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 30

부석사 느티나무

서산 부석사(浮石寺)에는 느티나무가 많다. 느티나무는 계획적으로 식수한 듯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수령도 다양한 느티나무가 많아 '느티나무 절'이라는 인상이 우선 든다. 영주 부석사와 닮은 듯 하면서 다르다. 의상대사와 선묘 이야기 전설은 두 절이 똑 같다. 양쪽 다 부석(浮石)이 있다. 절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시원하다. 그러나 바닷가에 있는 서산 부석사가 전설에는 더 어울린다. 바다에 몸을 던진 선묘의 넋을 위로하기에는 당나라를 마주하던 이곳이 적지였을 것이다. 절 뒤가 도비산(島飛山)이다. 야트막해서 정상까지 1시간 이내로 다녀올 수 있다. 가는 길에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음에는 가벼운 산행을 겸해 찾아오고 싶다.

천년의나무 2015.01.31

양자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학교에 다닐 때는 적성이 맞지 않아 고민했지만 지금은 물리학을 전공한 게 고맙다. 일반인들이라면 과학 이론에 흥미를 느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내용이 딱딱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객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물리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근본 질문과 깊숙이 관계되어 있다. 특히 양자론 같은 현대물리학이 그렇다.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그나마 들은풍월이라도 있으니 과학 서적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포드(K. W. Ford)가 쓴 는 원제가 이지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쉽지 않다. 아무리 쉽게 써도 양자론은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한다. 양자론 자체가 너무나 기묘하고 이상한 세계를 그려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본느낌 2015.01.30

정신의 유연성

나이 들수록 경계해야 할 일이 생각이 굳어지는 것이다. 늙으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과신하게 되고 그것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이 자주 한 "그거 내가 해 본 건데"라는 식의 건방진 발언도 나온다. 다 생각이 굳어진 결과다. 반면에 젊다는 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다른 걸 배척하지 않는다. 아직 나와 외부를 가르는 벽이 완성되기 전이다. 사고방식이 경직되지 않았다. 어릴 때는 부드럽다가 늙으면 딱딱해지는 건 자연의 원리다. 두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다. 모임에 나가 보면 그 차이가 명확히 보인다. 큰소리치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과신증을 앓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모른다. 젊은 때는 호기로나 보이지 늙어서는 ..

참살이의꿈 2015.01.29

서해안 하루 나들이

오랜만에 만난 경떠회원 다섯 명이 서해안으로 하루 나들이를 나갔다. 천리포수목원을 시작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여럿이 어울려 밖으로 나간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올해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원래는 서울에서 만날 예정이었으나 전전날 한 친구가 천리포수목원에 핀 복수초 소식을 전해주는 통에 장소가 갑자기 변했다. 중부 지방에서 1월에 복수초를 본다는 게 무척 신기했기 때문이다. 꽃이 피는 시기나 식물의 생태 변화를 보면 지구 온난화가 실감이 난다. 이상 기후 위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닷바람이 찼지만 마음은 따스해지는 겨울 천리포수목원이었다. 천리포수목원은 언제 가더라도 설립자의 정신이 느껴지는 곳이다. 목표한 대로 복수초와 납매를 보았고, ..

사진속일상 2015.01.28

납매

한겨울에 피는 꽃, 납매(臘梅)다. 중국 원산으로 '당매(唐梅)'라고도 불리고, 추위를 뚫고 찾아오는 반가운 손님에 비유하여 '한객(寒客)'이라 불리기도 한다. '납매'란 음력 섣달에 꽃을 피운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풀이하면 '섣달 매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화 종류는 아니고 녹나뭇과에 속한 활엽 교목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 이 납매를 만났다. 납매는 안쪽에 붉은 무늬를 가진 연노란 꽃잎이 앙증맞게 귀엽다. 납매의 특징은 진한 향기다. 향기에 끌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 납매가 있었다. 벌 나비가 없는 겨울에 무엇으로 수분을 하는가 싶었더니 자세히 보니 꽃 사이를 기어다니는 곤충이 있었다. 귀한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납매는 이렇게 진한 향기를 내뿜는가 보다. 향기란 "나 여기 있어!"라는 꽃의 외침에 다..

