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 34

용문사 은행나무(3)

노란 옷으로 갈아입은 용문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역시 거인인지라 행동이 무척 굼뜨다. 절 입구의 은행나무 가로수는 노랗게 물들어 있건만 노거수는 이제 채비를 하고 있다. 오늘따라 체구가 더 우람해 보인다. 키가 42m니 아파트로 치면 15층 높이다. 가까이 가면 천 년의 세월을 견뎌낸 위엄이 느껴진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암나무다. 나무 밑에는 은행 열매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시들지 않는 생명력이 놀랍다. 천왕목(天王木)이라 붙인 이름이 결코 무겁지 않다. 그리고, 절 뒷산의 단풍....

천년의나무 2015.10.31

논어[164]

선생님 말씀하시다. "움은 자라지만 꽃 피지 않는 수도 있고, 꽃은 피어도 열매를 못 맺는 수가 있지!" 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 子罕 18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 비유가 생각난다. 예수가 호숫가에서 하신 말씀이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깊지 않아 싹이 곧 돋아나기는 했지만 해가 솟자 타 버렸습니다. 뿌리가 없어 말랐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우거지자 숨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습니다." 열매 맺음을 강조하는 것은 같지만 공자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방점을 둔다. 예수의 뉘앙스는 약간 다르다. 어디에 떨어졌느..

삶의나침반 2015.10.30

뒷산 미국자리공

뒷산 절개지에 제일 먼저 네가 자리 잡았다. 쓸려내리는 흙을 붙드는 네 힘이 대단하다. 한때 유해식물로 분류되어 괄시를 받았지만 이처럼 유용한 역할도 있다. 토종 생태계를 황폐하게 한다는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억센 몸매에 비해 네가 피우는 꽃은 여리고 곱다. 이젠 우리 땅에 들어왔으니 거친 성격 좀 누그러뜨리고 옆의 친구와 어울려 살아가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사랑받는 우리 풀이 되지 않겠니.

꽃들의향기 2015.10.29

원대리 자작나무 숲

알록달록 단풍도 좋지만 하얀 자작나무 숲의 가을도 아름답다. 자작나무를 보러 강원도 인제까지 먼 길을 달렸다. 가는 길에 잠시 용문사에도 들렀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이제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평일인데도 원대리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한 시간 정도 임도를 따라 오르면 인공 조림한 이 자작나무 숲에 이른다. 자작나무 하면 백두산에 갔을 때 버스로 관통해 간 자작나무 숲이 잊히지 않는다. 본 고장의 자작나무와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만하면 이국적인 느낌이 들기에 넉넉하다. 이곳은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네 개의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어 다양한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원정임도, 1코스, 3코스, 원대임도를 돌아오는 짧은 코스를 택했지만 시간 여유가 있다면 2코스와 4코스를 포함하는 트레킹을 ..

사진속일상 2015.10.29

나는 개인주의자다

아내한테서 이기적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두 딸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런 점에서 불만인 것 같다. 이기주의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 나와 있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기주의자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배려가 부족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건 억울하다. 사고나 행동의 중심에 나를 두고 있지만 결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내가 소중한 만큼 타자 역시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한다. 내가 간섭받기 싫은 만큼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인간은 각자가 독립된 인격체다. 가족 사이라도 폐를 끼치거나 짐이 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기..

참살이의꿈 2015.10.27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웅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꿈뻑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가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소 / 김기택 소나무는 한민족의 상징이다. 정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무다. 그리고 농사를 짓는데 소만큼 소중한 가축도 없다. 소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소'나무와 '소'가 무슨 연관이 없을까, 고민..

