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 22

논어[153]

선생님 말씀하시다. "내게 지식이 있단 말인가? 지식은 없다. 그러나 하찮은 사람이 내게 시시한 것을 묻더라도 나는 전후를 살펴 극진히 일러주지."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子罕 7 공자를 자신을 무지(無知)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겸양으로만 볼 수 없다. 지식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뉴턴이 자신을 바닷가에서 뛰노는 어린아이에 비유한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뒷부분이다. 하찮은 사람이 시시한 것을 물어도 전후를 살펴 극진히 일러준다는 데 공자의 위대함이 있다. 다른 천재들과 비교되는 것으로 공자의 겸허한 인품이 드러난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지하다는 걸 자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다. 알수록 무지가 드러나고 겸손해진다...

삶의나침반 2015.07.30

박조요(撲棗謠) / 이달

이웃집 꼬마가 와서 대추를 따네 늙은이가 문을 나와 꼬마를 내쫓네 꼬마가 홱 돌아서며 늙은이에게 하는 말 내년 대추 익을 때까지 살지도 못할 거면서 - 대추 따기를 노래함 / 이달 隣家小兒來撲棗 老翁出門驅小兒 小兒還向老翁道 不及明年棗熟時 - 撲棗謠 / 李達(1539~1609) 버릇없는 꼬마한테 한 수 가르침을 받는 노인이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시 내용이 역시 이달(李達)답다. 허균이나 허난설헌이 나올 때마다 꼭 등장하는 시인 이달이다. 늙은이의 입장이 되어 이 시 속으로 들어가 보면, 꼬마의 한 마디가 번쩍하는 번갯불이 되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의 행태도 저 노인과 다르지 않음이다. 내 것, 네 것을 가르는 게 본래 부질없는 짓이렷다.

시읽는기쁨 2015.07.29

쓴맛이 사는 맛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노인이 되면 대체로 고집불통의 꼰대가 된다. 노년의 문화라 부르는 것도 즉물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만족하는 수준이다. 시대를 고뇌하며 진실된 삶을 추구하는 노인은 드물다. 작년 신문 보도를 통해 채현국 선생을 처음 알았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라는 제목의 젊은이에게 주는 일갈이 시원했다. 선생의 삶과 생각을 소개하는 이 책 을 읽으며 선생의 진면목을 다시 대하게 되었다. 참 독특한 분이라는 느낌이 신선했다. 선생을 수식하는 말들을 보면 선생이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거인, 기인, 거리의 철학자,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째 안에 들었던 거부, 탄광 사고가 난 뒤 사업을 정리해서 나누어준 사업가,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

읽고본느낌 2015.07.29

은고개에서 남한산성 라운딩

3월 초에 트레커 시산제 때 산에 오르고 등산이란 게 처음이다. 거의 5개월 만이다. 두 달은 병원 신세 지느라 공쳤다 해도 너무 게을렀다. 야쿠시마 트레킹이 눈앞에 닥쳤으니 트레이닝 겸해 등산화를 꺼냈다. 아니었다면 뒷산 산책 정도로 만족하고 말았을 것이다. 훈련을 위해서 집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는 좀 힘든 코스를 골랐다. 은고개에서 약사산을 거쳐 남한산성을 다녀오는 라운딩 코스다. 길이가 10km 정도 되는데 야쿠시마에 비하면 반밖에 안 된다. 그래도 야쿠시마는 평탄한 길이 많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랜만의 산행에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가 겹쳐 땀 범벅이 되었다. 여름 산행의 적은 더위보다 더한 게 산모기다. 숲에 들어서부터 집요하게 달라붙는 모기 때문에 너무 성가셨다. 여름에는 양..

사진속일상 2015.07.28

야쿠시마 여행 계획

닷새 뒤면 조몬스기를 보러 야쿠시마에 간다. 트레커 15명이 참가한다. 두 팀으로 나누어서 A 팀은 산장에서 숙박하며 산악 종주를 하고, 내가 속한 B 팀은 야쿠시마 숲 트레킹이 계획되어 있다. 5박6일 중 중심은 조몬스기를 친견하는 둘째날의 트레킹이다. 산길 20km를 10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야쿠시마 하면 조몬스기와 야마오 산세이가 떠오른다. 개인적 여정이라면 야마오 산세이 마을도 지나는 걷는 여행을 더 추가했을 것이다. 그래도 조몬스기가 포함되는 트레커 여행이 있어 나로서는 무척 감사한 일이다. 이젠 날씨만 무난하길 바랄 뿐이다. 2015년 트레커 야쿠시마 여행 계획 ● 여행지 : 일본 가고시마 야쿠시마 ● 여행기간 : 2015.07.31 ~ 08.05(5박6일) ● 참가자 : 15명 ● 상세 ..

