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 31

계서당 소나무

봉화 물야에 있는 계서당(溪西堂)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인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선생이 살던 집으로 광해군 5년(1613)에 지어졌다. 선생은 인조 5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요직을 거치면서 4차례 암행어사로 파견되었고, 진주목사 등 5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근검 청빈한 생활로 이름이 높았던 분이다. 성이성 선생이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라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남원부사를 지낸 아버지를 따라 10대 중반에는 남원에서 살기도 했다. 계서당 뒤에 옆으로 기울어진 소나무가 있다. 안내문에는 수령이 500년이고 성이성 선생이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그만큼 연륜이 깊어 보이지는 않는다. 쓰러질 듯 계서당 쪽으로 누워서 지지대에 의지해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천년의나무 2014.11.30

인간, 우리는 누구인가?

이런 종류의 책은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얼마나 맛있게 요리를 하느냐에 읽는 재미가 결정된다. 지은이의 손맛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에 관한 획기적인 발상이 나오기 어려운 시점에서 발굴된 화석과 자료를 가지고 흥미 있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헤닝 엥겔른(Henning Engeln)이 쓴 는 인간의 기원에서 미래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친절한 설명서다. 따라서 책 역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7백만 년 전에 유인원에서 갈라져서 진화하고 전 세계에 걸쳐 분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인류 발생사의 마지막 장면은 유전학, 언어학, 고고학의 조사 결과로 이젠 분명해졌다...

읽고본느낌 2014.11.29

분노 사회

며칠 전 일이다. 집 앞 도로에서 좌회전 신호가 끝날 때쯤에 느릿느릿 좌회전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차선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서 창문을 열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왜 날 보고 그러는지 어리둥절했다. 집 앞의 워낙 한가한 도로라 그 차와 내 차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상시에는 황색등만 점멸하다가 출퇴근 때에만 잠시 신호등이 들어오는 도로다. 요지는 내가 신호를 어기고 좌회전을 해서 자기 갈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충돌 위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차는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였다. 설사 잘못을 했더라도 그렇게까지 쌍욕을 들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길거리에 나가 보면 이런 상황을 비일비재하게 겪는다. 사람들이 전부 시한폭탄을 달고 사는 것 같다. 불만과 분노로 가득하다. 어른은 말할 ..

참살이의꿈 2014.11.28

서벽리 느티나무

독립 의병 활동과 관계된 느티나무다. 1908년(순종 2년) 5월 18일, 변학기 외 300 의병은 이곳 30여 그루 느티나무를 은신처로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에게 화승총 공격을 가하여 40여 명을 생포하고 나머지는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뒤에 일본 헌병대는 자신들이 참패하였던 쓰라린 경험을 지우기 위해 느티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으나, 성황당에 붙어 있던 한 그루는 신목이라 하여 반쪽만 끊어가고 나머지는 남겨둔 게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서벽초등학교 구내에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된다.

천년의나무 2014.11.27

논어[115]

선생님은 기괴한 것, 폭력, 반란, 귀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子不語怪力亂神 - 述而 17 공자는 시(詩), 서(書), 예(禮)에 대해서는 늘 이야기했다는 구절이 앞에 나온다. 반대로 공자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괴(怪), 력(力), 난(亂), 신(神)이었다. 이것은 당시 세상을 어지럽히던 것으로, 공자는 이를 부정하고 극복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네 가지 중에서 신(神)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영어 번역을 찾아보니 'spiritual beings'로 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공자는 절대자를 믿는다는 의미에서의 종교인은 아니었다. 형이상학이나 초월 세계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제례 의식을 가지고 유교(儒敎)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뒷날 유학의 이기론도 공자..

삶의나침반 2014.11.27

석현리 소나무

수령이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수형이 무척 단정한 나무다. 높이는 14m, 줄기 둘레는 3m다. 춘양면 석현리 마을을 굽어보는 산자락에 있다. 개인 소유지만 오래전부터 마을 당나무로 지정되어 주민들이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나무 위치가 마을 전체에 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나무 둘레에는 벤치가 여럿 놓여 있어 주민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된다.

