", 무지개는 누구나 시인이 되게 하고 아득한 그리움에 젖게 한다. 저 아치는 세파에 찌든 마음을 동심과 이어주는 다리일 것이다. 아쉬운 대로 스마트폰 덕분에 경탄하며 바라보았던 무지개를 담을 수 있었다.

사진속일상 2014.07.03

행복한 부부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행복한 가정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결혼 3년차라는데 요즘에 이런 젊은이들도 있구나, 무척 경이로웠다. 참 건실한 선남선녀라고 생각하기에 내용을 소개한다. 행복한 부부의 7가지 비밀 1. 부부끼리 존댓말을 쓴다. 우리 부부는 존댓말을 쓴다. 연애 때부터 서로 존댓말을 써왔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고, 서로 말다툼을 하더라도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반말을 종종 하기도 하는데, 만약 평소에 반말을 했더라면 싸울 때는 더 험한 말이 오고가지 않았을까? - 나도 아내와 존댓말을 쓰고 싶은데 아직까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몇 번 노력해 보았지만 이젠 포기 단계, 이 젊은 부부가 정말..

참살이의꿈 2014.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