길위의단상 2015.07.26

논어[152]

태재 벼슬아치가 자공더러 물었다. "선생은 성인인가! 어쩌면 그렇게도 잔재주가 많으신지." 자공이 말했다. "본시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다 또 재주까지 많으시지." 선생님이 이 말을 듣고 대답하시다. "태재가 나를 알까? 나는 어려서 미천했기 때문에 이 일 저 일 많이 했지. 참된 인간도 잔재주가 많을까? 많지 않을거다."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子聞之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 多乎哉 不多也 - 子罕 6 다재다능한 자질을 보는 세 사람의 견해가 다르다. 태재는 재주가 많아서 성인이라고 하고, 자공은 성인과 재주는 별개로 보며, 공자는 오히려 군자라면 재주가 적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재주가 많게 된 것은 어려서 미천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

삶의나침반 2015.07.25

토리노의 말

외딴곳에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다. 밖은 거센 바람이 불고 건조하다. 종말적 상황이다. 둘은 집안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쪽 팔을 못 쓰는 아버지의 옷을 입혀 주고, 감자 한 알을 먹고, 남는 시간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본다. 한 마디 대화도 없다. 관성적인 절망의 몸짓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인류 종말에 관한 보고서라 생각하며 보았다. 핵전쟁이든 기상이변이든 종말의 때가 닥쳤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물의 물마저 말라 버리자 짐을 싣고 다른 데로 옮기려 하지만 폭풍으로 얼마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 철저히 고립되었다. 나중에는 램프도 켜지지 않는다. 기름이 있는데 불이 붙지 않는 건 산소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핵겨울이 닥치기 전 지표면..

읽고본느낌 2015.07.24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었느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

시읽는기쁨 2015.07.23

혼자 노는 즐거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더 큰 즐거움은 혼자 놀 때 찾아온다. 옛사람이 말하는 독락(獨樂)의 즐거움이다. 늙어서는 친구가 필요하다고 누구나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관계에 매달리면 자신에게 소홀해진다. 밖으로 향하는 재미는 더 많은 자극을 요구한다. 그 요구에 따르다가는 늘 숨이 찰 수밖에 없다. 주위의 친구보다는 내가 나의 벗이 되어야 한다. 오직 담담할 뿐이다. 노자가 말한 무미지미(無味之味)야 말로 참맛이다. 홀로 책을 읽고, 홀로 산길을 걷는다. 이보다 더한 충만이 없다. 풀, 나무, 구름, 바람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진정으로 고독한 자는 외롭지 않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게 편안하다. 마음이 분주하지 않다. 고독을 찬양하는 문화는 사라졌다. 스마트폰은..

참살이의꿈 2015.07.21

논어[151]

선생님이 광 지방에서 불의의 재난을 당하여 말하기를 "문왕은 돌아가셨지만 문화는 여기 있지 않느냐? 하늘이 이 문화를 없애자 들면 뒷사람인들 어찌할 수 없지만 하늘이 아직 이 문화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 사람인들 나를 어떻게 할까보냐?" 子畏於匡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 子罕 5 공자가 광 땅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는 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처했을 때 보여준 공자의 태도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런 자부심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공자는 나이 50이 되면서 지천명(知天命)할 수 있다 했는데, 천명에 대한 신뢰가 앎만이 아니라 몸으로 체화되어 있음이 보인다. 동시에 주..

삶의나침반 2015.07.19

와일드

아버지의 음주와 폭행, 가난 속에서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셰릴에게 삶의 버팀목이었던 엄마마저 암으로 죽자 절망한 나머지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다. 급기야는 남편과도 이혼하고 인생을 포기할 즈음에 셰릴은 마지막 구원처로 고독한 걷기를 선택한다. 미국 서부의 산악지대를 따라 난 PCT 걷기에 나선 것이다. 영화는 셰릴이 94일 동안 이 길을 걷는 모습을 과거의 상처와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3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위험한 야생의 숲과 사막을 걷는 길은 한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죽음을 각오한 실존적 결단이 아니면 감히 발을 내디딜 수 없다. 셰릴은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감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여정의 종착지에서 결국 그녀는 다시 일어선다. 누구에게나 실패와 좌절이..

