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 32

시골은 그런 곳이 아니다

여주행을 결단하기 전에 이 책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사람의 말은 무시했지만 책은 달랐을까? 그래도 번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때는 이미 콩깍지가 끼어서 무엇으로도 마음을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자들은 퇴직 즈음이 되면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에서 살아보기를 꿈꾼다. '인생 2막'이니 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도록 부추김도 받는다. 대중매체에는 전원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넘쳐난다. 그런 전원생활 예찬론 속에서 는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찬물을 끼얹는다. 시골의 겉과 속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은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다. 본인도 시골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니 체험적 충고인 셈이다. 너무 한쪽 면으로만 쏠리는 데 대한 경고 메시지다. 균형적 시각을 가지는 데 분명 도움..

읽고본느낌 2015.09.29

단출한 추석

올해는 동생네가 일이 생겨 못 오는 바람에 단출한 추석이 되었다. 처음으로 아내와 둘이서 차례를 지냈다. 시끌벅적해야 명절다운 분위기가 난다지만 요사이는 그렇지도 않다. 사람이 많으면 신경 쓸 일도 많아진다. 오랜만에 만난다고 꼭 반가운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형제들 만날 일도 더 뜸해질 것 같다. 각자의 집에서 제 자식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명절에도 이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루 날을 정해 대이동을 하는 풍습도 앞으로는 개선될 것이다. 전통은 옛 그대로 지켜야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쉬운 것 같지만 막상 어려운 게 형제들 사이의 우애다. 그런 삐걱거림이 있는 집을 보면 동병상련을 느낀다. 어머니 얼굴을 뵐 때마다 면목이 안 선다. 어쩔 수 없이 감내해..

사진속일상 2015.09.28

논어[159]

선생님 말씀하시다. "높은 벼슬아치들을 섬기고, 안에서는 부형들을 섬기며, 상사 때는 정성을 다하며, 술에 지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 일을 어떻게 내가 할 수 있을까."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 子罕 13 공자가 말하는 네 가지는 그 시대 사대부들이 늘 하는 일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안팎으로 해야 하는 기본적인 자기 역할로 요즈음도 비슷하다. 공자의 인격이나 능력으로 이 정도는 능히 잘할 수 있었으련만, 공자는 어떻게 내가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게 생략된 채 어록 하나만으로 이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제자의 지나친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한 스승의 우회적 표현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교육적 목적이 ..

삶의나침반 2015.09.25

투구꽃

초오로 담근 술을 마신 부부가 사고를 당했다는 보도가 최근에 있었다. 초오(草烏)는 투구꽃의 뿌리다. 옛날에는 사약 재료로 사용했을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몇 년 전에 개봉된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이라는 영화도 초오를 이용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었다. 보라색 꽃 모양이 투구를 쓴 병사를 닮았다. 마치 숲을 지키는 초병 같다. 귀여운 모습이지만 강력한 무기는 땅에 감추고 있다. 내 경험으로 투구꽃은 강원도 산악 지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각시투구꽃은 투구꽃에 비해 잎이 더 많이 갈라져 있다.

꽃들의향기 2015.09.24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쫄딱 / 이상국 포터 트럭에 싣고 온 짐을 컨테이너에 넣을 때 마음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저 집은 망해서 온 모양이야." 나도 경험한 일이다. 사람들의 연민 어린 눈빛이 그런 거였구나. 돈 많다고 거들먹거려서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먹물 티도 마찬가지다. 도..

시읽는기쁨 2015.09.24

그리니치 올해의 천체사진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주관하는 2015년의 천체사진 공모전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특수한 장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보통의 카메라로도 찍을 수 있는 게 천체사진이다. 특히 지상의 풍경이 포함된 천체사진은 일반 카메라로도 충분하다. 요사이는 디지털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져서 웬만한 DSLR이면 ISO 감도를 높여서 은하수나 별 하늘을 넉넉히 찍는다. 이번에 수상한 하늘 풍경 부문 1등과 2등 작품이 좋은 예다. 이런 사진을 보면 가슴이 뛴다. 우리가 실제 보는 것보다 카메라는 몇 배나 더 아름답게 묘사해 낸다.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밤하늘을 찾아가고 싶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얼마만 한 열정이 필요한지를 알기에 감히 발걸음을 떼어놓지 못하겠다. 젊음이 좋다는 건 앞뒤 재지 않고 우선 시도해 ..