꽃들의향기 2015.01.28

1월의 복수초

1월인데 벌써 복수초의 개화 소식이 들린다. 평년 같으면 제주도에서 필 시기인데 이젠 내륙에서도 한겨울에 복수초를 볼 수 있다. 서울 홍릉수목원에서도 예년보다 20일 일찍 복수초가 피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올 겨울은 12월에 반짝 추위가 왔다가 그 뒤로는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만난 올해의 첫 꽃, 복수초다. 1월에 핀 복수초가 신기해서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다.

꽃들의향기 2015.01.28

논어[126]

선생님 말씀하시다. "학문쯤이야 나도 왜 남만 못 할까마는 참된 사람 노릇을 함에 있어서는 나는 아직 이도저도 못하고 있다." 子曰 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 述而 28 자랑도 아니고 겸손도 아닌 공자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공부와 학문에 있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인간적인 토로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치원에서 배울 정도의 삶의 기본조차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과정의 존재로서 인간은 제 능력껏 노력할 뿐이지 이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길 위의 작은 한 걸음이 사람의 차이를 만든다.

삶의나침반 2015.01.26

석양 / 백석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녕감들이 지나간다 녕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쭉재비상을 하였다 개발코를 하였다 안장코를 하였다 질병코를 하였다 그 코에 모두 학실을 썼다 돌체돋보기다 대모체돋보기다 로이도돋보기다 녕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득거리며 투박한 북관北關말을 떠들어대며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라졌다 - 석양 / 백석 1938년 백석이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 선생을 하고 있을 때 쓴 시다. 일제 말기에 접어든 그때는 한글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혼을 말살하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영생고보에서도 응원가를 일본말로 개사하도록 해서 학생들이 응원가 불창 운동을 전개하는 등 저항 정신이 높아지던 때였다. 그런 배경에서 보면 이 시는 한민족의 강건한 정신을 나타낸 것..

시읽는기쁨 2015.01.25

국제시장

울고 웃으며 재미있게 보았다. 상당히 잘 만든 영화다.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영화 '국제시장'이 그린 장면도 시대상의 한 단면이다. 너무 이념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처음에는 영화 보길 망설였지만 천만이 넘었다는 호기심 때문에 극장을 찾았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되는지 확인하고도 싶었다. '국제시장'은 흥남 철수, 독일 광부 파견, 월남전, 이산가족 찾기 등 굵직한 현대사의 중심을 살아간 덕수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흥남 부두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어버리고 가장 노릇을 하게 된 소년의 심리적 트라우마가 그의 일생을 좌우해 버린다. 시대의 격랑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이야기다. 그 시대를 살아낸 많은 아버지 어머니가 그랬다. 영화는 웃음 코드를 적당히 배치해 놓아..

읽고본느낌 2015.01.23

인연이 되면

너무 안달하지 마. 조바심낼 필요도 없어.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늘이 허락해야 성사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게 돼. 없는 인연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어. 사람만 아니라 장소도 마찬가지야.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는 가게 될 거야. 그러니 마음속에 품고 느긋하게 기다려. 그곳이 너에게 자연스레 다가오도록. 야쿠시마가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다.

길위의단상 2015.01.22

은행동 은행나무

옛날 성남에 살 때 은행동에는 은행나무가 있을까 꽤 궁금했다. 지금은 클릭 몇 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성남을 떠나고 20년이 훨씬 넘어서야 그 은행나무를 찾아보게 되었다. '은행동(銀杏洞)'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나무다. 1960년대까지는 이곳도 광주군 중부면이었다. 성남으로 분리되면서 은행동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언덕 비탈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당시는 어디에서나 보였을 것이다. 마을 정자나무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은행정(銀杏亭)'이라고 불렸다 한다. 옆에는 마을 사람이 이용하던 우물도 있었다. 지금은 은행나무보다 더 높은 고층 아파트에 가려 나무는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높이 30m, 줄기 둘레 1.7m이고, 수령은 300년 정도 되었다. 여섯 개의 줄기가 모여 ..

천년의나무 2015.01.20

논어[125]

선생님은 남의 노래가 좋을 때는 꼭 되풀이하게 한 후 따라서 불렀다. 子與人歌而善 必使反之 而後和之 - 述而 27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공자를 만난다. 공자는 노래하는 자리를 즐겨 만든 것 같다. 그리고 좋은 노래는 되풀이해서 들으며 따라서 배웠다. 곳곳에 이런 공자의 모습이 보인다. 풍류를 즐기고 유머러스하고 우락부락한 인상의 공자는 근엄하고 고지식한 유학자 타입은 아니었다. 를 읽으니 공자란 인물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며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긴다.

