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 27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 아우의 인상화 / 윤동주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동생의 설은 대답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사람 꼴을 하고 있다고 다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저 시대에도 그랬는데 요즘은 오죽할까. 염치를 모르는 인간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되었다. 영화 '동주'가 개봉되었다. 꼭 보러 가야겠다.

시읽는기쁨 2016.02.29

소설가의 일

김연수 작가의 소설 작법이다. 딱딱한 교재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수필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소설 쓰기만이 아니라 인생론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건 삶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걸 모른 채 읽었다. 서가에서 훑어볼 때는 소설가의 일상에 대한 산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설가의 일상이 소설 쓰는 일일 테니 소설 작법에 관한 내용이어도 속은 것은 아니다. 이과 전공으로서 문학 원론에 관한 내용이 색다르고 흥미로웠다. 책 내용 중에서는 생각하지 않고 쓴다는 게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은이는 '감각으로 쓰고 생각하며 교정한다'고 말한다. 쓰기보다는 고치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구성을 완벽하게 결정해 놓고 소설 쓰기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한 번..

읽고본느낌 2016.02.28

남한산성 남문 느티나무(2)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에 대대적인 개축을 시작했다.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 시대의 주장성이 있던 곳이라는 게 정설이다. 2년 간의 공사 끝에 광주목이 남한산성으로 이전했고, 행궁도 완성되었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숙종 대에 다시 증축 공사를 했다. 길이 약 7.5km의 주 성곽과 외성, 옹성 등으로 되어 있고 네 개의 성문이 있다. 그중에서 한양을 오가는 주 통로가 남문이었다. 지금은 아래로 터널이 뚫렸다. 남문 앞에는 네 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토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3백 년이 넘는 세월을 견딘 나무들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 문으로 허둥지둥 도망 오던 광경을 본 나무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

천년의나무 2016.02.27

재미와 의미

재미와 의미, 둘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로 인생관이 달라진다. 한쪽 극단에 쾌락주의가 있고, 다른 쪽 극단에 금욕주의가 있다. 한쪽에서는 인생은 재미가 우선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어떤 즐거움도 의미가 없으면 헛것이라고 말한다. 재미가 있으면서 동시에 의미도 있는 일이라면 금상첨화다. 불행하게도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대부분은 둘 중 하나만 갖추어져도 만족한다. 최악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한탄이 나오는 경우다. 그러나 살면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거리는 많이 있다. 힘들게 일해도 돈 버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풍찬노숙을 할지라도 이 세상을 위해 고귀한 일을 한다는 자부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중간지대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참살이의꿈 2016.02.26

남한산성 한 바퀴

나라나 가정이나 평화를 지켜나가기는 어렵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이 충돌하면 불화가 생기고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못난 놈이 꼭 네가 틀렸다고 큰소리 친다. 오랜만에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았다. 사소한 일로 아내와 티격태격한 뒤였다. 다 부질없는 노릇이라는 걸 걸으면서 깨닫는다. 너와 나를 가르는 성벽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걸었다. 벽 하나 사이지만 나와서 보는 경치는 또 달랐다. 약간 싸늘한 겨울 공기가 상큼했다. 서울을 조망하는 전망대에서는 시선을 앗아가는 물건이 하나 우뚝하다. 거의 남한산성 정상 높이에 육박하는 롯데월드타워다.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마침 여객기 한 대가 서울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고 있다. 롯데월드타워의 거의 중간 높이로 날아간다. 멀리서 보기에는 매우 아슬아슬..

사진속일상 2016.02.25

논어[184]

자고는 어릿어릿하고, 증삼은 고지식하고, 자장은 편벽하고, 자로는 거칠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안회는 그럴 듯하지. 항상 가난하지만..... 자공은 천명을 받지 않고도 재물을 모았고 억지라도 잘 맞았다." 柴也愚 參也魯 師也벽 由也언子曰 回也 其庶乎 屢空 賜 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 - 先進 13 우리와 달리 중국은 전통적으로 인물 품평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제자의 단점을 지적한다. 공개적으로 이런 말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다만 안회에 대해서는 부족한 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안회의 가난을 보는 스승의 안타까운 심정이 비친다. 자공의 부에 대해서도 어감에서는 그다지 탐탁치 않아 하는 느낌을 받는다. 돈을 보는 공자의 태도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뭐든지 지나친 것은 ..

삶의나침반 2016.02.24

봄눈 온다 / 황인숙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雪)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나 봄비이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 - 봄눈 온다 / 황인숙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물질은 전체의 5%도 안 된다. 95%는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이다. 사람의 마음도 드러나 있지 않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안 보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실체는 그들이다. 눈에 보이고 감지되는 것은 존재의 극히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거대한 침묵 앞에서 그저 두려울 뿐.