천년의나무 2014.11.26

시인 공화국 / 박두진

가을 하늘 트이듯 그곳에도 저렇게 얼마든지 짙푸르게 하늘이 높아 있고 따사롭고 싱그러이 소리내어 사락사락 햇볕이 쏟아지고 능금들이 자꾸 익고 꽃목들 흔들리고 벌이 와서 작업하고 바람결 슬슬 슬슬 금빛 바람 와서 불면 우리들이 이룩하는 시의 공화국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라도 좋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하늘로 스스로의 하늘을 스스로가 이게 하면 진실로 그것 눈부시게 찬란한 시인의 나라 우리들의 영토는 어디에라도 좋다. 새푸르고 싱싱한 그 바다.... 지즐대는 파도소리 파도로써 돌리운 먼 또는 가까운 알맞은 어디쯤의 시인들의 나라 공화국의 시민들은 시인들이다. 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이 안다. 진실로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도 시인들의 마음은 시인들만이 있다. 가난하고 수줍은 수정처럼 고독한 갈대처럼 무력..

시읽는기쁨 2014.11.26

한수정 느티나무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한수정(寒水亭)이 있다. 중종 때 문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권벌(1478~1548)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뜻으로 '한수정'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운곡천과 이웃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수정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년이 되었다. 줄기 아랫부분만 남아 있어 기형적인 모양을 한 괴목이다.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 묘하게 흙담이 나무를 지나가서 다시 한 번 바라보게 한다.

천년의나무 2014.11.25

늦가을 고향집

김장을 하러 고향에 내려가서 닷새를 머물렀다. 가을이 저물수록 풍요의 빛은 사그라지고 저녁 어스름 기운이 마을에 스며든다. 이 계절을 좋아하긴 하지만 무대가 고향이 되는 건 싫다. 너무 쓸쓸하다. 고향 마을에도 가을 김장을 하는 집이 얼마 안 된다.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자식들도 힘들게 내려오지 않으려 한다. 몇 만 원만 주면 절인 배추를 배달해주는 세상인데 굳이 시골까지 내려가 김장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고향에서의 김장은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내년에 어머니가 또 배추를 심으신다면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형제가 모여 함께 김장을 하는 의식에는 김장통 몇 개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일 년 농사가 자식들 차에 바리바리 실린다. 아직은 어머니가 건강해서 고맙고, 이..

사진속일상 2014.11.25

스마트폰으로 글쓰기

김장을 하기 위해 고향집에 내려와 있다. 어제 배추를 절여놓고 오늘 네 집치 김장을 한다. 작년에 비해 양이 확 줄었다. 어제 저녁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금일봉을 하사해서 맛난 한정식으로 식사를 했다. 인생이 서글프다는 말씀을 자주 해서 마음이 짠했다. 힘든 고향에서의 김장을 올해를 끝으로 그만 두려 했는데 어머니가 계시는 동안은 안 될 것 같다. 지팡이를 짚고 찾아온 이웃집 할머니는 가족이 모여 김장하는 모습을 부러워한다. 몇 년 전만해도 그 집 역시 김장철이 되면 북적북적했다. 해가 저무는 건 한순간이다. 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담그는 것도 앞으로 몇 해 더 허락되어 있을지 생각해 보면 나도 서글퍼진다. 어머니에게 김장은 김장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스마트폰이 있으니 이렇게 전화기로 글쓰기도 해본다..

길위의단상 2014.11.22

높고 푸른 사다리

가톨릭 수도원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난 이런 종교소설이 좋다. 홀딱 빠져서 이틀 밤새에 다 읽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 곳이다. 흥미 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고, 영혼의 고뇌나 신의 섭리에 대한 이야기는 고금을 불문하고 소설의 주제로 알맞다. 소설에서 감동적인 부분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토머스 수사가 죽음을 앞두고 요한 수사에게 유언처럼 전해주는 내용이다. 토머스 수사는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으로 1941년에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원산 가까운 덕원에 소재한 수도원이었다. 선교와 봉사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고 탈출하지 못하고 공산당 치하에 남게 된다. 그리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생활을 하며 신앙의 힘으로 버텨 낸다. 인간은 고난 앞에서 무릎 꿇..