삶의나침반 2015.01.19

백석 평전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다. 안 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백석의 생애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시인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가 백석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백석이 남긴 작품을 중심으로 되살린 건 의미 있다. 책이 쉽게 재미있게 읽혀 좋다. 백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던 백석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되었다. 결벽증이 있는 모던 보이 백석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화기는 남 손이 닿았다고 손수건으로 싸서 잡고, 악수한 뒤에는 비누로 씻을 정도로 깔끔했다. 남이 만진 물건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멋을 부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양..

읽고본느낌 2015.01.18

귀가 / 이시영

누군가의 구둣발이 지렁이 한 마리를 밟고 지나갔다 그 발은 뚜벅뚜벅 걸어가 그들만의 단란한 식탁에서 환히 웃고 있으리라 지렁이 한 마리가 포도에서 으깨어진 머리를 들어 간신히 집 쪽을 바라보는 동안 - 귀가 / 이시영 내가 웃고 있을 때 다른 편에선 울고 있는 타자가 있다. 이것만 기억해도 사는 게 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어느 분은 아침에 밭일을 하다가 호미에 찍힌 지렁이를 보고 종일 밖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무던하게 사는 데는 무딘 감수성이 도움이 되겠지만 너무 뻔뻔해지는 건 경계할 일이다. 남을 해코지하고도 낄낄대는 족속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 슬프다.

시읽는기쁨 2015.01.17

남한산성행궁 느티나무(2)

남한산성 행궁 안에 있는 느티나무다. 두 그루가 나란히 있는데 가지가 많이 상해서 늘씬한 키다리가 되었다. 수령은 200년 가까이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미루어 짐작컨대 전에는 더 많은 느티나무가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나무들이 행궁 주변에 산재하고 있다. 새로 복원한 남한산성 행궁이 썰렁하게 보이는 이유는 고목의 부재 탓이 아닌가 싶다.

천년의나무 2015.01.16

침괘정 느티나무(2)

남한산성 행궁을 비스듬히 내려다 보는 곳에 있는 느티나무다. 옆에는 '침괘정'이라는 건물이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에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침과정(枕戈亭)'이라 했는데 중간에 이름이 달라졌다. 누워서도 창을 들고 있다는 뜻인가, 무기 제작이나 보관과 관련된 곳이다. 산성마을에서 수어장대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어 사람들이 한 번씩 눈을 주고 가는 나무다. 침괘정을 고쳐 지을 때 주변에 심은 나무가 아니였던가 싶다.

천년의나무 2015.01.16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을 지나가게 된 날, 시간 여유가 있어 행궁에 들렀다. 2012년에 복원이 끝났는데 찬찬히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겨울 평일이라 관람객도 거의 없이 한산했다. 티켓을 끊으니 준 안내 팸플릿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남한산성은 전체 길이가 약 12km에 달하는데, 신라 주장성의 옛 터를 기초로 하여 인조2년(1624)에서 인조4년(1626)까지 대대적으로 축성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역시 축성과 함께 인조3년(1625) 상궐과 하궐이 건립되었다. 작년에 남한산성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남루(漢南樓)는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했다. 한남(漢南)은 한강 남쪽 성진의 누대라는 뜻이다. 앞뒤로 8개의 주련이 있다. 한 성을 지킴에 용과 호랑이의 비법으로..

사진속일상 2015.01.15

논어[124]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 구실하는 길이 먼 데 있을까! 내가 사람 구실하고자 하면 사람 노릇하는 길이 바로 나타나 준다."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 述而 26 인(仁)이 '사람 구실하는 길'로 번역되어 있다. 단순한 '어짊'보다는 훨씬 더 정확한 말인 것 같다. 사람 사이의 관계망에서 내 역할을 성실히 행할 때 얻어지는 어떤 경지가 인이라고 보는 게 맞다. 공자의 말에서 주목되는 단어는 욕(欲)과 지(至)다. 사람 구실하는 길을 바라면 거기에 이른다. 중요한 건 내 의지다. 유교는 타력 신앙과 대척점에 있다. 누구에게나 인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다고 공자는 말한다. 좋은 친구를 옆에 두고 싶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좋은 자식을 바란다면 내가 먼저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다. 좋..