길위의단상 2015.09.23

금천리 잣나무

금천리는 태백산 남쪽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약 300년 전 처음 마을을 개척할 때 후손들의 번영을 위해서 상록수인 잣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태백산에서 채취한 12그루 묘목이 오늘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거목이 되었다. 해마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잣나무 높이는 25m, 둘레는 2.5m 정도다. 관리를 잘 한 탓인지 나무는 원기왕성하게 잘 자라고 있다.

천년의나무 2015.09.22

세월의 쓸모

학교 동기를 만나면 의레 옛날이야기가 나온다. 공유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감정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진해진다. 동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50년대와 60년대에 유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같은 추억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각자가 경험한 공간은 다르지만 시기의 겹침이 정서적 유대감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추억은 팍팍한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준다. 이 책 제목이 말하는 '세월의 쓸모'도 아마 그런 뜻이리라. 지은이인 신동호 시인은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장소는 달라도 시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를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낡은 것,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가 살아난다. 시인의 말처럼 과거를 추억하다 보면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불..

읽고본느낌 2015.09.22

염치

염치 없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한다. 내 경우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때가 많다. 바깥 경치를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중에 옆에서 들리는 소음은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다. 긴급한 연락도 아니고 잡담 수준의 통화를 옆 사람은 아랑곳없이 계속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의 사생활 얘기를 억지로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다. 이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한다는 걸 의식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자기만 아는 이런 사람을 보고 염치 없다고 말한다. 공공장소에서는 이런 염치 없는 자가 항상 있다. 어찌 보면 작은 일일 수도 ..

참살이의꿈 2015.09.21

프로 기사와 다면기

서울시의 차 없는 날 행사의 하나로 광화문에서 프로 기사와 일반인과의 다면기가 있었다. 프로 기사 100명이 나와서 시민 1,000명과 지도 대국을 가졌다. 프로 기사 한 사람이 열 명을 상대로 두는 것이다. 광화문 보도에 네 줄로 천 개의 바둑판이 놓여 있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두 주 전에 행사 소식을 듣고 나도 신청을 해서 참석했다. 우리 조에서 수고한 기사는 이동휘 초단이었다. 재작년에 입단한 젊은 기사인데 진지하게 바둑을 둬주어서 좋았다. 다섯 점을 놓고 시작했다. 프로 기사와는 처음 대국하기 때문에 무척 설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바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배우기 위해서 두기 때문에 승부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마를 죽이지 말자, 쌈지 뜨지 말고 중앙으로 나가자, 이 두 가지를 염..

사진속일상 2015.09.20

논어[158]

선생님이 되놈 땅에서 살고 싶어한즉 어느 사람이 말했다. "더러운 걸 어떻게 하십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이 산다면이야 더러울 게 어디 있담!" 子欲居九夷 或曰 陋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 子罕 12 를 읽는다는 건 한 위대한 인격을 만나는 일이다. 이 대화만 보아도 공자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르다. 예수도 당시 죄인이라 지칭된 사람들, 인간 취급도 못 받은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렸다. 기성 체제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소인과 군자의 구별이 이런 데서 생긴다. 소인은 경계 짓고 가르는 데 익숙하다. 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荊人有遺弓者而不肯索曰 荊人遺之荊人得之又何索焉 孔子聞之曰 去其荊而可矣 老聃聞之曰 去其人而可矣 형나라 사람..

삶의나침반 2015.09.19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우리는 너무 거창한 걸 좇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작은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행복을 찾아 멀리 나가보..