읽고본느낌 2014.11.20

논어[114]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즐겨 깍듯이 배운 사람이지."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 述而 16 나면서부터 알 정도로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공자 스스로 말한다. 다만 열심히 배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열정이 '민(敏)'이라는 단어에 잘 나타나 있다. 앎에 대한 갈증이 공자를 만들었다는 건, 호학(好學)에서는 자신을 따를 자가 없을 것이라는 공자 자신의 자부심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노력해도 안 되는 아둔한 사람도 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 사람이 있고, 하나도 못 깨치는 사람도 있다. 비록 태어나면서부터 알지는 않았다 해도 앎에 대한 자질은 뛰어난 분이 공자였다. 애쓴다고 누구나 공자 같이 되는 건 아니다. 공자도 그걸 부정하지는 않..

삶의나침반 2014.11.20

오므린 것들 / 유홍준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 있다 - 오므린 것들 / 유홍준 이 시를 읽으며 맨 처음 연상된 것이 고향 마을이었다. 집들이 산자락에 앉은 모양새가 바로 오므린 것이었구나. 오므린 것은 단순한 형상만 ..

시읽는기쁨 2014.11.18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선생의 글은 강력한 생태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환경 근본주의자로 오해받게 생겼다. 시장과 함께 세금과 국가가 작아져야 하고 궁극에는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는 점에서 선생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 문명의 병폐가 땜질 처방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생각할 때 근본을 도려내는 외과수술을 해야 한다는 선생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선생의 비판에는 소위 진보라 불리는 사람들도 예외가 없다. 한때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제도정치권이나 시민운동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사람들 대부분이 선생의 관점에서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다. 이 책 의 제1부 '꼴불견 세상'에서는 구체적으로 김지하, 박원순, 고은, 유홍준, 노무현 등이 거론된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 얼마 전에 ..

읽고본느낌 2014.11.17

고불산과 망덕산 일주

집 가까이에 산길 걷는 일주 코스가 있다.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다. 짧게 다녀올 때는 뒷산을 오르지만, 여유 있게 하루를 보낼 때는 이 일주 코스를 걷는다. 때에 따라 중간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오늘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았다. 서울에서 좀 떨어져 있다고 한적한 것이 이 길의 장점이다. 평일에는 다섯 시간 동안 한 사람도 못 만날 때가 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인지 가끔 사람 소리를 들었다. 이 정도라면 사람 소리도 반갑다. 내 나름으로 이 길을 '고독한 산보자의 길'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서 걷기에는 최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스럽다. 머리를 텅 비우고 걸으면 내 마음은 뭔가의 충만함으로 들뜬다. 세상의 잡스러운 것 고요해진다. 그런 느낌이 참 좋은 길이다..

사진속일상 2014.11.16

논어[113]

섭공이 자로더러 선생님의 일을 물은 즉, 자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너는 왜 '그 사람된 품이 한 번 열이 나면 끼니도 잊고, 즐거움에 취하여 걱정도 잊고, 늙는 줄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냐!" 葉公問 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 述而 15 자로만큼 공자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섭공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알려주기 싫어서 말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공자의 반응이 재미있다. 자신이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공자의 자기평가인 셈이다. 이 말을 들으면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공자의 모습이 보인다. '발분(發憤)'이라는 표현이 특히 그렇다. 끼니..

삶의나침반 2014.11.15

속물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한 여인네가 하는 얘기를 들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래서 내 첫사랑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죠. 정말 응답이 왔어요. 어느 날 도로를 달리는데 그 사람이 우연히 눈에 띈 거예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너무 반가웠어요. 거의 30년 만이죠. 한눈에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물론 그 사람은 날 보지 못했어요. 서로 다른 차에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가 남양주 IC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퇴근시간이었어요. 그가 남양주에 사는 게 틀림없어 보였어요.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내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거예요. 만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졌어요. 그 나이에 남양주에 살 정도면 어떻겠어요?" 여러 사람 앞에서 이런 식으로 당당히 말하는..

