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 30

2015년 과학사진

미국과학진흥협회에서 펴내는 에서 2015년의 과학 사진을 발표했다. 올해 잡지에 실린 사진 중에서 주목을 받은 10장을 골랐다. 어지러운 세상사 뉴스보다는 이런 소식이 더 반갑고 담박하다. 과학은 인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탐구와 연구를 통한 결과물은 자연에 대해 경외감을 품게 한다. 안다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아름답다. 1. 토성에 내리는 헬륨 비 다이아몬드에 레이저를 발사해 토성 내부에서 생기는 헬륨 비를 재현하고 있다. 2. 이상한 날개를 가진 익룡 중국에서 발견된 익룡 '이치'의 상상도로 현생 조류의 조상이다. 박쥐처럼 깃털이 없는 날개를 가졌으며, 비둘기 정도의 크기다. 3. 먹이 경쟁에서 밀려나는 북극곰 지구온난화로 북극곰의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회색곰과 먹이를 놓고 경쟁하는..

길위의단상 2015.12.31

투명인간

소설을 읽으며 영화 '국제시장'과 내내 비교되었다.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얘기를 풀어가는 결은 다르다. 영화가 가족을 위해 고생하며 오늘의 풍요를 이룬 세대의 자부심을 그렸다면, 소설 은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 이런 관점의 영화가 제작되어 '국제시장'과 대비시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러 화자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주인공은 만수다. 부자였던 할아버지가 일제 때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재산을 다 잃고 화전민이 사는 산골로 숨어든다.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가 못마땅해 글공부는 버리고 억척같이 땅을 일구며 가족을 부양한다. 만수는 육 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외모는 볼품없고 형제들 중 머리도 제일 나쁘지만 심성은 착하기 그지없다. 오직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읽고본느낌 2015.12.30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 / 이창숙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고만례 할머니는 어느 여름 저녁 모깃불 피운 멍석에 앉아 밤하늘에 솜솜 박힌 별을 세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대 그때, 머리에 커다란 짐을 인 아줌마가 사립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더래 저녁도 못 먹었다는 아줌마에게 있는 반찬에 남은 밥을 차려준 뒤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펴보던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놋양푼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지 뭐야 며칠 뒤 있을 할아버지 제사 때 떡과 나물과 전을 담으면 좋을 것 같았지 한 개에 삼백 원이라는 놋양푼을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문질러 보다 할머니는 은근하게 흥정을 했대 "세 개 살 테니 천 원에 주슈." 열무 비빔밥을 한입 가득 떠 넣던 놋양푼 아줌마는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고 거절했대 하지만 할머니는 조르고 또 졸..

시읽는기쁨 2015.12.29

경안천 갈대밭

경안천 양안은 가을이 되면 갈대밭으로 변한다. 억새도 가끔 보이지만 대부분이 갈대다.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군락인 것 같다. 천을 따라가며 규모가 아주 크다. 갈대는 단정치 못한 외모와 색깔로 볼품은 별로다. 만약 억새밭이었다면 훨씬 더 장관이었을 것이다. 경안천에도 군데군데 하천공원을 만들고 있다. 나무와 잔디 심고, 운동기구 갖다 놓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모양새는 식상하다. 이곳에 공원을 만들 것이라면 이왕이면 갈대나 억새를 주제로 하면 좋겠다. 자연 생태계를 최대한 살리면서 갈대 사이로 오솔길을 낸다면 멋질 것 같다. 그리고 천변 둑을 볼 때마다 나무 없이 휑한 게 너무 아쉽다. 둑을 따라 미루나무를 심으면 어떨까. 포플러도 괜찮다. 옛날에 신작로를 따라 도열한 키다리..