시읽는기쁨 2015.10.26

마션

큰 기대를 하고 봤는데 조금은 아쉬웠던 영화다. '그래비티'의 여운이 너무 강한 탓인지 모른다. 화성이라는 무대는 지구 궤도 이상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을 텐데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다. CG를 화려하게 써서라도 화성의 다이나믹한 풍경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미련이 남는다. 과장되어 보이는 모래 폭풍도 그다지 잘 그려낸 건 아니다. 화성에 홀로 남은 마크는 자신이 가진 과학 지식을 활용해 생존의 방법을 찾아낸다. 거주 모듈 안에 밭을 만들고 감자도 키운다. 흙에 파묻힌 옛 탐사 차량을 꺼내 지구와의 통신에도 성공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 1년 이상 홀로 화성에서 버틴 이야기 때문에 내용 전개의 긴장도가 떨어지는 게 흠이다. 요사이 나오는 우주 영화는 허황된 내용이 아니라 과학적 사..

읽고본느낌 2015.10.25

천황사 남암 전나무

천황사에서 작은 개울을 건너 포장된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남암(南庵)에 이른다. 이름은 암자지만 허름한 가정집처럼 생겼다. 이 암자 앞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전나무가 있다. 우뚝 솟은 모양이 다른 나무를 압도한다. 천황사 주위에는 오래된 전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절 앞에는 줄기가 부러졌지만 수령이 800년이 되었다는 나무도 있다. 그러나 줄기의 굵기로 볼 때 남암 전나무와 비슷해 보인다. 천황사는 숙종(1674~1720) 때 중건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마 그 시기에 심었던 전나무들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수령은 약 4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남암 전나무는 크면서 곧고도 당당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줄기 끝이 살짝 구부려졌다. 그게 오히려 파격미로 보인다. 나무 높이는..

천년의나무 2015.10.24

논어[163]

선생님 말씀하시다. "일러주는 대로 줄기차게 나가는 사람은 아마 회일거야!" 子曰 語之而不惰者 其回也與 선생님은 안연을 평하여 말씀하시다. "정말이지 아깝구나! 나는 그가 진보하는 것만을 보았지 그가 그만두는 것은 못 보았거든." 子謂顔淵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 子罕 17 공자의 칭찬대로라면 안회는 성인의 자질이 충분한 제자다. 만약 안회가 요절하지 않고 수제자로 남아서 유가(儒家)를 이끌었다면 유교는 지금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금은 더 탈정치, 탈세속화 된 순수한 인간 완성의 길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도가(道家)와도 가까워졌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안회의 이른 죽음은 아깝다.

삶의나침반 2015.10.23

용덕리 소나무

가지 몇 개가 잘려나갔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소나무다. 처음 본 순간 조지훈의 승무가 떠올랐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그런데 나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을 달리 한다. 원래 이곳은 용두초등학교 자리였는데 폐교되고 자연학습원이 들어섰다. 학교와 함께 마을의 보물이었던 소나무다. 나무의 키는 11m이고, 줄기 둘레는 2.8m다. 수령은 500년 정도로 추정한다. 전북 진안군 주천면 용덕리에 있다.

천년의나무 2015.10.22

식물의 인문학

지은이인 박중환 씨의 경력을 보면 50세까지 언론계에서 일하다 늦게야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IMF로 직장을 잃은 게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식물을 공부하며 그들의 삶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숲이 인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은 그런 지은이가 들려주는 식물 이야기다. 책은 꽃, 잎, 열매, 뿌리의 네 단원으로 되어 있다. 물론 딱딱한 학술서가 아니고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여럿 알게 되었다. 계절이 꽃을 피우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가 꽃을 피운다는 설명은 재미있다. '스트레스 개화 이론'이다. 고사 위기에 있는 소나무일수록 작은 솔방울이 많이 맺히는 걸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식물이 지구의 산소 공..

읽고본느낌 2015.10.21

어떤 인연

대학 시절에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 친구가 있었다. 성격뿐만 아니라 공부나 노는 방식도 비슷했다. 전공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점도 닮아서 같이 고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자연히 둘이서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시기도 비슷했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타과 여학생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속으로 애만 태웠던 나에 비해 친구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여학생이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에 가입해서 안면을 익히며 접근했다. 그러나 진도는 상당히 느렸다. 친구는 진행 상황을 수시로 나에게 들려주었지만 몇 달이 지나도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친구의 속앓이도 점점 깊어졌다. 내 코가 석 자이기도 한 나는 도움을 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소연을 들어주고 술을 ..