길위의단상 2014.11.14

첫 꿈 / 빌리 콜린스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불어오는 밤 잠의 문전에 기대어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서 맨 처음으로 꿈을 꾸었던 사람을, 첫 꿈에서 깨어난 날 아침 그는 얼마나 고요해 보였을까 자음이 생겨나기도 오래전 짐승의 표피를 몸에 두른 사람들이 모닥불 곁에 모여 서서 모음으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는 아마도 슬며서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깊은 곳을 내려다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떻게 가지 않고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단 말인가, 홀로 생각에 잠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돌로 쳐 죽인 뒤에만 만질 수 있었던 짐승의 목에 어떻게 팔을 두를 수 있었던 것일까, 살아 있는 짐승의 숨결을 어찌하여 그리 생생하게 목덜미에 느낄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거기, 한 ..

시읽는기쁨 2014.11.13

인터스텔라

상영 시간 3시간의 대작 SF 영화다. 가슴 두근거리며 봤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황당무계하고 폭력적인 SF와는 차원이 다르다. 과학 이론에 기반을 두면서 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실감 나게 그리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의 인류는 환경 파괴에 의한 재앙에 시달린다. 모래 폭풍이 지표면을 휩쓸고 옥수수 외에는 어떤 작물도 기를 수 없다. 당연히 외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여느 영화의 스토리처럼 외계 행성 찾기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추진된다. 때마침 외계인이 토성 부근에 웜홀을 만들어주었다. 이 웜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탐사대가 파견된다. 우주선이 웜홀로 진입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이다. 웜홀을 통한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리학에서 밝혀졌다. 최초로 웜홀을 시각적으로 ..

읽고본느낌 2014.11.12

우리 동네 미술관

올해 못 본 단풍을 느지막이 우리 동네 미술관에서 보다. 영은미술관, 우리 동네에 있는 유일한 미술관이다. 작품 전시보다는 창작 스튜디오 기능에 중점을 두는 것 같다.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는 좀 거리가 멀다. 영은미술관은 정원이 넓고 예뻐서 찾는다.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있다. 미술관 정원에 흰 공 모양의 작품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사람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형태다. 그런데 제목이 'Moon'이다. 예술가의 눈은 기발하다, 달을 웅크린 사람 형상으로 보다니.... 한참을 보니 마치 알 속에 든 사람 같다. 그럼 달은 생명을 품은 알이란 뜻인가. 달은 지구 어머니가 낳은 알이다. 우리 지구를 형상화한다면 어머니가 어..

사진속일상 2014.11.11

논어[112]

선생님이 늘 이야기하던 것은 시와 역사와 예법이었으니, 이것이 모두 늘 이야기하던 것들이다. 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 述而 14 늘 이야기했다는 건 중요하니까 강조했다는 뜻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교육할 때 무엇에 중점을 뒀는지 알 수 있다. 시[詩]와 역사[書]와 예법[禮]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정(情), 지(知), 의(意), 세 측면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 시는 인간 우뇌의 영역이다. 공자는 시와 노래를 통해 인간을 감동시키고 정화하려 한 것 같다. 시인 백거이도 이렇게 말했다. "사람 마음을 감화시키는 것으로 시만 한 것이 없다[感人心者 莫先乎詩]. 공자가 을 편찬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시의 교육적 기능에 대해서 현대에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꼭 국어 시간에만 배우..

삶의나침반 2014.11.10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배 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유는 엉뚱했다. 해 뜨고 지는 풍경을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가당찮은 얼굴로 보는 것이었다. "야, 일하다 보면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아마 한 달 동안 원양어선에서 생활한다면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할 게 틀림없다.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만 지나도 시들해질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일상이 되면 무감각해진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에 무릎을 쳤다. 대상이 무엇이든 딱 사흘만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 게 있을까. 지루하기만 한 오늘도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이고, 아내의 잔소리마저 꾀꼬리의 지저귐으로 변할 것이..

참살이의꿈 2014.11.09

인간적이다

요사이는 짧고 가벼운 글을 주로 읽는다. 길고 무거운 주제는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를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무려 1천 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호흡이 너무 느려서 이런 소설은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는 소설가 성석제의 짧은 이야기집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한 편이 서너 장 정도밖에 안 되니 콩트에 가깝다. 굳이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고등학교 때 배운 용어로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장에서 팝콘을 먹듯 즐겁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 짧은 글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만나는 것 같다.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일상의 사건들이 모여 소설가의 부엌에서 맛난 음식으로..

