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 31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모란과 작약 꽃대를 보듯 책을 보며 살았다." 책머리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장석주 작가의 독서록이다. 작가는 엄청난 다독가다. 표지에는 '문장노동자며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에게 책 읽기는 구도 과정과 닮았다. "책 읽기는 내 존재를 지탱하는 광합성작용이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 속에 독서에 대한 작가의 믿음이 들어 있다. 독서광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 적어도 한 권 넘게 독파해야 자격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종일 책과 함께 살고 있다. 일 년에 천 권 정도의 책을 보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책의 세계에 파묻혔다. 매일 한 권씩 읽으며 감상을 적고 그 결과를 일 년 뒤에 ..

읽고본느낌 2015.03.31

망악(望嶽) / 두보

태산의 모습 어떠한가 제나라에서 노나라까지 푸르름 끝이 없어라 하늘은 이곳에 온갖 신비함을 모았고 산빛과 그림자는 밤과 새벽처럼 갈린다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 크게 뜨고 돌아가는 새를 바라본다 언젠가 반드시 저 꼭대기에 올라 소소한 뭇 산을 한번 굽어보리라 垈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造化鐘紳秀 陰陽割昏曉 탕胸生曾雲 決자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 望嶽 / 杜甫 3년 전에 중국 태산(泰山)에 올랐다. 7천 개가 넘는 계단을 걸어 남천문에 닿았고, 일출을 보기 위해 정상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그런데 한밤중이 되자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문을 여니 호텔 복도는 새우잠을 자는 중국인들로 걸어가기조차 힘들었다. 호텔 밖에는 더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누워 있는 사람들 ..

시읽는기쁨 2015.03.30

사람 꼴

늙어가니 마음이 더 옹졸해진다. 나이를 먹으면 원숙해지고 관대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나를 돌아보면 증명이 된다. 마음 꼬라지 하고는, 라며 혀를 찰 일이 잦다. 그중의 하나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일도 눈을 찌푸리게 된다. 사람 꼴을 못 보는 것이다. 저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데, 라는 그물망이 더 촘촘해졌다.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휴대폰으로 통화하거나 소음을 내는 사람이 있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꼭 이런 사람이 있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런 소음이 들리면 무척 신경이 쓰인다.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한마디 한다. 최근에 그런 경우가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지적을 하고는 바로 후회를 한다. 떨떠..

참살이의꿈 2015.03.29

논어[137]

선생님 말씀하시다. "시로 정서를 일깨우고, 예로 행동을 바로잡고, 음악으로 인격을 완성하라." 子曰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 泰伯 6 지(知), 정(情), 의(意)가 잘 조화되어야 교양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자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공자가 말한 시(詩), 악(樂), 예(禮)도 넓게 보면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공자는 인간 교육에서 시와 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을 편찬한 목적도 시를 통해 사람 마음을 순화시키려 함이었다. 시와 악은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정서가 일깨워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공자는 이를 인간 교육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그 시대와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순 없다 하더라도 시와 악이 현대 교육에서는 홀대받고 있다. 교육 과정에서는 그냥 구색 맞추기로 편..

삶의나침반 2015.03.28

청계산 봄꽃

산에서 봄꽃을 만나기 위해 계곡을 헤매다 보면 어릴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하던 때가 생각난다. 눈썰미 좋은 아이는 잘도 찾는데 나는 허탕일 때가 많았다. 하나가 여러 장을 챙기면 다른 아이는 빈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꽃보기에는 경쟁이 없다. 모두가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다. 청계산 옛골을 찾았다. 이맘 때면 노루귀, 복수초, 꿩의바람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올해는 꽃의 개체수나 상태에서 예년에 비해 초라했다. 꽃 색깔에도 생기가 덜 했다. 아마 가뭄 탓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꽃때를 잘 못 맞췄는지도 모르겠다. 생동하는 봄을 느끼기에는 뭔가 미흡했다. 노루귀. 복수초. 꿩의바람꽃. 앉은부채. 산수유.

