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 31

밤 줍다

올해는 가을 열매가 풍년이다. 산에 들면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비 오듯 후두둑 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주워가도 화수분을 연 듯 금새 새 도토리로 덮인다. 뒷산에서 밤을 주웠다. 길에 떨어진 밤을 줍다가 점점 안으로 이끌려갔다. 사람이 여러 차례 훑고 갔을 텐데 새로 떨어진 밤이 이만 했다. 이른 아침에 가서 작정하고 줍는다면 며칠 새 한 가마니는 채울 것 같다. 어느 해는 빈곤하고 어느 해는 이렇듯 풍요롭다. 고향집 과실나무를 봐도 잘 되는 해가 있고 그렇지 못한 해가 있다. 인간의 계량만으로는 예측이 안 되는 자연의 원리가 숨어 있을 것이다. 집에서 조금씩 구워먹고 있는데 밤알이 잘아서 품이 많이 든다. 시장에서 파는 밤 한 되가 1천 원밖에 안 간다고 한다. 먹는 재미보다는 줍는 재미가 더 낫다.

사진속일상 2014.09.29

감성에 물주기

늙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들라면, 건강한 무릎 연골과 살아 있는 감성이라고 답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자주 꼽는 돈과 친구도 필요하지만, 나에게는 연골과 감성의 뒷순위다. 돈은 생존하기에 적당한 양만 있으면 되고, 친구가 없으면 혼자서도 잘 놀 줄 알면 된다. 중요한 건 세상을 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인 감성이다. 는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다. '일상기록공작가'로 자처하는 공혜진 님이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비결 100가지를 보여준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우리 삶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랗게 나선형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제와 같은 패턴을 그리는 듯하지만, 어제 그려진 원과는 결코 만나지 않는 나선형이다. 그래서 오늘 ..

읽고본느낌 2014.09.29

도시에서 산다는 것

앞집이 이사 온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다. 서로 현관문을 마주하고 있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벨을 누를 수도 없다. 현관 앞 복도에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가 있는 걸로 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집인 것 같다. 아파트에서의 삶이 너무 삭막하다. 서로 간섭 안 하는 익명성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여기가 사람 사는 동네가 맞나 싶다. 우리 아파트는 한 층에 네 가구가 사는데 입주한 지 4년이 되어 가지만 어느 집과도 정식으로 인사하지 못했다. 어쩌다 마주치면 어색한 눈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나마 윗집과는 몇 번 오갔는데 슬프게도 소음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도 얼굴이 익다고 이젠 밖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

참살이의꿈 2014.09.28

코스모스(3)

코스모스만큼 향수에 젖게 하는 꽃도 없다. 가을 하면 의례 코스모스가 떠오를 정도로 우리나라 어디에나 코스모스가 만발했다. 눈을 감으면 미루나무 도열한 신작로를 따라 바람에 하늘거리던 코스모스가 떠오른다. 깔깔거리는 아이들 웃음소리는 맑고 푸른 하늘로 퍼져 올랐다. 코스모스는 '살사리꽃'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있다. 북한에서는 '길국화'라고 부른다. 좋은 이름이지만 코스모스라고 할 때의 정감은 살아나지 않는다. 가을이라는 계절과 아주 잘 어울리는 꽃, 청초한 아가씨를 닮은 코스모스다.

꽃들의향기 2014.09.27

사람들끼리만 / 백무산

할머니께서 밭에 콩을 심으실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어 날짐승 들짐승 몫도 챙기셨다고요? 그래요, 그건 이야기 시절의 이야기지요 할머니 가신 뒤의 배곯은 산꿩이 내려와 세 알 다 쪼아먹고 멧돼지가 와서 밭을 통째 뒤집고 메뚜기가 떼로 덤비고 까치가 떼로 날고 깔따구와 여치가 떼로 습격하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한 일과 사람들이 싹쓸이로 한 일을 저들은 거꾸로 그렇게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엔 그들도 함께 둘러앉을 자리가 있었습니다 두꺼비도 까치도 온갖 미물들도 둘러앉고 산신도 용왕도 집안의 업의 눈치도 살피고 짐승들이 들을까 알곡들이 삐칠까 나무가 속상해할까 소곤소곤 입조심 하느라 이야기 속에 그들 자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가신 뒤로 세상의 이야기는 사람끼리만 사람의 말로만 떠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은 이야..