꽃들의향기 2015.12.28

직리천

매일 두세 시간은 산책을 하자고 연말이 되어서야 다짐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신선한 공기와 밝은 햇살이다. 집 주변에서 가장 걷기 좋은 곳은 경안천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경안천의 지류인 직리천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경안천에는 많은 지류가 있다. 그중에서 집 가까이 직리천이 있다. 직리천은 영장산에서 발원해서 태전동을 지나 경안천으로 흘러든다. 중간에 목리천과 중대천과 만난다. 셋 중에서는 직리천이 중심이다. 직리천과 중대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중대천은 고불산 밑에서 시작해 중대동을 거쳐 직리천과 합류한 뒤 경안천으로 들어간다. 직리천은 위로 올라가도 천의 폭이 상당하다. 겨울이라 수량은 빈약하다. 지금은 도시 개발로 볼품없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어엿한 냇물이었을 것이다. 산책로가 ..

사진속일상 2015.12.27

사람도 다 썩었다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서 어느 사진작가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이 분은 서울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국화빵 장사를 하며 지내고 있다. 기자에게 한 말 중 뼈 아팠던 게, "한국은 나라만 썩은 게 아니라 사람도 다 썩었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었다. 이 분은 일본에서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받은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고 한다. 주변에서 한국으로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20년 만에 귀국했다. 그러나 실제 마주친 한국은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었다. 일본은 가지지 못한 자의 설움이 한국보다 훨씬 덜하다고 한다. 월세 산다고 서럽지 않다. 주인에게 비굴할 일도 없다. "모두가 썩었다"는 표현이 충격적으로 들렸다. 썩은 물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썩은 줄을 모르는 법이다...

참살이의꿈 2015.12.26

논어[175]

선생님 말씀하시다. "'효성스럽지! 민자건은'이란, 제 부모 형제들의 말이지만 트집 잡을 수가 없군." 子曰 孝哉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 - 先進 4 기록된 민자건의 효행은 이렇다. 민자건을 낳은 어머니가 죽은 뒤 새 어머니가 들어와서 아들 둘을 낳았다. 어느 겨울날에 민자건이 아버지를 위해 수레를 몰다가 말고삐를 놓쳤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보니 동상이 걸려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무척 얇았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가 보니 후처 소생의 두 아들은 두툼한 옷을 따스하게 입고 있었다. 아버지는 후처와 헤어지려 했다. 이때 민자건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홑옷을 입지만, 어머니가 떠나시면 세 아들이 추위에 떨게 됩니다[母在一子單 母去三子寒]." 아버지는 감동하여 이혼하지 않..

삶의나침반 2015.12.25

버버리 곡꾼 / 김해자

봄여름가을 집도 없이 짚으로 이엉 엮은 초분 옆에 살던 버버리, 말이라곤 어버버버버밖에 모르던 그 여자는 동네 초상이 나면 귀신같이 알고 와서 곡했네 옷 한 벌 얻어 입고 때 되면 밥 얻어먹고 내내 울었네 덕지덕지 껴입은 품에서 서리서리 풀려나오는 구음이 조등을 적셨네 뜻은 알 길 없었지만 으어어 어으으 노래하는 동안은 떼 지어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 돌팔매도 멈췄네 어딜 보는지 종잡을 수 없는 사팔뜨기 같은 눈에서 눈물 떨어지는 동안은 짚으로 둘둘 만 어린아이 풀무덤이 생기면 관도 없는 주검 곁 아주 살았네 으어어 버버버 토닥토닥 아기 재우는 듯 무덤가에 핀 고사리 삐비꽃 억새 철 따라 꽃무덤 장식했네 살아서 죽음과 포개진 그 여잔 꽃 바치러 왔네 세상에 노래하러 왔네 맞으러 왔네 대신 울어주러 왔네 어..

시읽는기쁨 2015.12.23

라면을 끓이며

김훈의 산문집이다. 새로 쓴 글도 있고, 예전에 발표되었던 글도 들어 있다. 밥, 돈, 몸, 길, 글 등 다섯 가지 주제로 글이 묶여 있다. 작가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읽을 수 있으나 잡화점에 들어간 듯 산만한 감도 있다. 글은 역시 김훈 만의 색깔이 드러난다. 문체만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길이 특이하다. 작가의 안테나는 세상살이의 스산함에 주파수가 맞춰 있는 것 같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모든 문장에 들어 있다. 작가는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이 글을 쓰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김훈의 글에서는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가 묻어난다. 글 쓰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런 진지함이 느낌의 깊이를 아득하게 한다. 사소해 보이는 존재나 현상에서도 의미를 찾아낸다. ..