꽃들의향기 2015.03.27

다윈의 식탁

서점이나 도서관의 과학 코너에 있는 책의 저자는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가뭄에 콩 나듯 국내 저자의 이름이 보인다. 기초 과학 분야에서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 이 반갑다. 진화생물학자인 장대익 선생이 썼다. 현대 진화론의 쟁점이 무엇인지 맛깔난 식탁에 차렸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알차서 좋다. 2002년 진화생물학자인 해밀턴 박사의 장례식에 세계의 유명한 생물학자들이 모인다. 도킨스와 굴드를 수장으로 하는 일주일간의 토론회가 즉석에서 열린다. 명칭은 '다윈의 식탁'이고 토론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날: 자연선택의 힘(강간도 적응인가) 둘째 날: 협도의 진화(이기적 유전자로 테레사 수녀를 설명할 수 있나?) 셋째 날: 유전자와 환경 그리고 발생(유전자에 관한 진실을 찾아서) 넷째 날: 진..

읽고본느낌 2015.03.26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밥그릇 경전 / 이덕규 한 학승이 조주(趙州, 778~897) 선사를 찾아왔다. "저는 공부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요." 이에 선사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시읽는기쁨 2015.03.25

석촌호수 산보

저놈은 뭐길래 저리 힘차게 솟아오를까. 딱딱하게 발기하는 거시기 같기도 하고, 오만한 정치꾼이 물고 있는 시거를 닮아도 보인다. 바람에 흔들릴 줄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물건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제 키만 높이지는 않을 것이다. 낮술을 식힐 겸 석촌호수를 산보했다. 조그마해진 사람들은 러닝머신에 선 것처럼 종종걸음을 쳤다. 별을 잊어버리고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쓸쓸해졌다. 밤에는 맹수에 쫓기는 꿈을 꿨다. 사자 우리에 갇혀서 도망 다니다가 결국은 먹잇감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다가 깼다. 그 뒤로 잠들지 못했다.

사진속일상 2015.03.24

논어[136]

증 선생이 말했다. "선비는 굳센 대목이 있어야 한다.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지. 사람 구실을 제 책임으로 여겨야 하니 무겁지 않을까! 죽어야만 끝이 나니 멀지 않은가!"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 - 泰伯 5 짧은 말이지만 묵직하다.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지[任重而道遠]"에서는 선비의 길을 가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진다. 죽어야만 끝이 나는 길이니 생전에는 결코 이루지 못할 목표다. 그저 묵묵히 가야만 한다. 수도승의 비장한 결의와 닮았다. 유학의 치열한 인간 완성의 길이 이런 점에서는 종교와 다를 바 없다. 유교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유학의 근본이 이런 것이었다. 를 읽는 사람아, 껍데기가 아니라 이 정신을 본받는 게 마땅하여라.

삶의나침반 2015.03.23

다 한때인 걸

내 나이 즈음이 되면 손주 키우는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자식을 출가시키면 홀가분해질 줄 알지만, 손주가 태어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요즈음은 대부분이 맞벌이라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자면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식 사정 뻔히 아는데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공무원이면 육아 휴직을 3년까지 쓸 수 있지만 회사원은 다르다. 법적으로 보장되었다고는 하나 3개월 정도만 애기를 돌보라는 회사가 대부분이다. 눈치가 보여서 더 있을 수가 없게 한다. 출산율 저하를 걱정만 하지 말고 이런 걸 확실히 보장해 주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여성 대통령이 당선돼서 기대했는데 나아진 것 하나 없다. 일본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충분한 육아 휴직이 보장되고, 지자체에서 돌보미를 지원해 주어 아기 기르기가 수월하다는 ..