시읽는기쁨 2014.09.26

논어[104]

선생님 말씀하시다. "진리에 뜻을 두고, 곧은 마음을 간직하고, 사람답도록 애쓰며, 예술을 즐겨야 하느니라."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 述而 6 참된 인간이 되는 지침이라 할 수 있다. 도(道)와 덕(德)은 바른 마음, 인(仁)은 바른 행위, 예(藝)는 인생을 즐기는 지혜가 아닐까. 특히 주목되는 건 예(禮)가 아닌 예(藝)다. 유어예(游於藝), 예술을 즐겨라! 공자의 말씀이니 더 반갑다. 예는 인문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제반 활동을 말하는 것이리라. 음악, 운동, 서예 같은 취미 생활을 포함해서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것이 예다. 참사람이 된다는 건 결국 삶을 예술처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삶의나침반 2014.09.24

에버랜드에서 놀다

기분전환을 위해 아내와 에버랜드에 놀러 갔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연간 회원권을 끊고 자주 다닌 곳인데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때는 에버랜드가 아니라 '자연농원'이라 불렀다. 한글이 영어로 바뀔 만한 한 세대의 시간이 흘렀고,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추억의 장소를 다시 찾았다. 앞으로는 손주를 데리고 갈 일이 자주 있을 것 같다. 옛 모습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모를 정도로 내부는 상당히 달라졌다. 그런데 평일이라 조용하길 바랐는데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인기 있는 구경거리는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해서 아예 포기했다. 휴일이면 어떨까 싶어 고개가 저어졌다. 북적거리는 걸 싫어해서는 아무래도 동심을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사파리 투어는 예전이..

사진속일상 2014.09.23

월악산 까실쑥부쟁이

월악산을 오를 때 높은 곳 바위 틈에서 까실쑥부쟁이가 많이 보였다. 어느 곳에서 보는 까실쑥부쟁이보다 색깔이 선명하고 맑았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자라는 환경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다. '까실'은 쑥부쟁이 중에서도 잎이 까실까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쑥부쟁이 종류만 10여 종인데 서로 구별하는 건 어렵다. 다른 꽃과 쑥부쟁이를 구분해 낼 수만 있어도 대단하다. 쑥부쟁이는 무척 생명력이 강하고 서민적인 분위기가 나는, 우리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다.

꽃들의향기 2014.09.22

가슴 따스한

대안 미디어 '너머'에 재미있는 내용이 실렸다. '거리의 인문학자'라 불리는 최준영 님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22명의 정치인에 대해 짧은 평을 한 것이다. 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인물 품평이 중국 전통이었다고 한다. 공자도 자신의 문하생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간명한 말로 평가했다. "자로는 과감하다", "자공은 사리에 통달했다", "염유는 재주가 많다" 등이다. 문학적으로 멋진 건 루쉰의 천두슈(陳獨秀)와 후스(胡適)에 대한 비교 품평이다. "두 사람의 도략을 창고에 비유한다면, 천두슈는 창고 앞에 '안에 무기가 가득 들어 있으니 조심하시오!'라고 쓴 깃발을 꽂아놓은 것 같다. 그러나 깃발과 달리, 막상 문을 열어보면 총 몇 자루에 칼 몇 자루가 전부라 사람을 허탈하게 만든다. 후스는 꼭꼭 걸어 잠..

길위의단상 2014.09.21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철수와 영희는 부부다 -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세월은 모든 것을 낡고 시들게 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철수와 영희로 되어 간다. 부럽게 바라보는 창식이와 숙자도 있다. 늙으면 다 어린이로 돌..