시읽는기쁨 2016.02.23

광기와 우연의 역사

책을 한참 읽다 보면 낯익은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전에 읽었던 책임을 늦게서야 알아챈다. 옛날에 읽었던 책이란 걸 알면 왠지 싱거워져서 덮기도 한다. 이 책도 그러했지만 워낙 재미가 있어서 놓을 수가 없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필력 때문이다. 1881년에 태어난 츠바이크는 뛰어난 문장과 재미있는 내용으로 명성을 떨친 작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통합된 유럽이 만들어지리라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히틀러가 등장하자 영국으로 망명하고 다시 브라질로 이주한다. 결국 나중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절망에 빠져 1942년에 아내와 함께 자살한다. 츠바이크는 진보적 사고와 휴머니즘적 이상을 지녔던 작가였다. 1927년에 나온 는 세계사의 극적인 순간 열두 장면을 선정해서 마치 영화를 보듯 재현해 놓았다. 제목..

읽고본느낌 2016.02.22

뒷산에서

뒷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서 B 아파트로 내려가는 길을 묻는 것이었다. 우선 산에서 아이들을 만난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는 있어도 자기들끼리 산에 놀러 오는 경우는 그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요사이 아이들은 학원 다니랴 과외 하랴 어른보다 더 바쁘다. 설령 시간이 난다 해도 산으로 놀러 보낼 부모는 없다. 세상이 그만큼 험해졌다는 뜻이다. 우리가 클 때는 마을 뒷산은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는 던져놓고 어지간히 쏘다녔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들어갈 수가 없지만 그때는 어디라도 뛰어다닐 수 있었다. 산에서는 주로 전쟁놀이를 했다. 오늘 산에서 만난 두 아이도 각각 시커면 장난감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그 나이 ..

사진속일상 2016.02.21

미국은 싫어

옛날에는 커피와 설탕, 크림이 따로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각자 적당한 비율로 타 마시면 되었다. 내 입맛에는 커피 한 스푼 반에 설탕과 크림을 각각 두 스푼씩 넣는 게 제일 적당했다. 지금은 편리한 믹스 커피가 나와서 비율을 고민하지 않고 뜨거운 물에 넣기만 하면 된다. 믹스 커피는 국민의 표준 입맛이 되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믹스 커피 애호가였다. 무조건 믹스 커피, 아니면 자판기 커피만 고집했다. 수십 년간 인이 박힌 달달한 맛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믹스 커피가 건강에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하루에 두세 봉지 정도야 무슨 영향이 있겠냐 싶었다. 그런데 최근에 커피 취향이 바뀌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설탕과 크림이 없는 커피를 마셔야 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쓴 커피를 맛보면..

길위의단상 2016.02.20

논어[183]

계씨는 주(周) 천자의 경공들보다 더 큰 재벌인데, 염유가 세금으로 훑어서 더욱 더 붙도록 한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내 제자가 아니다. 애들아! 북을 치면서 조리를 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季氏 富於周公 而求也 爲之聚斂 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 鳴鼓而功之 可也 - 先進 12 원문에 나오는 '북을 치면서 공격한다'는 표현은 마치 전쟁 상황 같다. 그만큼 공자의 분노가 대단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염유는 이 사건으로 인해 공자 학당에서 파문당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권력자인 계씨 편에 붙어 그의 사익을 도왔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하게 부과해서 돈이 개인의 치부에 쓰인다는 건 공자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의 제자가 그런 일을 했다. 정치(正治)를 통해 바른 세상을 만들고자 불철..

삶의나침반 2016.02.19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비스듬히 / 정현종 한자의 '사람 인[人]'은 둘이서 기대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있는 존재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필기체로 쓸 때는 한 획이 다른 획보다 짧다. 긴 쪽을 지탱해 주느라 허덕이는 모양새다. 세상 현실의 한 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기울어짐 없이 적당한 균형을 잡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한쪽이 다른 쪽을 날카로운 창이 되어 찌르기도 한다.

시읽는기쁨 2016.02.18

사는 게 뭐라고

지난달에 를 읽고 감동해서 다시 찾아 읽은 같은 작가의 책이다. 지은이가 60대에 쓴 일기 형식의 산문집으로 사노 요코 씨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인답지 않게 사고의 스케일이 크고 솔직 담백한 점이 좋다. 이 책에는 한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항암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쉴 때 지은이는 욘사마의 '겨울연가'를 시작으로 한국 드라마에 푹 빠졌다. 한쪽으로 누워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턱이 어긋나기도 했다. 친구와 남이섬에 찾아오기도 한 한류 팬이었다. 일본 아줌마가 왜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지 궁금했는데 사노 요코 씨를 보며 약간이나마 이해가 된다. 지은이는 한류 열풍의 원인을 '허구의 화사함'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일 TV를 틀어놓고 사는 작가는 드물 것이다. 대개는 TV나 오락 프로를 멀리하려..