읽고본느낌 2015.12.22

WR124

우주에는 온갖 종류의 별들이 모여 산다. 그중에서 울프-레이예(Wolf-Rayet) 별이라 불리는 매우 극적인 삶을 사는 별이 있다. 울프-레이예는 태양 질량의 20배가 넘는 거성으로 뜨겁고 격렬하게 에너지를 방출한다. 표면 온도가 수만 도에 이르는데 거센 항성풍이 별의 물질을 우주로 흩날린다. 손실량이 태양의 10억 배나 된다. 그래서 별의 수명은 수백만 년에 불과하다. 보통 별 수명의 천분의 일밖에 안 된다. 사람으로 치면 한 달도 못 사는 셈이다. 울프-레이예는 별 중에서 가장 굵고 짧게 산다. 최후는 장렬한 초신성 폭발로 막을 내릴 것이다. WR124는 울프-레이예 별에 속한다. 별에서 날아간 물질들이 별 주위에 성운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초속 수천 km의 속도로 팽창 중이다. 성운의 지름은 6..

길위의단상 2015.12.21

논어[174]

선생님 말씀하시다. "회는 내게 도움이 되는 애가 아니야! 내 말이라면 거저 좋아만 하니." 子曰 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 無所不說 - 先進 3 공자의 화법이 재미있다. 앞말만 들어보면 안회를 나무라는 소리 같다. 그러나 뒷말이 붙어 지극한 칭찬으로 변한다. 얼마나 제자가 마음에 들고 대견하면 이런 식의 표현을 할까. 교학상장(敎學相長), 스승과 제자가 서로 배우며 성장하는 관계라지만 스승의 모든 것을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흡수해 나가는 제자가 자랑스럽지 않을 리 없다. 이런 것이 스승의 행복이다.

삶의나침반 2015.12.20

대신 뒷산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처음이다. 트레커에서 충주에 있는 계명산 등산을 하기로 했는데 눈을 떠보니 벌써 만나는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알람을 해 놓지 않은 불찰이었다. 대신 혼자 뒷산에 올랐다. 요사이는 몸이 좋지 않다. 몇 주째 계속 머리가 무겁고 어지럽다. 어렸을 때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히말라야에 갔을 때 경험했던 고산증세와도 비슷하다. 산길을 걸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그나마 기분은 좀 나아진다. 밀폐된 집안에서만 생활해서 생긴 산소 부족증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행이겠다. 무조건 밖에 나가 매일 두세 시간 정도는 산책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일주일 정도 실천해 보고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올해는 유난히 몸이 말썽을 부린..

사진속일상 2015.12.19

큰 꽃 / 이문재

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 큰 꽃 / 이문재 지난가을 등산할 때 Y가 산길 따라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고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눈에 익은 나무가 아..

시읽는기쁨 2015.12.18

여자의 탄생

지난달에 을 읽은 뒤 짝 맞추기로 찾아 읽은 책이다. 여성학자인 나임윤경 선생이 썼다. 두 책 모두 '사회 구성주의'의 관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로 길러지는 과정을 추적했다. 지은이의 개인적 경험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사회 구성주의란 인간이 그들의 신념과 이전 경험들을 바탕으로 어떤 상황과 현상에 대한 의미를 구성 혹은 만들어간다는 이론적 시각이다. 이를 남자와 여자에 적용하면, 남자의 고환과 여자의 자궁 등 생물학적인 측면을 제외한 특징들은 모두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같은 일정 상황에 있는 남성과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남성은 남성성을, 여성은 여성성을 가지도록 키워진 것이지 선천적으로 고정된 특징은 아니라는 말이다. 타고난 능력이냐, 길러진 능력이냐는 아직도..