시읽는기쁨 2014.09.20

논어[103]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정말 늙어 버렸나 보다! 오래도록 나는 주공을 다시는 꿈에 보지 못하니...." 子曰 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現周公 - 述而 5 육체의 노쇠보다 이상이 사라지는 게 더 안타깝다. 흠모하는 주공을 꿈에서 볼 수 없다는 것에서, 공자는 자신이 늙어가고 열정도 사그라지는 걸 느낀 것 같다. 열심히 고군분투했지만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적 완성의 길도 멀다. 공자의 회한은 스케일의 크기를 떠나 대부분의 사람이 공유하는 느낌일 것이다. 공자의 이상이 고작 주공을 닮는 것이었느냐는 의문도 들지만 지금 시각에서의 판단일 뿐, 당시는 2,500년 전이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국가나 인물 대부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주례(周禮)를 회복하고픈 공자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삶의나침반 2014.09.19

세월호

4월 16일은 온 나라를 슬픔에 잠기고 분노에 떨게 했다.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묻고 나라를 혁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난 지금,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유족들이 요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하나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나서서 해경을 해체하는 등 국가 개혁안을 발표했지만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중요한 건 잘못된 국가 체제를 뜯어고치는 것인데 곁다리로만 변죽을 울리고 정작 핵심은 회피하고 있다. 엉뚱한 한 사람을 잡는다고 헛발질만 하면서 국민의 관심을 교묘하게 따돌린 꼴이 되었다. 이젠 세월호 피로증까지 언급하니 세상 변화에 대한 기대는 물 건너갔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줄을 서서 분향소를 참배하며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냄비 근성이라고 우리 국..

참살이의꿈 2014.09.18

산구절초

화악산을 오를 때 천 미터 이상 되는 곳부터 구절초가 나타났다. 구절초 종류 중에서도 높은 산에서 자라는 산구절초다. 평지에서 보는 구절초보다 키가 작고 잎이 많이 갈라져 있다. 그래서 가는잎구절초라고도 부른다. 높은 지대에서 자라기 때문에 개화 시기가 빠르다. 8월에 이미 꽃이 활짝 핀다. 월악산 정상 부근에서도 이 산구절초를 많이 볼 수 있었다. 가을은 높은 데서부터 발 빠르게 내려오고 있다.

꽃들의향기 2014.09.17

엔딩 노트

회사원으로 열심히 살았던 주인공은 정년퇴임을 하자마자 위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다른 장기로 암세포가 전이되어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주인공은 갑자기 닥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세상과의 이별 의식을 준비한다. '엔딩 노트'는 막내딸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찍어서 만든 '아빠의 해피엔드 스토리' 영화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누구나 죽지만 죽음을 맞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영화의 주인공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안달하지 않는다. 장례식 준비도 직접 챙기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서 가족의 사랑을 재확인한다. 특히 손녀들과는 최대한 많이 놀아주려 한다. 눈물보다 웃음이 더 많다. 죽음은 '엔딩'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가는 '오프닝' 같다. ..

읽고본느낌 2014.09.16

알몸 노래 /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 알몸 사랑 / 문정희 화끈한 사랑의 시인이다. 문정희 시인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정열의 여인인 것 같다. 대부분의 시가 원초적 생명력으로 약동한다. 한여름의 태양 아래 풍만한 육체의 건강한 나부를 보는 것 같다. 아름다운 어른은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외친다. 시인에게 시들어가는 나이는 없다. 그런 사랑을 나는 감당할 수 ..

시읽는기쁨 2014.09.15

논어[102]

선생님이 집에 계실 때는 고분고분하시고, 부드러우셨다.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 述而 4 공자의 면모를 다시 보게 된다. 밖에서는 엄격하고 위엄있게 행동했더라도, 집에 들어와서는 자상하고 안색이 활짝 피셨다는 얘기다. 보통 남자라면 반대가 아닐까? 나를 돌아보더라도 부끄럽다. 가정은 화평(和平)의 기운으로 밝아야 한다. "집에 계실 때에는 고분고분하시고 부드러우셨다." 남녀를 불문하고 꼭 새겨둘 행동이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이런 데서 드러난다.