길위의단상 2015.03.22

허균의 생각

허균(許筠, 1569~1618)은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런 반골 기질에 끌린다. 허균은 성리학과 유교적 가치관을 하찮게 여기고 지배 이념에 정면으로 저항했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정신은 수많은 조무래기 사이에서 우뚝하다.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적시하고 저항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허균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비록 소수지만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역사는 빛난다. 이이화 선생이 쓴 은 허균이 쓴 글을 중심으로 정치, 학문, 문학, 세 분야에서 허균이 어떤 사람인지 밝힌다. 내용이 건조하긴 하나 대신 객관적이다. 허균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초판이 1980년에 나왔는데 서슬 퍼렇던 당시에는..

읽고본느낌 2015.03.21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아배 생각 / 안상학 통지표를 들고 아버지 계신 사무실로 달려갔다.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건물 뒤편 독립된 방에 아버지..

시읽는기쁨 2015.03.20

서울둘레길 걷기(1)

작년에 서울둘레길 157km가 열렸다. 금년에 용두회에서 이 길을 일주하기로 했다. 매월 두 번씩 만나 11월까지 8코스 전체를 돌 계획이다. 오늘이 그 첫 번째 날이었다. 1코스는 수락산과 불암산을 통과하며, 길이는 14.3km다. 한 번에 걷기에는 무리여서 오늘은 수락산 코스만 걸었다. 전철 도봉산역에서 출발하여 당고개역에 이르는 7.2km의 길이다. 길은 참 잘 나 있다. 적당한 오르내림이 반복되는 예쁜 산길이다. 안내 표시도 잘 되어 있어 헷갈릴 염려도 없다. 정성 들여 만든 흔적이 보인다. 오늘은 서울 기온이 21도까지 올라서 갑자기 봄이 덮친 느낌이다. 입고 간 겨울옷은 전부 배낭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았다. 다른 사람은 바삐 일해야 하는 평일에 이런 한가한 걸음으로 산길을 ..

사진속일상 2015.03.19

논어[135]

증 선생이 말했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무능한 이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도 별로 아는 것 없는 이에게 묻고, 있어도 없는 듯, 알이 찼어도 텅 빈 듯, 덤벼도 엉클어지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전에 내 친구 중에 있었지."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 嘗從事於斯矣 - 泰伯 4 태백 편에는 증자가 자주 등장한다. 증자는 공자의 다른 제자들에 비해 과도하게 대접을 받는 듯하다. 이 대목은 증자가 안회를 추억하며 한 말로 보인다. 이 정도 칭찬을 듣는 제자는 안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금 느끼지만 안회의 행실에서는 도가(道家)의 향기가 풍긴다. 여기 나오는 '有若無 實若虛'는 의 한 구절 같다. 안회가 오래 살고 저작을 남겼다면 두 학파 사이의 징검다리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

삶의나침반 2015.03.18

경포호 소나무숲

강릉에는 멋진 소나무가 많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소나무숲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저곳에 여럿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강릉을 대표하는 슬로건이 '솔향 강릉'이다. 많은 지자체가 영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말로 지은 이름이어서 더 예쁘다. 예를 들면, 평택은 'Super Pyeongtaek', 익산은 ' Amazing Iksan', 고양은 'Let's Goyang', 내 사는 동네는 'Clean Gwangju'다. 외국어를 쓰면 뭔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경포호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이 소나무숲을 만났다. 금강송으로 미끈하게 뻗은 미인 소나무들이었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소나무숲이 훨씬 더 넓었으리라 짐작된다. 아름다운 소나무숲은 강릉의 귀한 자산이다. 이젠 강릉하면 소나무가 떠오르게 될 것 같다.