읽고본느낌 2015.12.17

부끄러운 손

내 손은 여자처럼 작고 곱다. 신동문이 말한 '야위고 흰 손가락' 그대로다. 스스럼없는 사람은 악수할 때 놀리듯 말한다. "남자 손이 이렇게 곱다니, 쯧쯧" 그래서 악수하는 게 싫다. 남자의 크고 투박한 손에 갇히면 한방에 제압당하는 기분이다. 모임에 나가면 도착하는 순서대로 일제히 악수를 하게 된다. 고역이다. 나는 통로에서 멀찍이 자리 잡고는 손 흔들기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때도 가능하면 핑계를 대고 악수를 피한다. 못난 손을 의식하게 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다. 어렸을 때는 작고 흰 손이 자랑스러웠다. 공부하는 사람의 손이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노동과 거리가 먼 손이 결코 자랑스러울 수 없음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아채게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유약한 백면서생이라는 증거..

참살이의꿈 2015.12.16

헬조선인 이유

올해의 유행어에 '헬조선'도 후보에 오를 만하다. 한국에서 살기가 지옥 같다는 데서 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쓰이는 말이다. 어릴 때는 입시 경쟁에, 대학에서는 스펙 쌓기 바쁘고, 졸업해도 취직하기 어렵고, 그나마 직장인이 되어도 야근이 다반사다. 집 하나 장만하는 데 평생을 보내고, 돈 버느라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는 현실을 '헬조선'이라는 말이 담고 있다. 돈 없고 빽 없는 보통의 청년이 살아가기에는 참으로 갑갑한 나라다. 인터넷에서 어느 분이 우리나라가 헬조선인 이유 60가지를 TV 뉴스 화면을 캡처해서 정리했다. 자막을 정리하면 이렇다. - 한국, GDP 대비 복지 비율 OECD 최하위 - 아이들 '삶의 질' 꼴찌 - 직장인 유급휴가 한국이 '꼴찌' - 한국 아동복지 지출 OECD 최하..

길위의단상 2015.12.15

논어[173]

인격이 뛰어나기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요. 말재주에는 재아, 자공이요. 정치가로는 염유, 계로요. 문학에는 자유, 자하다. 德行 顔淵 閔子騫 염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염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 - 先進 2 공자의 간단한 인물평이다. 우리와 달리 중국은 사람을 품평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뒷담화가 아니라 공개적인 평가는 개인의 발전을 자극하는 측면에서 괜찮아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열 명은 공문십철(孔門十哲)에 대부분 포함된다. 아마 공자가 이 말을 할 당시에는 제일 뛰어난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셋을 고르라면 안연, 자공, 자로가 아닐까. 다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안연이리라. 이 뒤에도 공자의 안회에 대한 칭찬은 계속 나온다.

삶의나침반 2015.12.14

부음 / 함기석

첫눈이다 생선장수 트럭이 지나간 복대놀이터 골목 유모차에 내리는 흰 사과 꽃이다 아기가 살짝 맨발로 디디면 사과 향, 차고 흰 웃음이 간질간질 발가락을 타고 얼굴로 올라와 팔랑팔랑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소리 오늘밤 그 소리 뒤뜰에 차곡차곡 쌓인다 - 부음 / 함기석 첫눈을 죽음의 소식과 연관시킨 시인의 발상이 기발하다. 첫눈과 아기와 나비로 연상되던 이미지가 홀연히 죽음으로 치환된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하고 의아해하다가 첫눈에 대한 환호나 부음에 놀라는 마음이 서로 멀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과연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첫눈처럼 맞이할 수 있을까? 아득해진다. 가까운 분의 부음이..

시읽는기쁨 2015.12.13

선한 분노

강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사립 예술고등학교와 외국 대학에 다녔던 사람이 변했다. 자기계발서를 버렸고 혼자만 잘 산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성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세상이 어째서 이토록 잘못되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사태 때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과 희망버스가 계기가 되었다. 는 박성미 씨가 자본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랑에 대해 쓴 책이다. 책은 사랑, 돈, 혁명의 3개 단원으로 되어 있다. 제일 긴 '돈'에서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의자놀이 게임과 폰지 사기와 같은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의자놀이 게임으로 끝없는 노동을 강요하고, 폰지 사기 게임으로 풍요롭다는 착각을 심는다. 사람들은 탐욕스런 경제 동..