시읽는기쁨 2015.09.18

서울둘레길 걷기(12)

일주일째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그 환한 가을 속을 걸었다. 12차 서울둘레길 걷기였다. 6코스는 석수역에서 시작하여 안양천을 따라 걷는 길이다. 구름 한 점 없어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걱정이었는데 길은 둑방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나무 그늘이 고마웠다. 길에는 점심 시간 짬을 이용해 산책나온 직장인들이 많았다. 다섯 명이 모였다. 한 사람은 다리에 쥐가 나서 중간에 포기했다. 우리 나이가 될수록 평소에 꾸준한 활동이 필요하다. 다리 건강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 길은 흙, 시멘트, 탄성 포장재 등으로 되어 있어 단조로움을 덜어주었다. 안양천과 양쪽 둑방길은 주변 시민들에게는 산소 같이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최근에 개장한 고척동 스카이돔 야구장. 오목교에서 길을 벗어나 양평역에서 전철을 ..

사진속일상 2015.09.18

태백산 주목

얼마나 단단하게 제 속을 다지고 살았으면 '죽어 천 년'이라는 말이 있을까. 살아 있는 주목보다 오히려 죽은 형해의 주목이 더 당당하고 아름답다. 죽어서도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생명이 나무 말고 무엇이 있을까. 특히 주목은 그런 면에서 나무의 왕이다. 고산지대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용트림하듯 제 모양을 키웠다. 인고의 세월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태백산 천제단에서 문수봉으로 가며 만난 주목들이다. 주목 군락지는 반대 방향의 유일사 가는 길에 있다는데 그곳은 겨울에 찾아가기로 예약해야겠다. 하얀 눈옷을 입은 주목은 더욱 기대된다.

천년의나무 2015.09.16

대국

한국의 현대 바둑사에서 가장 기억될 대국이라면 조훈현 9단과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이 맞붙은 1989년의 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 5국일 것이다. 전까지는 일본이 세계 바둑계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녜웨이핑이라는 천재가 등장하면서 중국 바둑이 크게 융성하자 중국 출신의 대만 재벌인 잉창치씨가 전 세계의 바둑 고수 16명을 초대해 실력대결을 벌여보기로 한 것이 응씨배였다. 우승 상금이 40만 달러로 당시 윔블던 테니스 우승 상금의 두 배가 넘는 액수였다. 이런 거액을 제시한 데는 중국이 반드시 우승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은 이때 조훈현 9단만이 초대됐다. 조훈현 9단은 미완의 강자로 여겨졌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16강전에서 왕밍완, 8강전에서 고바야..

읽고본느낌 2015.09.16

태백산 야생화

기대하지 않았는데 태백산에서 마타리를 비롯한 많은 야생화를 만났다. 등산로 거의 전 구간에서 꽃들이 피어 있었다. 특히 천제단 아래는 화려한 가을 화원이었다. 봄의 태백산 야생화가 볼 만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가을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었어도 DSLR을 배낭에 넣었을 것이다. 개체 수가 가장 많은 건 투구꽃이었다. 전날 산책했던 함백산 자락도 그랬다. 너무 많아서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질풀이나 동자꽃을 아직 볼 수 있는 것도 신기했다. 거리가 먼 걸 빼고는 태백산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산이다. 앞으로 찾을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겠다. 흰고려엉겅퀴 이질풀 투구꽃 수리취 산마늘 용담 동자꽃 물봉선 진범 미역취

꽃들의향기 2015.09.15

태백산에 오르다

강원도에 간 둘째날, 홀로 시간을 내어 태백산에 올랐다.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태백산에 오를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도 가족과 함께 한 길이었지만 따로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태백산은 다음으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미룬 숙제를 하나 해결하듯 가뿐한 마음으로 오를 수 있었다. 태백산 등산 시작점은 유일사, 백단사, 당골이 있는데 원점 회귀로는 비교적 긴 편인 당골을 골랐다. 당골에서 천제단, 문수봉을 거쳐 하산하는 다섯 시간 정도 걸리는 순환 코스다. 태백산은 1,500m급이지만 출발 지점이 고도가 높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당골 광장에서 출발하면 반재 밑까지 계곡과 함께 한다. 가을 아침의 청량한 계곡 물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씻어주는 듯 했다.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지 하산하는 등산객이 많았다...