읽고본느낌 2014.11.08

남자보다 무거운 잠 / 김해자

꿈이랑가 생시랑가 머시 묵직한 거시 자꼬 눌러싸서 눈 떠본께 글씨, 나, 배, 우에, 올라타 있드랑께 워어메 이거시 먼 일이여, 화들짝 놀라 이눔 새끼를 발로 차버릴라고 했는디 이눔의 나무토막 같은 다리가 말을 안 듣는겨 죙일 서갖꼬 콩콩 프레스를 밟아댄께 참말로 이 다리가 내 다리여 놈의 다리여 이 급살 맞을 놈, 콱 죽여분다 이 신발 밑창 같은 새끼, 겨우 몇 마디 하고 글시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겨버렸나 벼 포옥 한숨 자고 포도시 눈이 떠졌는디 아즉도 꿈이랑가, 워메 그 인사가 아즉도 엎어져 있는겨, 와따 여즉도 안 갔소이, 머시 좋은 거이 있다고 고렇코롬 자빠져 있소, 눈 붙이고 난께 존 말라 타일러집디다이, 낼 일할라믄 질게 자야 쓴께 지발이나 빨리 가랑께요, 근디 이 본드 발른 밑창 같은 작자가..

시읽는기쁨 2014.11.07

이 땅의 주인

나 같이 머리 나쁜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이해 안 되는 게 있다. 나라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다른 나라에 주어놓고는 되찾아올 줄을 모른다. 도리어 사정을 하면서 우리 군대를 지휘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2020년대 후반까지 환수를 연기해 놓았다. 그걸 자랑이라고 협상을 잘했다고 한다. 전쟁이 났을 때 자기 군대 통솔도 못하는 나라가 주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비상시에는 미국 장군인 한미연합사령관이 우리의 주인이 된다. 미국의 허락이 없으면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옛날 삼국시대 신라에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당나라 장수가 신라군을 지휘하며 전쟁을 치른다면 우리는 신라를 어떤 나라로 평가할 것인가. 생존의 위기에 몰렸을 때는 외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자립할 수준..

길위의단상 2014.11.06

논어[111]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물죽을 먹고 찬물을 마시며 팔을 베고 누웠을망정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으니, 당찮은 재물이나 지위는 나 보기는 뜬구름 같애....." 子曰 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 述而 13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제자들과 백이 숙제 얘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백이 숙제가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린 것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결국은 굶어 죽었지만 마음은 떳떳하고 오히려 기쁨을 느꼈으리라고 공자는 생각했다. 불의로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는, 빈한해도 의(義)의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공자는 말한다. 그러나 장자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백이 숙제도 도척과 같은 도둑놈이다. 도척이 제 이욕을 위해..

삶의나침반 2014.11.05

야구 중계를 볼 때 "결대로 밀어쳐서 좋은 안타가 되었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결대로 밀어친다'는 게 뭘 뜻하는지 알 것이다. 바깥으로 들어오는 공을 억지로 당기지 않고 부드럽게 갖다 맞히는 걸 말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움직이는 야구공에 '결'이 있다는 표현이 참 좋다. '결'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나무, 돌, 살갗, 비단 따위의 조직이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고 적혀 있다. 모든 사물에는 고유한 결이 있다. 나무의 결은 나이테고, 물의 결은 물결이다. 살결도 있고 비단결도 있다. 그런데 야구공을 결대로 밀어쳤다는 것은 공 자체가 아니라 운동할 때 나타나는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결도 있는 것이다. 이 '결..

참살이의꿈 2014.11.04

안도현의 발견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묶어 펴낸 책이다. 원고지 3.7매의 정해진 분량으로 호흡이 짧은 글이 모여 있다. '발견'이라는 이름은 시인은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데서 따왔다. 시인은 원래 있던 것 중에 남들이 미처 찾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 책은 안 시인이 근래 발견한 것들을 드러낸 것이다. 시인이 좋아한다고 말한 것처럼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의 이야기다. 안도현 시인의 글은 시나 산문이나 감칠맛이 난다. 입에 착착 감긴다. 시인은 선 가늘고 예민한 여성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을 통해 나도 배우는 게 많았다. 시각을 달리 해서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관습적인 ..

읽고본느낌 2014.11.03

모퉁이 /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 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 모퉁이 /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한 관찰의 중요성을..

시읽는기쁨 2014.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