읽고본느낌 2016.02.17

헐렁한 게 좋아

몇 주 전에 아내가 겨울 티셔츠를 사 왔다. 색깔이나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사이즈가 95라고 포장지 비닐에 적혀 있어 더 확인하지 않은 채 라벨을 떼어버리고 옷장에 걸어두었다. 95나 100이면 내 몸에 잘 맞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옷을 꺼내 입으니 헐렁한 게 너무 컸다. 그제서야 옷에 붙은 사이즈를 보니 105였다. 포장지 표시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미 교환할 수도 없게 된 상태라 그냥 입기로 했다. 목에는 주먹 하나가 들락거리고 허리 부분은 몇 겹이나 주름이 졌다. 다행히 겨울 티셔츠라 겉옷 안에 숨어서 볼품을 따지지 않아도 되었다. 전에는 꽉 조이는 옷을 즐겨 입었다. 이 옷은 몸에 착 달라붙는 느낌은 없지만 굉장히 편안하다. 한복을 왜 편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아마 ..

참살이의꿈 2016.02.16

토성 느티나무

할머니와 엄마 뒤를 따라갔다. 머리에 보따리를 인 하얀 행렬이 마을을 나섰다. 기찻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고, 사과 과수원 사잇길을 한참 걸으면 장터가 나왔다. 사람 북적이고, 온갖 물건과 구경거리가 있는 장날이 아이들은 좋았다. 지나는 길에 토성 마을이 있었다. 느티나무도 한 그루 있었을 것이다. 오고 갈 때 잠시 발쉼을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50여 년 전 풍경을 잠시 회상해 본다. 공작이 나래를 편 듯한 느티나무가 그 자리에 있다.

천년의나무 2016.02.15

곰소

요양병원 로비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바람이 지나갈 만큼 텅 비었다. 누굴 기다리기 위해 입구에 나와 있는 걸까? 그러나 찾아온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다. 당숙은 젊은 시절 고생한 이야기를 고장난 카세트처럼 줄기차게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본인의 일생을 억울해하며 한탄했다. '백세 인생'은 HD TV의 화려한 색깔이 아니다. 우리는 긴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테스트 받는 첫 세대다. 일찍 저세상으로 간 사람이 축복이었다는 말을 듣게 되는 일만은 제발 없기를..... 요양병원 건물 외벽은 알록달록 무지개 색깔로 단장되어 있어 서글픔을 더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빠져나간 곰소 앞바다는 너무 쓸쓸했다.

사진속일상 2016.02.15

논어[182]

자공이 묻기를 "자장과 자하는 누가 더 잘났을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지근하다. "그러면 자장이 더 나은가요?" "지나친 것은 미지근한 것과 같다." 子貢問 師與商也 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 先進 11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나오는 대목이다. 자공은 그래도 지나친 게 낫지 않느냐고 재차 물어본다. 지나침이나 모자람이나 '균형[中]'에서 벗어난 상태다. 오히려 지나친 것이 큰 화근이 될 때가 많다. 현대 문명이 그렇다. 지나치고 넘쳐나는 게 만병의 근원이 된다. 결핍보다 과잉의 독소가 무섭다. 긴스버그의 시 '너무 많은 것들'이 생각난다. 너무 많은 공장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맥주 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 . 너..

삶의나침반 2016.02.12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고운 우리말 하나를 배웠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다. '물비늘'과 비슷하지만 '윤슬'이 좀 더 신비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

시읽는기쁨 2016.02.11

디 마이너스

1990년대 후반의 대학 생활을 그린 손아람의 장편소설이다. 90년대 학번은 대학에서 마지막 운동권 세대라 할 수 있다. 전대협과 한총련으로 이어진 학생 운동 그룹은 NL과 PD 계열로 나누어지고 후반에는 연대회의와 전학협이 주도했다. 이 소설 는 연대회의에서 활동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이상과 갈등, 사랑, 대학 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다.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서 점차 힘이 떨어지는 게 아쉽다. 내 대학 시절과 비교하면 학생들의 의식에서 굉장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90년대는 제도적으로는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그래서 투쟁의 내용도 우리와는 달랐다. 정치적 이슈보다는 경제 불평등의 개선에 비중이 커졌다. 학생 운동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 뒤로 대학은 자본의 논리에..

읽고본느낌 2016.02.10

2016 설날

전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나 시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고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나 시를 보기 어렵다.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 세대가 '고향'이 주는 정감을 전처럼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유목민적 삶을 사는 현대인은 삶의 뿌리를 상실했다. 고향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면 명절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느끼듯 예전의 그 명절이 아니다. 마치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설날이 지나갔다. 그래도 뜸하게 만나는 형제, 친척에게 애틋한 마음이 어찌 없으랴.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 올 설은 특별했다. 둘째네가 손주를 데리고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막냇동생도 내려와 14년 만에 삼 형제가 함께 모였다. 조카네까지 오랜만에 집안이 북적였다. 어머니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너무 길었던 기다림이었다.