읽고본느낌 2015.07.18

익어 떨어질 때까지 / 정현종

기다린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만사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될성부른가) 노래든 사귐이든, 무슨 작은 발성(發聲)이라도 때가 올 때까지, (게으름 아닌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 익어 떨어질 때까지 / 정현종 늘그막이 되어 좋은 점은 느긋이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다. 뚜렷한 목표가 없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과실나무가 있는 것은 꼭 익은 과실을 얻기 위함은 아니다. 잎도 좋고, 꽃도 좋고, 새파랗게 달리는 열매도 좋다. 그리고 달콤한 맛도 보게 될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다. 그것이 제대로 익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5.07.17

서울둘레길 걷기(9)

서울둘레길 4-2코스는 양재시민의숲에서 출발하여 관악산 입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우면산 자락을 따라간다. 북상하는 태풍 낭카의 영향으로 바람 시원한 날이다. 우면산 높이 정도면 정상을 통과하는 것도 괜찮을 법 하건만 둘레길은 산의 아랫 부분을 따라 지나간다. 다른 구간보다 오르내림이 좀 있다. 숲을 지나는 길이라 여름의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어 좋다. 길가에는 홑왕원추리가 한창이다. 3월부터 걸은 걸음이 이번으로 둘레길 반을 주파했다. 일 년에 완주하는 목표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남쪽을 돌 때는 걷기를 마친 후 양재동에서 치킨에 생맥주를 한 후 당구를 치는 게 정해진 순서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된다. 서울둘레길 걷는 날은 신나게 노는 날이다. * 걸은 시간: 3시간(10:00~..

사진속일상 2015.07.17

이름값에 비해

어머니와 작은고모를 모시고 울산의 큰고모를 찾아뵙고 왔다. 큰고모의 연세가 아흔, 어머니는 여든 다섯, 작은고모는 여든 하나시다. 거동이 불편한 큰고모는 딸 집에서 요양하고 계신다. 어릴 때 나는 작은고모 등에 업혀 컸다. 유년의 최초 기억도 고모의 등과 관련이 있다. 그 고모가 경주에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해서 올라오는 길에 불국사에 들렀다. 고모에게 불국사 소감을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이름값에 비해 볼 건 별로 없네."

사진속일상 2015.07.15

논어[150]

선생님이 단연코 하지 않았던 일은 네 가지다. 멋대로 생각하지 않고, 꼭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고집부리지도 않고, 내 입장만 내세우지도 않았다. 子絶四 母意 母必 母固 母我 - 子罕 4 이 정도 품성이라면 인류의 스승으로 칭함에 부족함이 없다. 앞에 나오는 셋은 마지막의 무아(無我) 하나에 귀결된다. 소아(小我)에서 벗어나라는 것은 모든 종교나 지혜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고매한 인류 정신은 이 하나로 통한다. 그러나 범부들에게 무아의 경지란 얼마나 멀리 있는가. 멋대로 생각하고,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여기고, 고집부리고, 내 입장만 내세우는 게 우리의 삶이다. 특히 배운 게 많다는 자부심이 클수록 더하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대비된다.

삶의나침반 2015.07.12

관절은 누구 편일까

관절을 무척 조심하는 친구가 있다. 무릎 연골이 닳는다고 산에도 잘 가려 하지 않는다. 건강은 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등산을 즐기는 친구는 많이 사용해야 관절이 튼튼해진다고 열심히 걷는다. 하루 예닐곱 시간의 산행은 보통이다. 누구 말이 맞을까? 무릎을 조심하는 친구는 사용하면 닳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가능하면 아껴서 오래 쓰자는 주의다.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평생을 농사일로 무릎을 혹사한 어머니는 여든 중반이 되어도 넉넉히 밭일을 할 정도로 성성하다. 반면에 도시 생활을 한 장모는 무릎 수술을 여러 차례 받고 지팡이가 아니면 걷지를 못한다. 무릎을 사용한 밀도로 치면 어머니가 장모보다 수십 배는 될 것이다. 오히려 장모는 운동 부족..