천년의나무 2015.03.17

강릉 나들이

두 시간이면 강릉에 갈 수 있으니 동해도 하루 나들잇길로 넉넉하다.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데 의견이 일치되어 아내와 같이 동쪽으로 떠났다. 개인적으로는 오죽헌의 율곡매를 보고 싶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월요일에는 휴관한다는 걸 뒤에서야 알았다. 점심은 강릉 시내에서 친구가 추천해 준 '섭과 물망치' 식당에서 물망치매운탕을 맛있게 먹었다. 소문대로 국물이 담백하고 시원했다. 그리고 안목 해변에 나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역시 동해는 장쾌하게 터진 전망과 맑고 깨끗한 바닷물이 장점이다. '안목 할리스'에는 평일인데도 창가 자리 잡기가 어려웠다. 오랜만에 경포대에도 올랐다. 경포대 하면 해수욕장이나 경포호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경포대는 이 정자다. 지금은 주변 경치가 어수선해서 옛 정취를 감..

사진속일상 2015.03.17

종교 단상

신앙에서 속물성은 초월성이 강조될수록 두드러진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가 진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근본주의일수록 속물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절대 권력이 부패하듯 절대 진리에 대한 맹신은 인간을 속물화하고 타락시킨다. 집단화되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기독교의 근본주의, 이슬람의 IS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극단은 극단과 통한다. 종교에서도 아예 세상을 버리거나, 아니면 세상에 더 집착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이 우상이 된다. 맘몬 숭배가 종교의식을 빌려 성행하는 세상이다.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믿음이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경계를 하게 된다. 대단히 속물화되어 있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은 자신의 속물성에 면죄부를 주는 도구다. 한국 교회는 경제 성장과 쌍두..

참살이의꿈 2015.03.15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개봉한 지 1년이 지나서야 보게 된 영화다. 극장에서 꼭 봐야지 하다가도 놓치게 되는 영화가 많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그랬다. 영화의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감탄케 한 영화다. 영화에서 감독의 역량이 얼마만 한 비중을 차지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절제와 아름다움이다. 스크린의 미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1930년대의 혼란기, 살인 사건에 연관되어 호텔 지배인인 구스타브와 견습생인 제로가 벌이는 모험담이다. 스릴 넘치는 서스펜스로 만들어질 수 있건만 감독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돈을 둘러싼 음모, 살인, 전쟁 등 심각하게 다루어질 요소가 아이들 장난처럼 재치있고 가볍게 취급된다. 세상사 너무 무겁게 대하지 말라고 한다. 여기에 배우들의 절제된 연기, 원색의..

읽고본느낌 2015.03.14

등대지기 / 진이정

외로운 이는 얼굴이 선하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그의 일과 중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일어나자마자 깃발을 단 뒤 한바퀴 섬을 둘러보는 일, 잰 걸음으로 얼추 한 식경이면 그 섬을 일주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곳에서 산보나 하며 살고 싶었다 한 식경이 너무 과하다면 몇 걸음 디디지 않아 이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어린 왕자의 알사탕 별일지라도 외로운 이는 마음이 고르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심심할 땐 바이블을 읽는다던 그는 할망당의 굿을 믿는 토종 인간이었다 하찮은 잡귀일지라도 박대해선 안된다는 것을 어질지 않은 탐라의 바다에서 애써 깨우쳤는지 그는 만물에 대해 겸허했다 외로운 이는 가슴이 저리다 안개 조짐이 있던 날 나는 떠났다 떠나는 나를 위해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길게 길게 안개 신호를 울려주었다..

시읽는기쁨 2015.03.13

글쓰기

글을 쓴다는 건 바다를 '파도 공장'이나 '깊이 더하기 넓이'라고 멋을 부려 표현하는 게 아니라, 바다를 바다라고 말하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정철 씨의 책을 읽다가 무릎을 쳤다. 글쓰기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비유나 수사는 곁가지일 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글쓰기다. 바다를 바다라고 말하면 된다. 진실은 힘이 세다. 진심이 담긴 글이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글은 꾸밈이 아니다. 제 생각과 느낌을 들여다보고 진솔하게 기록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일기가 글쓰기의 본령에 제일 가깝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술수를 부릴 필요가 없다. 편안한 글쓰기가 가능하다. 블로그에 10년 넘게 글을 써 오고 있지만 자주 글쓰기의 뜻을 망각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아름..