삶의나침반 2015.01.14

인사

선생을 오래 한 결과 나쁜 버릇이 몸에 배었다. 학생들한테 인사를 받기만 했지 내가 먼저 한 적은 없었으니 동네에서도 의례 앞서 인사할 줄을 모른다. 상대 인사에 마지못한 듯 대응해 주는 정도다. 표현은 안 하지만 뭐 저렇게 뚝뚝한 사람이 있느냐고 속으로는 생각할지 모른다. 고쳐야지 하면서도 잘 안 된다. 특히 뒷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꼭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여기서도 나는 받는 편이지 먼저 하지는 않는다. 어떤 때는 인사를 걸어오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냥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이것도 서로 무심하게 살아온 삶의 습관 때문인 것 같다. 뒷산을 찾는 사람은 멀리서 오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산 아래 같은 동네에 산다. 그러니 아무래도 친근감이 더할..

참살이의꿈 2015.01.13

관촌수필

오래전에 읽다가 만 소설인데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게 완독했다. 젊었을 때는 이런 소설 읽기가 힘들었는가 보다. 무엇이건 때가 무르익어야 자연스레 된다. 에는 고향의 정경과 인정이 토속어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 있다. 문체에서도 고전적인 향취가 난다. 사라져 간 고향과 사람들을 이만큼 서정적으로 묘사한 글도 만나기 어렵다.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특히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가 작품의 맛을 더한다. 자전적 소설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어휘를 구사하자면 많은 공부와 노력이 들었을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의 집은 한산 이씨의 잘 나가는 양반이었다. 증조부는 상주목사를 지냈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을 겪으면서 집은 풍비박산이 났고, 작가의 정신적 지주였던..

읽고본느낌 2015.01.12

몸성희 잘 있거라 / 권석창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 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몸성희 잘 있거라 / 권석창 70년대 중반쯤이었다. 군대 휴가를 나와서 옆 마을 친구한테 놀러 갔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소개를 받고 보니 시를 쓴다는 청년이었다. ..

시읽는기쁨 2015.01.11

기정 형

고향 마을에 기정 형이 살고 있다. 나보다 6살이 위다. 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네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연장자다. 형은 어릴 때 집이 너무 가난하여 13살이 되어서야 겨우 국민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7살이었던 나와 같은 1학년이 된 것이다. 당시는 이런저런 이유로 적령기를 놓친 아이들이 많았다. 형과는 워낙 나이 차이가 나다 보니 같은 학년이었지만 함께 놀거나 어울리지는 않았다. 형 친구들은 5, 6학년 아이들이었다. 형의 부친은 한학을 하신 분이라 형은 이미 집에서 한글과 한문을 깨친 상태였다. 1학년 수업 내용은 들으나마나였다. 학교는 형식적으로 다녔다고 해야겠다. 공부보다는 빨리 집에 가 일하는 게 우선이었을 것이다. 학업도 워낙 앞서가니 1학년을 마치면서 담임선생님이 바로 3학년으로 진급하..

길위의단상 2015.01.10

논어[123]

호향은 구두쇠만 사는 곳이다. 그곳 아이가 눈에 뜨이자, 제자들이 어리둥절한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아오면 만나주고, 물러가면 할 수 없지! 왜 그렇게 야단들이냐?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나오면, 그 깨끗한 점을 알아주어야지, 지난 일을 캘 것은 없는 거다." 互鄕 難與言 童子見 門人惑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其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 述而 25 호향(互鄕)은 어떤 마을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난여언(難與言)'을 굳이 구두쇠의 의미로 번역한 건 이상하다. 서로 말을 섞기 어려울 정도로 천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정도가 맞을 것 같다. 이 대목에서도 사람을 대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수 있다. 호향 아이가 보이자 제자들이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관습에 따라 접촉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삶의나침반 2015.01.09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개봉한 지 1년 된 영화다.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그저께 TV 영화보기에서 2천 원을 내고 보았다. 영화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실직을 대하는 월터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닥친 실직은 우리에게 인생의 종말 정도의 엄청난 충격파인데 월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당당함의 비결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특별한 한 개인의 일일까? 최근에 논쟁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보통 사람들도 월터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해임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 조정관이나 가족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는 자세 말이다. 실직을 해도 기본 생활이 보장된다면 누구나 월터처럼 살 수 있다. 더 나은 미래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인권에 포함될..