읽고본느낌 2015.12.12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

종편 MBN의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를 가끔 본다. 이번 주의 제목이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사는 법'이었다. 여느 분과 마찬가지로 삶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산속에 들어가 혼자의 행복을 찾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이 성대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과연 빈털터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도시의 빈털터리라면 먼저 노숙자가 떠오른다. 빈털터리란 재산도 수입도 없는 사람이다. 도시에서 돈 없이, 그것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빈털털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산속에서 홀로 살아간다. 욕심을 버리니 행복이 찾아왔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남과 비교하며 경쟁을 시키는 시스템 속에서는 평상심을 지키기 어렵다. 빈..

참살이의꿈 2015.12.11

병원 간 손주

손주는 병원을 제일 무서워한다. 엘리베이터에 타는 순간부터 울먹이기 시작해 병원에 들어가면 통곡으로 변한다. 너무 울어서 대기실에서 기다리지를 못한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도 유별나다. 예방접종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씩 치르는 소동이다. 엄마는 안쓰러워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재미있다. 병원 건물을 어떻게 아는지도 신기하고,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도 하다. 그런데 병원 문을 나서면 모든 게 씻은 듯 사라진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속도가 전광석화다. 아이의 마음에는 아무 흔적도 남은 것 같지 않다. 아이는 순간을 산다. 그게 경탄스럽다.

사진속일상 2015.12.10

논어[172]

선생님 말씀하시다. "옛 사람들이 다루던 예법이나 음악은 시골뜨기 같고, 요새 사람들이 다루는 예법이나 음악은 제법 훌륭하다지만 만일 쓰게 된다면 나는 옛 사람들 것으로부터 시작하겠다." 子曰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 則吾從先進 - 先進 1 새것을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물건이나 시대 사조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은 사람의 호기심을 끈다. 그렇다고 옛것의 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온고지신(溫古知新)이야말로 공자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다. 옳고 바른길을 분별하는 교훈을 선진(先進)에서 얻어야 한다. 이것이 참 보수의 정신이다. 현재 주위에서 보는 건 제 이익만 챙기려는 오염된 보수일 뿐이다. 온고지신은 '오래된 미래'와도 통한다. 인류는 어떻게 살아남느냐, 라는 절박..

삶의나침반 2015.12.09

백조 / 메리 올리버

넓은 물 가로질러 무언가 떠 오네- 가냘프고 섬세한 배, 흰 꽃들 가득한- 불가사의한 근육들로 움직이네 마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선물들을 메마른 기슭에 가져다주는 것이 감당하기 벅찬 행복인 것처럼. 이제 검은 눈을 돌리고, 구름 같은 날개를 가다듬고, 암회색 정교한 물갈퀴발을 끌며 오네. 곧 여기 닿겠지. 오, 나 어떻게 할까? 저 양귀비 빛깔 부리 내 손에 닿으면 시인 블레이크의 부인이 말했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이는 너무 자주 천국에 있어요. 물론! 천국으로 가는 길은 평범한 땅에 있지 않아. 상상력 속에 있지 네가 이 세상을 인지하는, 그리고 네가 세상을 찬미하는 몸짓들에. 오, 나 어떻게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저 흰 날개들 기슭에 닿으면. - 백조 / 메리 올리버 자..

시읽는기쁨 2015.12.08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리버는 미국의 생태 시인이다. 선입견 탓인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만큼 물질적이고 세속화된 나라를 대표하는 게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 책 은 올리버의 산문집이다. 산문 역시 시만큼이나 아름답다. 책에는 시도 몇 편 등장하고, 그런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도 있다. 올리버의 생각과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올리버는 자신이 셸리, 파브르, 워즈워스, 바바라 워드, 블레이크, 바쇼, 마테를링크, 에머슨, 카슨, 알도 레오폴드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분들과 사상적으로 같은 계보에 속한다. 여기에 소로우가 빠지면 안 될 것 같다. 산문을 읽으면서 올리버는 여자 소로우라 불러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초절주의 전통을 잇는 시인이다. 여든이 넘은..