길위의단상 2015.03.12

논어[134]

증 선생이 병석에 눕자 맹경자가 문병을 왔다. 증 선생은 말하기를 "새도 죽을 때는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도 죽을 때는 그 말이 옳습니다. 윗사람 노릇하는 데 중요한 일 세가지가 있습니다. 몸집을 간추릴 때는 무뚝뚝한 데가 없어야 하며, 얼굴빛이 발라야 믿음직스러울 것이요, 말솜씨는 지꺼분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사상 차리는 것쯤이야 맡아보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曾子有疾 孟敬子問之 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 변豆之事 則有司存 - 泰伯 3 증자가 병에 걸려 죽을 때니 BC 435년의 일일 것이다. 문병차 찾아온 노나라 대부 맹경자에게 증자는 자신의 말이 진실되다는 것을 강조한 후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세 세 가..

삶의나침반 2015.03.11

한 글자

먼 옛날, 사람들이 처음 말이란 걸 하기 시작했을 때 사물의 이름은 단음절이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된 말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그 한 글자로 된 말에 주목했다. 는 카피라이터 정철 씨가 쓴 단상집이다. 카피라이터답게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혜안이 곳곳에 보인다. 짧은 글이지만 쉽게 읽히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삶의 경구로 삼을 만한 내용이 많다. 책을 보면서 나는 건성으로 세상을 살고 있구나 싶어 자책한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애정이 얼마나 깊으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 있을까. 지은이가 말한 대로 "세상은 넓고, 나는 한없이 좁다." 책에 나오는 262개 글자 중에서 마음 끌리는 대로 몇 개를 골라..

읽고본느낌 2015.03.10

우리가 남이가

우리 민족은 정이 많다고 한다. 따스한 인정은 조상이 물려준 훌륭한 유산이다. 내 어릴 때만 보아도 집에 찾아온 객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식사할 때라면 밥을 함께 나누어 먹었고, 도움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곡식 한 줌이라도 꼭 주어서 보냈다. 가난했지만 나누며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물이 들면서 이런 공동체 의식은 폐쇄적으로 변했다. 혈연, 학연, 지연 등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주고받기로 바뀌었다. 울타리 밖은 남이며 경쟁 대상으로 배척된다. 패거리 문화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끼리끼리 똘똘 뭉치고 집단의 목표에 개인은 매몰된다. 이런 집단은 가족을 내세우는 게 특징이다. "우리가 남이가"도 같은 부류다. 직장에 다니던 어느 해 옆 반의 급훈이 '우리는..

참살이의꿈 2015.03.09

은는이가 / 정끝별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을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

시읽는기쁨 2015.03.08

해협산 시산제

트레커에서 신춘 산행 겸 시산제를 해협산에서 가졌다. 회원 19명이 참가한 성황이었다. 나는 작년 여름 이후 7개월만에 동행했다.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반가웠고, 올해는 출석율을 높이리라 다짐했다. 승용차 4대를 이용해 광주시 귀여리에 주차한 뒤 해협산과 정암산을 일주하는 말발굽 모양의 능선길을 걸었다. 봄기운이 확연한 날씨였다. 긴 산길에 지치긴 했지만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기분은 맑고 상쾌했다. 해협산 정상에서 시산제를 지냈다. 올 한 해도 건강하고 즐거운 산행이 되기를 기원했다. S가 불현듯 행복하냐고 물었다. 지금 산길을 걷는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행복이란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을 잊어버릴 때 느끼는 감정인지 모른다. 루틴한 일상에서 만족을 느끼..