길위의단상 2015.07.12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박이문 선생의 글은 가슴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노년에도 식지 않는 진리를 향한 열정도 부럽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내 소년과 청춘 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그 시절만큼은 선생의 경험과 고민에서 공유되는 부분을 많이 발견한다. 선생은 평생을 진리 탐구의 길로 나갔지만 나는 반짝하고 빛났다가 사그라졌다. 은 선생의 자전적인 글을 모은 책이다. 진리가 무엇이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평생을 연구해 온 선생의 결론은 무엇일까. 선생은 말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만이 아니라 우주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한결같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당신을 허무주의자로 부르는 것 같다. 동시에 선생은 시와 철학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

읽고본느낌 2015.07.11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정말 그랬다. 그 시절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었다. 초가지붕 위로 달이 떠오르고, 한쪽에는 모깃불 연기가 매캐한 가운데 멍석 위에 상이 차려졌다. 처마에 남포등이 흔들거렸지만 달빛이 오히려 환했다. 둥근 상 둘에 아홉 명이 둘러앉았다. 드문드문 말소리,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 수저를 놓고 멍석에 누우면 이만큼 뜬 달이 가득 들어왔다. 외양간의 소도 고단한 몸을 쉬며 고개를 딸랑거렸다. 지금은 마당 없는..

시읽는기쁨 2015.07.09

호기심

8개월 된 손자는 이제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가만히 보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작은 몸이 나아가는 목표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의 눈이 꽂히는 것은 장난감이 아니라 스마트폰이나 TV 리모컨 같은 전자기기라는 게 신기하다. 특히 리모컨만 보면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이 된다. 몸이 굳어지고 돌진한 태세를 갖춘다. 희한하다. 검은 직사각형 플라스틱 막대기의 무엇이 아기를 사로잡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 기기에 익숙해지는가 보다. 손주를 지켜보면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징이 호기심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일부 영장류의 새끼도 주변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기의 눈은 세세하게 주위를 스캔하는 카메라 같다. 낯선 것..

참살이의꿈 2015.07.06

논어[149]

선생님 말씀하시다. "삼으로 짠 제관이 구식인데, 요즈음은 순 실이라 검소하니 나도 남 하는 대로 따르겠다. 뜰 아래서 예를 드리는 것이 구식인데, 요즈음은 위에서 드리니 지나친 짓이라 남들과는 틀리더라도 나는 아래서 드리겠다." 子曰 麻冕禮也 今也純儉 吾從衆 拜下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 子罕 3 옛 관습을 수용하는 태도에 대한 공자의 입장이 나와 있다. 형식적인 모습이나 절차는 시류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 정신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제관을 무엇으로 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검소함을 따르는 게 옳다. 그러나 절을 위에서 하는 것은 예(禮)의 정신에 위배된다. 뜰 아래서 하는 게 옳다. 어느 것을 따르고 따르지 않을지는 본질의 의미가 훼손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할 ..

삶의나침반 2015.07.04

서울둘레길 걷기(8)

이제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같이 산길을 걸어보니 분명히 알겠다. 몇 차례 뒤처지기만 하다가 오늘에야 앞에서 끌어도 무리 없음을 확인했다. 물론 이 팀원과 비교하는 건 별 의미 없기는 하다. 이번에 걸은 서울둘레길 4-1코스는 10.3km로 전체 21개 구간 중 제일 길다. 4시간이 걸렸다. 대모산과 구룡산을 지나는 산길은 무척 좋다. 정상을 거치지 않고 중턱을 따라 난 길은 적당한 오르내림이 알맞다. 길은 마지막에 구룡산을 휘감아 돌면서 여의천을 따라 양재시민의숲까지 이어진다. 양재천과 합류하는 여의천은 처음 걸어 보았다. 이정표를 보면 상류로 청계산까지 연결되는가 보다. 노년 초입에 선사내들 얘기는 정치 이야기가 주다. 다들 자기들 세계에 갇혀 있다. 대부분이 꼴통이라 불러도 좋은 보수주의자가 되..

사진속일상 2015.07.03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이 영화가 개봉될 때는 병상에 있었고, 그 뒤에는 메르스 때문에 바깥나들이를 삼갔기에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 영화도 때를 잘못 만났는지 예상보다 일찍 간판을 내려서 최근에 작은 화면으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핵전쟁으로 지구는 종말을 맞고 표면은 사막으로 변했다. 군데군데 소집단을 이루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물과 기름을 차지하려고 끝없이 싸운다. 독재자 임모탄이 지배하는 왕국에서 여전사 퓨리오사가 탈출하면서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전이 벌어진다.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스릴 넘치게 만들어졌는지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액션 장면만으로도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칭찬받을 만하다. 겉은 부수고 죽이고 하는 마초적인 영화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데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주인공은 맥스..

읽고본느낌 201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