읽고본느낌 2015.12.06

이게 누구로

얼마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타계했을 때 그분의 어록이 한동안 회자되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같은 명언도 있지만, 국민을 즐겁게 해 준 건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유머들이었다. 사투리 발음부터 직설적이면서 좀 모자라 보이는 말들이 화제에 올랐다. 그런 점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그중 하나에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일화가 있다. 인사를 하며 "하우 아 유"라고 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후 아 유"라고 했단다. 당신 누구냐고 물었으니 황당할 수밖에. 나중에 YS의 변명이 걸작이었다. 경상도에서는 반가운 사람과 만날 때 첫 인사가 "이게 누꼬"라고 하는데 영어로 "후 아 유"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내 고향 말투로는 "이게 누구로"다. 반가운 사람과 만날 때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오는..

길위의단상 2015.12.05

논어[171]

선생님은 사는 마을에서는 잠잠하여 말도 잘 못하는 듯, 그러나 종묘나 조정에서는 똑똑하게 말하되 오직 조심할 따름이었다. 孔子於鄕黨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 鄕黨 1 '향당' 편은 공자의 언행과 일상생활을 모아놓았다. 옷은 어떻게 입고,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상갓집과 잔칫집에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밝힌다. 공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잘 확인이 되는 편이다.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모델이 될 수 있으나, 동시에 형식주의에 갇힐 위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내용이며 정신이기 때문이다. '향당' 편은 따로따로 코멘트를 달지 않고 일독만 하며 넘어가기로 한다. 중간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마구간이 탔다. 선생님은 조정에서 ..

삶의나침반 2015.12.04

엄마와 갓난아기 / 김은영

내 동생 갓난아기 똥을 싸면 소리 내어 운다 "우리 아기 소화 잘 됐네 어쩜 똥도 이뻐라" 엄마가 기저귀 갈고 엉덩이 다독여주면 아기는 방싯방싯 웃는다 중풍 걸린 외할머니 똥을 싸면 눈을 감고 씻긴다 "잡수신 것도 없는데 똥은 왜 이리 많이 싸요 냄새는 왜 이리 구려요" 엄마가 기저귀 갈고 물수건으로 닦아 드리면 가만히 눈물만 흘린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외할머니가 엄마였고 엄마는 갓난아기였다 - 엄마와 갓난아기 / 김은영 손주가 생기고 보니 오직 내리사랑뿐이란 걸 알겠다. 한 대 더 내려갔다고 자식 키울 때와도 비교할 수 없다. 기꺼이든 마지못해든 손주를 봐주는 건 손주가 이쁘기도 하지만 내 새끼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마음도 크다. 전부 아래로만 쏠리는 사랑이다. 위와 견주면 미안하고 송구하다. 우리는 부..

시읽는기쁨 2015.12.03

갈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파스칼은 갈대를 직접 보기나 했는지 의문이다. 아니면 유럽의 갈대는 키 작은 다른 종류인지도 모른다. 갈대는 억세다. 잘못 만지면 잎에 손이 베인다. 연약한 상징으로 갈대를 말한 건 어울리지 않는다. 바람 부는 갈대밭에 서면 혁명가를 따르는 군중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자유를 향한 노도, 온몸으로 외치는 함성이 들린다. 나에게 갈대의 이미지는 그렇다. 정호승 시인이 '갈대'라는 시에서,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라고 읊은 심정과 비슷하다. 머리칼 풀어헤치고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외치는 저항의 몸짓이다. 결코 서정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억새와는 느낌이 아주 다르다.

꽃들의향기 2015.12.02

이터널 선샤인

재미있게 만든 영화다.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는 발상이 독특하다. 그러나 삭제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좋아했음을 확인하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인력에 끌려 들어간다. 둘은 다시 만나서 헤어진 비밀을 알게 되지만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진정한 연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영화는 난해하다. 시간이 역순으로 진행되고 어느 것이 기억 속 환상이고 어느 것이 실제인지 헷갈린다. 영화가 주는 의미도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끝나고 나면 이렇게 단순한 것이야, 하고 조금은 허전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사랑 영화로는 특이한 소재를 고른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기억을 아무리 지워도 사랑은 남는다. 모든 사랑은 운명적 만남이라고 해야 ..

읽고본느낌 2015.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