사진속일상 2015.09.15

부추꽃

부추는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이다. 베어내고 베어내도 어느새 다시 자라난다. 그러다가 봄이 지나면 잊힌다. 밭은 다른 작물이 대신한다. 부추꽃을 보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텃밭 가장자리에서 살아남은 부추가 꽃을 피웠다. 계면쩍게도 부추꽃을 처음 보았다. 부추 하면 먹는 것만 떠올렸지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울 거라곤 아예 생각도 안 했다.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꽃들의향기 2015.09.11

귀엽게 나이 들기

나이가 60이 넘어도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건 어떨까? 얼마 전의 일이다.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나한테 귀엽다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어리벙벙했지만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분은 형님뻘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전에 학교에 있을 때는 코흘리개 아이들한테서도 그런 소리를 가끔 들었다.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난감했다. '귀엽다'는 내 평생을 따라다니는 단어다. 어렸을 때는 은근히 자랑스러웠지만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다. 뭔가 모자라고 덜 떨어진 인간이 된 듯하여 주눅 들기 일쑤였다. 하물며 어른이 되어서는 오죽하겠는가. '멋있다'거나 '남자답다'는 말은 나에게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런데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한 친구로부터 살짝 그..

참살이의꿈 2015.09.11

논어[157]

자공이 말했다. "아름다운 구슬이 여기 있다면 궤 속에 감추어 둘까요? 좋은 장사치를 찾아서 팔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팔고말고! 팔고말고! 나는 장사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子貢曰 有美玉於斯 온독而藏諸 求善賈而古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 子罕 11 자공의 비유도 멋있지만 공자의 대답도 솔직하다. 자공은 장사치를 '찾는' 적극적인 자세인데 비해 공자는 '기다린다'는 점이 다르다.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는 공자가 자공 눈에는 탐탁치 않았는지 모른다. 주유천하 하던 시절에 비하면 공자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공자 말년의 변화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공자는 초지일관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교육 시킨 제자를 세상에 내보냄으로써 본인의 역할을 대신 하게 했다. 다만 스..

삶의나침반 2015.09.09

호압사 느티나무

서울 금천구 시흥동 삼성산 자락에 있는 호압사(虎壓寺)는 조선 개국과 더불어 세워졌다. 한양에 궁궐을 지을 때 관악산의 불 기운과 삼성산(호암산)의 호랑이 기운이 위협이었다고 한다. 삼성산의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산의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창건한 절이 호압사다. 절 이름에 그런 의도가 분명이 드러나 있다. 경내에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창건할 때 심었다면 수령은 500년이 넘었을 것이다. 안내문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나무 줄기는 많이 상해서 보형재로 채워져 있지만 푸른 잎만은 싱싱하게 피워내고 있다. 키는 각각 11m, 7m, 줄기 둘레는 3.6m, 4.2m다.

천년의나무 2015.09.08

1Q84

1, 2권은 전에 읽었는데 한참 사이를 두고 이번에 3권을 마저 읽었다. 1권을 읽을 때의 긴장감은 덜했지만 하루키의 필력에는 여전히 감탄했다. 하루키는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위장에 문제가 있는 물리교사' 같은 표현에는 무릎을 쳤다. 워낙 문장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보여선지 내용이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이다. 전체 분량이 2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데도 지루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 읽고 났는데도 선명하게 남는 건 없다. 이건 뭐지, 라는 어리둥절한 느낌이다. 작가의 속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렇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1Q84 세계를 산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새로운 눈이 떠지고 이후의 세계는 전과는 완전히 ..