길위의단상 2015.10.20

배움을 찬양함 / 브레히트

배워라 단순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의 시대가 왔다 너무 늦는 법은 없는 것이다! 배워라 가나다라를 그것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겠지만 우선 배워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일랑 하지 말고 시작해라!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배워라 여인숙에 사는 사람들이여 배워라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여 배워라 부엌의 여자들이여 배워라 60세의 여인이여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학교를 찾아라 집 없는 사람들이여 지식을 손에 넣어라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여 굶주린 사람들이여 책을 잡아라 손에 그것은 무기의 하나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야 한다 동지여 질문하라 망설이지 말고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음미해 보라!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앎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감정서를 검..

시읽는기쁨 2015.10.19

대불리 느티나무

대불리(大佛里)는 진안 운장산 자락에 있다. 표지석에는 신기마을로 되어 있다. 아마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본래 이름이 신기리였을 것이다. 이 마을 입구에 큰 느티나무 당산목이 있다. 키는 17m, 허리둘레는 4.3m다. 수령은 200년 정도인데 생기가 넘친다. 늘씬하고 호쾌하게 생겼다. 나무 주위에는 넓은 공터를 두고 밑에는 반원형의 평상을 깔아놓았다. 도로에 인접한 게 흠이긴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는 그만이다. 나무와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천년의나무 2015.10.18

논어[162]

선생님 말씀하시다. "비겨 말하면 산을 쌓다가 끝장 가서 한 삼태기 흙으로 성공을 못할망정 내가 그만 두는 것이요, 평지에 한 삼태기 흙을 쏟기 시작하는 것도 내가 시작하는 것이다." 子曰 譬如 爲山未成一궤 止吾止也 譬如 平地雖覆一궤 進吾往也 - 子罕 16 누구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운명이나 절대자의 뜻과는 관계없다. 모두가 내 의지요 내 결단이다. 유학의 기본 정신이 이렇다. 여기서 흙을 쌓아 산을 만든다는 비유는 참 인간이 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한 삼태기 흙을 나른다는 구절을 읽으며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내 작업이 연상되었다. 10년 넘게 나도 흙을 쌓아가는 중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꾸준함에서는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삶의나침반 2015.10.18

서울둘레길 걷기(13)

용두회의 열세번째 서울둘레길을 걷다. 6코스 후반과 7코스 전반부 길이다. 정해진 코스보다 조금씩 더 걷고 있지만, 그래도 올해 안에 끝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더니 다시 여름으로 돌아간 듯 낮에는 햇살 따갑다. 연무로 시야도 좋지 못하다. 양평역에서 11시 약속인데 안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늘 먼저 와 기다리고, 늦는 사람은 항상 늦는다. 안양천을 따라가는 둑방길이 참 좋다. 맞은편에는 목동 열병합발전소가 있다. 길은 천변으로 내려오고, 양화교 아래를 지난다. 한강으로 나오니 시야가 탁 트인다. 녹조로 덮인 하류의 한강물은 너무 더럽다. 가양대교를 건너기 위해서는 지하보도를 통과해야 한다. 염창공원에서 김밥과 과일로 점심을 때우다. 가양대교를 건너다. 난지도 노을..

사진속일상 2015.10.17

신양리 느티나무

진안군 주천면을 지나다가 만난 느티나무다. 55번 국도변에 있다. 마을은 안쪽으로 들어가야 있는데 느티나무 홀로 외롭다. 예전에는 이곳에도 집이 있었을 법 하건만 도로 바로 옆이라 뒤로 물러났을지 모른다. 이 나무는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고, 높이는 27m, 줄기 둘레는 2.9m다. 보호수임을 알리는 표지석 위에 사탕과 감, 밤이 놓여 있다. 아마 마을 주민 중 누군가가 정성으로 바친 것이리라. 노거목을 대하는 마음이 홍시처럼 곱다.