사진속일상 2016.02.09

논어[181]

선생님 말씀하시다. "유의 거문고를 왜 내 집 문안에서 켜게 하는고." 제자들이 자로를 업신여겼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유는 제법 당상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아직 방안에만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子曰 由之琴 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 先進 10 당시에 악(樂)은 기본 교육과정 중 하나였으므로 누구나 악기 연주를 배웠을 것이다. 각자가 이른 수준에 따라 연주하는 장소도 달랐던 것 같다. 자로는 아직 방에 들 정도는 안 되었다. 스승에게 퇴짜 맞은 자로를 제자들이 업신여기자 스승은 자로를 변호한다. 당상에 오른 실력만도 제법이다. 무인 기질인 자로의 거문고 연주를 다른 제자들과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공자의 개인별 맞춤식 교육과 함께 제자들 사이의 갈등도 살짝 엿보이는 ..

삶의나침반 2016.02.05

소스라치다 /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소스라치다 / 함민복 경안천에는 오리가 많다. 경안천을 걷다 보면 천변 풀섶에서 먹이를 먹는 오리를 만난다. 방해하지 않으려 피해서 걷지만 오리는 인기척만 느껴도 천 가운데로 도망간다. 미안하다. 어떤 때는 너무 예민한 그들이 야속할 때도 있다. 시에 나오는 뱀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그마한 곤충을 만나도 놀란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건 오히려 지상의 다른 생명들이다. 덩치가 산더미만 한 인간이 다가오는데 위협을 느끼지 않을 동물이 있을까. 역지사지해야 한다. 지상에서 인간보다 더 무서운 동물은 없을 것이다. 인간만 모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16.02.04

알파고

지난주에 깜짝 놀랄 만한 뉴스가 있었다. 구글에서 개발한 바둑 대국 프로그램인 '알파고(Alpha Go)가 유럽 챔피언인 중국인 프로기사 2단을 5:0으로 이겼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이세돌 9단과 대결한다. 컴퓨터가 이렇게 빨리 인간의 능력에 도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온 바둑 프로그램은 아마 3, 4단 수준 정도다. 어느 정도 바둑을 두는 사람은 컴퓨터와 게임을 하는 게 싱겁다. 그런데 알파고는 몇 단계를 뛰어넘어 프로의 수준까지 올라갔다. 방법은 잘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 최적의 수를 찾아내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앞으로 인공지능의 능력은 어떻게 발전할지 상상하기 어렵다. 체스에서는 오래전에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다. 그러나 바둑..

길위의단상 2016.02.04

동해

딸은 손주 재롱을 보여주려고 자주 영상 통화를 이용한다. 그런데 영상은 실물을 더 보고 싶게 만든다.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생기듯이. 어느 날 아침, 영상으로 손주 얼굴을 보다가 직접 가보자, 하고 동쪽으로 차를 몰다. 세 시간을 달려야 닿는 바닷가 작은 마을이다. 손주와 한참 깔깔거리다 보면 누가 재롱을 부리는 건지 헷갈린다. 동선을 같이 따라다니느라 나중에는 내가 먼저 지친다. 그래도 즐거운 중노동이다.

사진속일상 2016.02.03

위미리 동백

2년 전 올레길을 걸을 때 우연히 만났던 위미리 동백이 궁금해 다시 찾아가 보았다.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위미리는 동백과 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제주도의 마을이다. 돌담을 따라 키 높은 동백나무 아래로 뚝 뚝 떨어진 동백이 붉었다. 밭에는 수확하지 못한 귤도 마구 떨어져 있었다. 올해는 감귤 값이 폭락해 아예 수확을 포기한 농가가 많다고 한다. 동백이나 인간의 일이나 속절없음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탄식은 한순간일 뿐, 아랑곳없이 꽃은 핀다.

꽃들의향기 2016.02.03

죽는 게 뭐라고

죽음을 앞두고 어쩌면 이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연한 삶의 자세가 경이롭다. "나는 처음에 암에 걸렸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암 선고를 받고도 태연자약했다. 암은 좋은 병이라며, 자신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의 목숨이 우주보다도 귀하다는 데 의문을 제기했다. 는 일본 작가인 사노 요코(佐野洋子) 씨가 암과 동행하며 쓴 에세이집이다. 지은이는 유방암이 온몸으로 전이되어 2010년,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책의 원제목은 다.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기에 죽음도 미련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른다. 사랑을 모조리 쏟아부었다면 오히려 생과 사에 초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산 사람만이 잘 죽을 권리를 가진다. 목숨에 집착하는 걸 생명의 본성이라고 단정..

읽고본느낌 201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