삶의나침반 2014.09.14

월악산에 오르다

고향에 다닐 때마다 옆으로 지나가며 바라보기만 했던 월악산을 드디어 올랐다. 좁은 땅덩어리인데 가보지 못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100 명산을 오르기로 느슨한 약속을 했는데 아직 64 산이나 남았다. 노년의 행복은 무릎 연골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아직은 든든한 두 다리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차를 끌고 갔으므로 동창교가 들머리 및 날머리가 되었다. 동창교 코스는 월악산에 오르는 짧은 길이지만 대신 급경사가 길었다. 더구나 대부분이 돌길이었다. 올라갈 때보다 오히려 내려갈 때 조심해야 했다. 정상이 1,097m인데 힘들기는 1,500m급 산을 오른 것과 비슷했다. 시간 여유가 많다면 피하고 싶은 길이다. 월악산(月岳山)은 삼국 시대에 영봉 위로 떠오르는 달이 무척 아름다워 월형산(月兄山)으로 불렸..

사진속일상 2014.09.12

성질머리하고는

참 묘하다. 나이가 들면 성격이 원만하고 부드러워질 것 같은데 안 그렇다. 도리어 까탈이 심하고 화를 잘 낸다. 나와 생각이 다른 걸 용납하지 못한다. 냇가의 돌도 세월이 흐르면 동글동글해지는 데 나는 반대다. 돌만도 못하니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내 단점은 참을성이 없고 욱하는 성질이다. 느긋하게 기다리지를 못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속에서 조바심이 나고 화가 치솟는다. 이것 때문에 음식점에서 종업원에게 싫은 소리도 자주 한다. 몇 분을 참지 못하고 금방 후회할 짓을 한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주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가 심해진다는 데 있다. 마음 수양을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소갈머리가 좁쌀만 하다. 아내는 말한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도 닦는 흉내..

길위의단상 2014.09.11

쏘주 한 잔 합시다

선 굵은 남성적인 글을 쓰는 유용주 님의 산문집이다. 치열하게 삶을 사시는 분답게 글에서도 불꽃 같은 뜨거움이 느껴진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온갖 궂은 일터를 전전한 경험이 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속에는 따스하고 섬세한 감성이 살아 숨 쉰다. 입담 좋은 분답게 글도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힌다. 체험에서 나온 글은 힘이 있다. 삶과 싸움을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의 차이다. 나 같은 백면서생은 이런 분이 무척 존경스럽다. 수많은 전투를 치러낸 백전노장의 위엄 앞에서 주눅이 든다. 더구나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슬픔과 분노를 안으로 쌓아야 내공이 생긴다. 지은이에게는 삶 자체가 문학이다. 전에 나왔던 산문집 의 첫머리가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로 시작된다. 는 전작의 연장이..

읽고본느낌 2014.09.10

야탑동 느티나무

서울에 오갈 때면 이용하는 전철역이 야탑역이다. 역 광장에 사람들의 쉼터로 이용되는 느티나무가 있다. 분당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시골 마을의 정자나무였을 것이다. 다행히 안내문에 이 나무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원래 이 자리에 큰 전나무가 있었는데 바람에 쓰러져 죽자 당시 오야소 주민들이 인근 심의진 묘에 있던 느티나무를 옮겨 심었고, 이후 재난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정자목으로 삼았다는 사연이다. 현재 야탑동이라는 지명은 일제에 의해 명명된 것이고, 본래 마을 이름은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야소(梧野所)였다고 한다. 오동나무가 많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오야소의 '야'자와 부근 탑골의 '탑'자를 따서 야탑동이 되었다. 야탑보다는 오야소라는 이름이 훨씬 멋지게 들린다. 도심 빌딩에 갇혀 답답해 보이기는 하지..