천년의나무 2015.10.16

암마이봉에 오르다

전주에 간 길에 마이산 암마이봉(686m)에 올랐다. 암마이봉은 그간 통제되었다가 작년부터 출입이 허용되었다. 시간 여유가 넉넉치 않아 가장 짧은 코스인 북부주차장에서 올랐다가 은수사를 둘러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짧고 시간이 적게 걸리는 대신 이 코스는 전부 계단이다. 천황문에서 암마이봉에 오르는 길 역시 계단이 대부분이라 200층 건물을 계단 따라 오른다고 여기면 된다. 편안하지 않은 길이다. 호젓한 산행을 바랐지만 유명한 산이어서인지 평일에도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단체객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아줌마 부대는 첫째 경계 대상이다. 너무 시끄럽다. 들뜬 나들이길이란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정도가 지나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집단이 되면 뻔뻔스럽게 되는 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조심스럽..

사진속일상 2015.10.16

왕대폿집 / 구중서

수원화성 화홍문 연못가 왕대폿집 벽에 걸린 주전자가 모과처럼 우그러져 막걸리 젖통을 만진 손들을 알만하다 안주도 안 시키고 막걸리만 들이켜는 넝마주의 단골손님 오늘은 안 보이네 그나마 막걸리 값도 마련이 못 되었나 대폿집 주인장이 문밖을 내다본다 리어카 세워놓고 딴 데 보는 단골손님 주인이 불러들이네 공으로 마시라고 - 왕대폿집 / 구중서 10여 년 전 화성에 갔을 때 찍어둔 왕대폿집 사진이 있다. 거꾸로 달린 간판이 특이해서 한참 들여다봤는데 바로 이 시조에 등장하는 왕대폿집이다. 여기 들리는 사람들은 거꾸로 된 간판이 바로 보일 때까지 마셨다나 어쨌다나, 유명한 집인 줄 그때 알았더라면 나도 한 번 들어가 봤을 텐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주인장 인심도 그대론지, 언제 화성에 다시 가봐야겠다.

시읽는기쁨 2015.10.12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가슴 따스해지는 산문 모음집이다. 시인, 소설가에서부터 농민까지 서른아홉 분의 주옥같은 글이 실려 있다. 어릴 적 추억, 고향과 가족, 생활 현장, 불의에 대한 저항 등 다양한 소재로 편집되어 있다. 삶의 향기가 나는 훈훈한 글들이다. 책에는 가슴 아린 내용도 많지만 결국은 흐뭇한 미소가 일게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정(精)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가치가 새삼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글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김선주 씨가 쓴 '자장면과 삼판주'다. 다른 글보다 뛰어나다기보다 작가가 그리는 노년의 꿈이 나의 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허영인지 모르지만 - 외롭고, 쓸쓸히, 고상하게 -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읽고본느낌 2015.10.11

물매화

설마 산 꼭대기에 물매화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천 미터나 되는 십자봉 정상 억새밭 속이었다. 이름만 들었던 물매화를 그렇게 우연히 만났다. 엄청 힘들었던 산행이었는데 물매화 때문에 모든 게 덮어졌다. 왜 물매화를 가을꽃의 여왕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순결하고 고고한 자태에 감탄했다. 수술과 암술, 꽃잎과 함께 하트 모양의 잎도 예뻤다. 사진은 실제 본 아름다움의 십분의 일도 드러나지 않았다. 서두르느라 제대로 찍지를 못했다. 재촉하는 발걸음이 아니었다면 오래 머물고 싶었던 그곳이었다.