읽고본느낌 2015.09.07

한 장의 사진(21)

중학생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열다섯 해를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부모님은 몇 달에 한 번씩 만났을 뿐, 십 대와 이십 대의 대부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주신 분이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철없던 그때는 당연하다고 여겼을 뿐 고마움을 몰랐다. 오히려 투정을 많이 부렸다. 내가 그 당시 외할머니 나이가 되어서야 손주를 돌보는 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를 안다. 나만이 아니라 동생 넷도 전부 객지에서 외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컸다. 사춘기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고생이 오죽했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백수를 하셨으니 장수하셨다. 우리 동네에서 백 세를 넘기신 분은 외할머니가 유일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치매에 걸려서 모시는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나는 아무 도움도 되어 드..

길위의단상 2015.09.06

실언 / 고증식

고향에서 이발로 먹고 사는 깎새 형이 들려준 우스개 한 토막 바야흐로 설 단대목에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바쁜데 엊그제 새로 들인 머리나 감기는 시다 녀석 하나가 세상 둘도 없는 뺀질이더라고 그 녀석 그날따라 별나게 더 뺀질거려 보다 못한 깎새 형 버럭 한소리 질렀다는데 - 야 이놈 자식아, 그만 좀 뺀질거리고 얼릉 여 와 손님 대가리나 감겨! 순간, 길게 목 빼고 엎드렸던 그 손님 문제의 대가리 번쩍 치켜들고 한참이나 뻥하게 쳐다보더라고 - 실언 / 고증식 당황했을 깎새 형과 손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시다 녀석은 얼마나 킬킬거렸을 것인가. 악의가 아닌 줄 알기에 실소 뒤에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 같다. 아마 유머 있는 손님이라면 "야, 대가리 좀 잘 감겨봐." 정도의 대꾸는 있지 않..

시읽는기쁨 2015.09.05

고향집 나팔꽃

고향집 울타리를 따라가며 나팔꽃이 피어 있다. 돌담을 지나고, 기와 덮개를 지나고, 버려진 슬레이트를 지난다. 소년 시절의 꽃으로 기억나는 건 화단의 붉은 채송화, 그리고 가꾸지 않아도 덩굴을 뻗으며 자라던 나팔꽃이다. 지금 이 꽃은 50년 전 그 나팔꽃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나팔꽃의 꽃말이 '덧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낮이면 꽃잎을 닫아버리는 모양에서 사람 사이의 사랑을 연상했는지 모른다. 삶도 다르지 않다. 결국은 '덧없음'으로 귀결되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닐까. 나팔꽃에서는 힘찬 팡파르 대신 애조 서린 가락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 ..

꽃들의향기 2015.09.04

서울둘레길 걷기(11)

지난 번에 비로 중단했던 낙성대에서 서울둘레길 11차 걷기를 시작한다. 5코스 관악산길 후반부 9km를 걷는다. 한 달에 두 번씩 행하는 이 걷기는 동기들 만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늘 그 얼굴이긴 해도 정기적인 만남이 있다는 건 의미가 크다. 다른 과에서는 우리를 부러워한다.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장군 동상. 948년에 이곳에서 장군이 태어났다. 그날 하늘에서 여기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산길의 망태버섯. 삼성산 자락에 있는 호압사(虎壓寺). 호환을 줄이기 위해 태종 때 세운 절이라고 한다. 때죽나무 연리지. 관악산을 지나는 서울둘레길 5코스(12.7km)는 오르내림이 적당한 산길이다. 호압사 주변은 산림욕장을 비롯해 걷기 좋은 산책길을 잘 조성해 놓았다. 이런 길은 걸을수록 산의 정기를 받으..

사진속일상 2015.09.04

병조희풀

한 달 전에 남한산성에서 자주조희풀을 봤는데, 이번에는 속리산에서 병조희풀과 만났다. 짧은 시기에 조희풀 두 가지를 한꺼번에 대면하게 되었다. 병조희풀은 이름 그대로 보라색 꽃이 작고 아담한 병을 닮았다. 여인들의 화장대에 있는 향수병을 닮은 것도 같고, 요술병 같이 보여서 뭔가 신기한 게 쏟아져 나올 것도 같다. 조희풀은 이름에는 '풀'이 들어 있지만, 풀이 아니라 나무다.

꽃들의향기 201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