읽고본느낌 2015.01.08

고향집 다육이

통화를 시작하면 어머니는 "니 어데 아프나?" 라며 먼저 묻는다. 단순한 자식 걱정이라기보다 내 목소리가 그 정도로 비실비실하기 때문이다. 대신 전화기로 전해오는 어머니 목소리는 스무 살 젊은이보다 더 카랑카랑하다. 거꾸로 되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어머니, 고맙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인다. 부모가 건강한 것만큼 자식에게 더한 선물은 없다. 어머니는 농작물만 아니라 화초 가꾸기에도 달인이다. 병들어 버린 것도 어머니 손에만 오면 활짝 피어난다. 이 다육이도 다른 사람이 죽어간다고 버린 걸 이렇게 곱게 꽃으로 피워냈다. 초록 잎도 반짝반짝한다. 물 줄 때면 잎을 일일이 천으로 닦아줄 정도로 정성을 들인다. 세상에 허투루 되는 일은 없다.

꽃들의향기 2015.01.07

겨울 뒷산

눈 내리고 날씨가 싸늘해진 뒤부터는 뒷산을 가지 않았다. 다른 산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헬스장에 나가는 데 재미를 붙였다. 헬스장은 근육을 단련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걷는 건 영 아니었다. 기계 위에서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뭣 하는 짓이지, 라고 자꾸 자문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는 영상으로 기온이 올라 오랜만에 뒷산에 갔다. 근 두 달만이었다. 음지에는 눈이 얼어 있었지만 걷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상큼한 공기가 시원했다. 몸살의 여파인지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산에 든 기분이 좋았다. 천변만화하는 게 세상사지만 산은 늘 여전한 모습이란 게 듬직했다. 통틀어 산만큼 믿음직한 친구도 없다. 자주 찾을 곳은 헬스장이 아니라 산이란 걸 새삼 확인한다. 해가 달라지고 제..

사진속일상 2015.01.06

낙타 /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낙타 / 신경림 너무 재미만 찾으면 안 되리. 인생의 어느 시기는 낙타 같은 고행의 길도 있어야 하리. 지금이 그때인지도 모르는 것이니,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는지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 되는 것도 괜찮으리. 그런 저승길은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안할까, 지상에 미련 남기지..

시읽는기쁨 2015.01.04

논어[122]

선생님 말씀하시다. "대체 아는 것도 없이 꾸며대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러지 않는다. 이것저것 주워 듣고 그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 그를 따른다. 이것저것 보는 대로 따 담는 것도 지식의 일부가 된다." 子曰 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 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 述而 24 공자의 공부는 옛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공자는 현실 중심의 경험주의자임을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치다 싶기도 하다. '기술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는 않는다[述而不作]'가 결코 겸손의 말만은 아니다. 어느 분의 강연에서 '창조는 편집이다'라는 말을 듣고 공자가 떠올랐다. 창조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창작이라는 말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공자..

삶의나침반 2015.01.03

닥터 지바고

신정 오후에 TV로 방영된 이 영화를 거실에서 편하게 보았다. 세 번째 보는 '닥터 지바고'다. 내 기억이 맞다면 처음 본 게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마 학교에서 단체로 갔을 것이다. 그 뒤에 40대 때 다시 한 번 보았다. 같은 영화지만 나이에 따라 느끼는 점이 다르다. 고등학생일 때는 꽤 난해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베리아 설원의 풍경에 감탄한 것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40대 때는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이 기울었다. 아내 토냐에 대한 연민도 컸다. 그런데 60대가 되어 보는 '닥터 지바고'는 혁명과 시대의 격류에 휩쓸린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 시선이 갔다. 모든 인물들의 비중이 거의 대등하게 다가왔다. '닥터 지바고'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 묘사가 뛰어난 영화다. 모든..

읽고본느낌 2015.01.02

새해 기도

나이가 드니 새해의 설렘도 줄어든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질 건 크게 없다는 걸 삶으로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새해의 각오나 기도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불꽃놀이는 짧고, 뒤에는 여일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복'이나 '행복'이 너무 남발되는 신년의 분위기가 별로 탐탁치 않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열두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TV로나마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결국 한 해가 가기는 갔구나, 라는 느낌에 뭉클해졌다. 작년은 우리 가정에서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그만큼 노심초사하며 보낸 해도 없었다. 다시 되살려보기도 싫어서 한 해의 감상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세월의 매듭이 있다는 게 고맙다. 달력을 새로 걸며 힘든 과거가 끊어져 나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치유의 ..

길위의단상 201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