꽃들의향기 2015.10.10

논어[161]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아직 계집 좋아하듯 곧은 마음씨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子曰 吾未見 好德如好色者也 - 子罕 15 엄숙하게 말할 수도 있는 걸 이렇게 가볍게 얘기한다는 데 공자의 매력이 있다. 겉으로는 한탄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에 대한 긍정이 읽힌다. 호색(好色)과 호덕(好德)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이성을 좋아하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인간의 본성이다. 다만 한쪽으로 치우쳐서 살아가는 게 보통 사람들이다. 그 균형을 맞추는 게 군자가 가는 길이 아닐까. 여기서 덕(德) 대신에 학(學)이나 예(禮)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삶의나침반 2015.10.09

안산과 인왕산을 넘다

희뿌연 가을이다. 서대문 냉천동에서 안산에 들었다. 작년에 가끔 찾아와 아픈 가슴을 달랬던 그 길이다. 일 년이 지났다. 상처는 아무는 듯 하다가 다시 저려온다. 생각만 하면. 전화 벨이 울렸다. 베낭에서 꺼내다가 끊어졌다. 고종사촌 이름이 떠 있다.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계속 통화중이었다. 병환 중인 고모부 얼굴이 떠올라 산길이 시무룩했다. 너는 왜 이 땅에 와서 이렇게 천대 받고 있는 거니? 생긴 대로 살아가는 서양등골나물은 그저 억울할 뿐이다. 안산 정상을 지난 후 무악재역으로 내려왔다. 배가 고파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육교를 건너 홍제동에서 인왕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달동네 골목길을 헤매다가 겨우 입구를 찾았다. 기차놀이 하지 않을래요? 기차바위에서는 낯선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을 붙이고..

사진속일상 2015.10.08

좋은 세상

지난달에 영국으로 연수를 간 조카가 외국 생활의 일면을 가끔 전해준다. 런던에 방을 얻고 세간살이를 장만하는 것부터 한국과 비교하면 너무 늦어 불편하다고 하소연이다. 인터넷을 신청했더니 일주일 만에 와서 설치해 주더란다. 너무 느린 나라에 오니 적응이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쁘게 사는 한국 사람이 불쌍해 보이더라고 말한다. 생활의 편리함을 음지에서 지탱해 주는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보인 것이다. 얼마 전에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보험회사에 연락했다. 기계음이 들리면서 위치 추적을 허용하시겠느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10분 뒤에 바로 기사가 도착했다. 있는 곳을 말해 줄 필요도 없었다. 신속 정확도 좋지만 너무 잽싸니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 제일이라고 할 만하..

참살이의꿈 2015.10.07

시골 똥 서울 똥

두 달 전 일본 야쿠시마에 갔을 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그곳 산에서는 똥을 누면 비닐에 담아서 내려와야 했다. 화장실은 소변만 볼 수 있었다. 오염이 된다는 게 이유였지만 너무 깔끔을 떠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는데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나라의 잿간 같은 방식을 활용하면 굳이 똥주머니를 배낭에 담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일하고 계시는 안철환 선생이 쓴 순환 농업에 관한 책이다. 선생은 쓰레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순환 농업에서 지속 가능한 삶을 찾는다. 똥과 음식물 찌꺼기, 잡초와 농사 부산물 등으로 퇴비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사람은 거기서 소출된 것을 먹고 살며, 나머지는 다시 경작지로 돌아간다. 근대적 농법 이전에 수천, 수만 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해..

읽고본느낌 2015.10.06

솔깃 / 최재경

읍내 다방이 신장개업을 하면서 마담도 새로 오고 배달하는 아가씨도 둘이나 따라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무 개가 넘는 마을로 순식간에 번졌다 모두 솔깃하였지만, 그 놈의 체면 때문에 내놓고 좋아라 하는 눈치는 뒤로 꿍쳤다 스피커소리가 밖에서도 들리게 뽕짝으로 조지는 관광버스 막춤 음악이 흘러나왔다 화환인지 꽃다발인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위아래를 흔들려 차를 날랐다 젊은 것들은 가겟방에서 노닥거리며 해가 식기를 기다렸고, 나잇살이나 있는 이들은 둘러앉아 내가 누구이며 어디 사는 거시기고 머시기 타령이다 뻔한 뻥튀기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럴 때마다 여자들은 착 달라붙어 시키지도 않은 비싼 쌍화차나 칡즙을 저희들 맘대로 시켜먹었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하나 둘씩 일어선다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다보..

시읽는기쁨 201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