사진속일상 2015.03.07

논어[133]

선생님 말씀하시다. "공손하되 예절을 모르면 지치고, 조심하되 예절을 모르면 얼떨떨하고, 용감하되 예절을 모르면 거칠고, 꼿꼿하되 예절을 모르면 퉁명스럽다. 지위 있는 이들이 가까운 친족들께 후정을 베풀면 백성들도 본받아 사람 구실을 하게 되고, 예전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도 본받아 경박한 짓을 않을 것이다." 子曰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시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君子篤於親 則民興於仁 故舊不遺 則民不偸 - 泰伯 2 공손하고, 조심하고, 용감하고, 꼿꼿한 것은 미덕이지만 예(禮)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흔들리게 된다. 자기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예다. 여기서 예는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개인의 내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 예를 정의하는 것도 단순하지 않다. 여기 나오는 '무례(無禮)'는 우리가 일상..

삶의나침반 2015.03.06

청동정원

80학번 최영미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고3 입시 전쟁부터 서울대 입학, 운동권 활동, 사랑, 결혼, 이혼의 아픔, 그리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자유발랄한 영혼이 시대의 고뇌에 동참하고 방황하면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생하다. 책에 빠져 단번에 읽었다. 이런 소설을 읽으면 내 청춘이 떠오른다. 시대는 달라도 누구나 비슷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은 개인마다 달랐겠지만 시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젊음은 없었다. 그중에 일부는 운동에 뛰어들고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은 80년대 운동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한 시대의 기록화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초 상황도 비슷했다. 박정희의 유신 통치가 시작되고 얼음왕국이 되었다. 학교에는 군대가 진주하고 문 닫는 날이 더..

읽고본느낌 2015.03.05

바둑과 당구

일은 재미가 없어도 해야 하지만 취미는 다르다. 취미의 속성은 재미다. 재미도 없이 억지로 하는 취미는 없다. 노년이 될수록 취미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맞다. 취미가 없다면 인생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취미라지만 욕심이 안 생길 수 없다. 실력이 느는 재미가 더해져야 취미도 내용이 알차진다. 취미에서 발전하여 전문가까지 된 사람도 있다. 취미도 건성이 아니라 심취할 때라야 도(道)의 경지에 가까워진다. 공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집착은 금물이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근래 새롭게 재미를 붙인 게 바둑과 당구다. 바둑은 직장 다닐 때 3급으로 뒀다. 실제는 3급에서 약간 약한 편이었다. 퇴직하고 나서 모..

길위의단상 2015.03.04

가련한 변산아씨

수리산 변산아씨를 만나러 가는 걸 망설였다. 두렵기도 했다. 해가 갈수록 서식지가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원인은 나 같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탓이다. 조심한다지만 많은 사람이 몰리고 밟아대면 가녀린 생명은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도 궁금했다. 올해의 변산아씨는 어떤 모습일까? 수리산 변산바람꽃 자생지를 안 건 9년 전이었다. 등산길에 우연히 발견했다. 변산바람꽃의 하얀 꽃밭이었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게 갑자기 유명세를 타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찾아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번에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살폈지만 딱 여섯 개체만 확인했다. 이마저도 풍전등화..

꽃들의향기 2015.03.03

수리산 수암봉

수리산에 변산바람꽃을 만나러 갔다가 가볍게 수암봉에 올랐다. 낮 기온이 8도까지 올라가서 봄기운이 잔뜩 느껴진 날이었다. 자글거리는 햇볕을 받으며 산길을 걷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길었던 칩거의 시절은 가고 활동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올해는 육체를 좀 많이 움직이자고 다짐한다. 수암봉(秀巖峰, 395m)은 수리산의 연봉 중에서도 높이가 낮은 아담한 봉우리다. 능선 종주 코스에서도 한쪽에 치우쳐 있어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다. 수암봉에서 창박골로 내려가는 길은 그래서 한적하다.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가끔 산길을 같이 걷는 부부를 본다. 다정한 대화 소리라도 들리면 부러워서 한 번 뒤돌아보게 된다. 전에는 같이 다녔지만 지금은 아내 무릎이 아파 산에 오질 못한다. 수 년 전 이 길을 함께 걸었던 기억이 나..

사진속일상 201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