천년의나무 2014.09.09

추석 산행

집에 일이 생겨 추석인데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지난주에 미리 성묘하고 어머니에게도 다녀왔다. 추석 차례를 거른 건 20년 전에 독일 연수를 가 있을 때를 빼고는 처음이다. 한가윗날 아침 식탁에는 아이들이 출가하기 전처럼 넷이 오붓하게 앉았다. 그러나 밝게 웃을 수만은 없는 분위기였다. 아침을 먹고는 혼자 배낭을 꾸려 남한산성으로 갔다. 차는 은고개에 주차하고 남한산성 한봉을 돌아오는 라운드 산행이었는데, 쓸쓸하고 외로운 심정으로 걷는 산길이었다. 산객 서너 명 정도만 만났다. 한 분은 지나치며 "명절이라 전부 고향 찾아가고 사람이 없네요"라며 씁쓰레 웃었다. 갈림길 쉼터에서는 바람이 시원했고, 동쪽으로는 유난히 하늘이 파랬다. 비틀린 자세로 서 있는 서어나무가 멋있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

사진속일상 2014.09.08

논어[101]

선생님 말씀하시다. "인격도 닦지 못하고 학문도 부실하며 옳은 일을 듣고도 행하지 못하고, 흠집을 고치지도 못하니, 그게 내 걱정이야." 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 述而 3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는 공자의 걱정이면서 우리 모두의 걱정이다. 공부의 목적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인데 완성의 길은 멀다. 공자를 완전한 인격을 갖춘 성인(聖人)으로 보는 건 오해다. 그분 역시 인간의 한계에 대해 절망하고 근심했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닦고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애쓰는 호학정신(好學精神)에서 공자는 모범이 되는 분이다. 걱정한다는 건 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성찰하며 노력한다는 뜻이다. 흠집 하나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좋은 천성을 지키는 ..

삶의나침반 2014.09.08

빵집 / 이면우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씌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 빵집 / 이면우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시내 초입에 타이어 가게가 있다.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 멈추는 곳인데, 가게에 적힌 문구 하나가 늘 눈길을 끈다. "아기 우유값만 남기고 드립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짠해서 쳐다볼 수 없었다. 자주 보니 조금은 덤덤해졌으나 밥벌이의 엄숙함..

시읽는기쁨 2014.09.07

화악산 금강초롱

나에게 금강초롱은 꼭 보고 싶은 야생화 목록 일순위에 올라 있던 꽃이다. 금강초롱을 보기 위해 화악산을 찾았을 때는 혹 헛걸음을 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만큼 귀한 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금강초롱과 만났다. 산속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이 등산로 옆에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그동안 금강초롱의 보호와 번식이 많이 이루어져 개체수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금강초롱은 사진에서 보던 대로 청초하고 품위가 있었다. 초롱불을 매단 듯 산이 환했다. '금강'이라는 이름은 1900년대 초에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에서도 고귀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유종인 금강초롱의 학명이 'Hanabusaya asiatica Nakai'다. 'Hanabusaya'나 'Nakai'는 모두 ..

꽃들의향기 2014.09.06

화악산 꽃산행

화악산(華岳山)은 높이 1,468m로 경기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신선봉, 중봉, 응봉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대부분 출입금지다. 그중 중봉은 옹색하긴 하지만 정상에 설 수 있다. 금강초롱을 보기 위해 화악산을 찾아간 길에 중봉까지 오르기로 했다. 들머리는 중봉에 오르기 쉬운 화악터널로 잡았다. 중봉까지 군사용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단점은 시멘트길을 오래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은 금강초롱이 목적이었으므로 길은 무시하기로 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금강초롱 군락지를 여러 번 만났기 때문이다. 한두 개체만 봐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금강초롱이 이렇게 많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금강초롱 외에도 많은 여름꽃이 있었다. 화악산은 '화악'이라는 말 그대로 꽃과 바위산이었다. 화악터..

사진속일상 2014.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