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 22

아무래도 괜찮아

늙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라고 젊었을 때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보니 다른 세계가 열린다. 늙으면 늙은 대로 맛이 있다는 걸 젊은 시절에는 알아챌 수 없다. 인간은 적응력이 무척 뛰어난 동물이다. 몸이 아파도 처음에는 저항하지만 이내 받아들인다. 나이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체력이 떨어지고 다리 힘이 없어지면 가고 싶은데도 가지 못한다. 어디든 쏘다닐 수 있는 젊은이로서는 불쌍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면 다니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다. 모든 것에 심드렁해지니 멀리 못 나가도 아무렇지 않다. 동정을 받을 이유가 없다. 대신에 다른 즐거움이 생긴다. 좋게 말하면 관조의 편안함이다. 몸은 늙어가는데 마음은 청춘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별로 내세울 게 아니다. 몸이 늙으면 마음도 늙어..

참살이의꿈 2016.03.31

남한산성 복수초

남한산성에서 복수초를 만나다. 성벽 바깥쪽을 걷다가 혹시나 했는데 노란 복수초가 있었다. 이미 잎이 많이 자란 만개 상태였다. 늘 사람으로 붐비는 남한산성 길옆에 복수초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진을 찍느라 생육 환경이 망가지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아예 카메라를 갖고 다니지 않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예쁜 모습을 담고 싶은 욕망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봄꽃 중에서 제일 찍기 어려운 게 복수초다. 배경 정리가 너무 힘들다. 이제껏 한 번도 마음에 드는 복수초 사진을 찍어보지 못했다. 눈을 뚫고 핀 복수초를 만나지 않는 한 이런 실망감은 계속될 것 같다.

꽃들의향기 2016.03.29

오랑캐꽃 / 이용악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도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미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은 제비꽃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제비꽃보다 오랑캐꽃으로 많이 불렀다. 오랑캐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이름이 그리 되니 괜히 밉상 취급을 받는다. 우리가 오랑캐라 불렀던 여진족도 마찬가지다. 내 이해와 어긋나니 오랑캐라 불릴 뿐 핍박을 받도록 태어난 건 아니다. 중국이 우리를 동이(東夷)라 부르며 오랑캐 취급을 ..

시읽는기쁨 2016.03.28

논어[188]

선생님이 광 지방에서 난을 당했을 때 안연이 뒤처졌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이 계신데 어떻게 죽겠습니까?"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 - 先進 17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스승의 제자 아낌과 제자의 스승 공경이 짧은 대화 속에 오롯이 들어 있다. 공자와 안회는 스승-제자를 넘어 학문적 동지였고 가족 이상의 관계였다. 안회가 죽었을 때 공자는 자식을 잃었을 때보다 더 슬퍼했다. 노나라를 떠나던 해에 공자 일행은 광 지방에서 곤경을 겪는다. BC 497년, 공자 나이 55세 때였다. 안회는 25살 청년이었다. 이때부터 14년 동안의 제후국 편력이 시작된다.

삶의나침반 2016.03.27

마쿠라노소시

11세기 초에 일본의 궁녀였던 세이쇼나곤이 쓴 수필집이다. 세상과 자연을 보는 여성의 감성이 고운 문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천 년의 격차가 있지만 현대적 감각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책 제목에서 '마쿠라(枕)'는 베개를, '소시(草子)'는 묶은 책을 뜻한다. 즉, 마쿠라노소시는 '베갯머리 책'으로 여성의 사적인 감상록이라는 의미가 짙다. 그렇더라도 책을 읽으며 일본 문학의 전통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는 302편의 글이 있다는데 내가 읽은 것은 37편만 발췌한 축약본인 게 아쉬웠다.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는 완역본이 없는 것 같다. 글은 궁중생활이 중심이 되어 있으나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남녀관계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한다. 당시 일본인의 풍습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천 년 전..

읽고본느낌 2016.03.26

산동 산수유

풍악 소리에 이끌려 끊임없이 차들이 몰려든다. 축제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꽃나무 아래 앉아 가족끼리 도시락을 펴놓고 느긋하게 꽃구경할 생각이라면 '축제' 자가 붙은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한다. 구례군 산동면에서 열리는 산수유 축제장도 마찬가지였다. 가능하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찾아다녔다. 차분하게 꽃을 맞을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우리 동네 뒷산에 핀 한 그루 산수유에서 더 봄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꽃들의향기 2016.03.25

평사리 푸조나무

하동 평사리 상평마을 최참판댁 부근에 있는 정자나무다. 수령 500년, 높이 25m, 둘레 4.5m 되는 거목이다. 금줄이 둘러 있는 걸로 봐서도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나무란 걸 알 수 있다. 매년 섣달 그믐날 자정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고 한다. 나무 옆에는 조선 영조 때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세운 위민정(慰民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때는 정자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휴식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실제로 여기서 내려다 보는 악양 들판은 산, 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양반이 아닌 소작농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을지 모르지만....

천년의나무 2016.03.24

평사리 건팽나무

건팽나무는 처음 들어본다. 비슷한 이름으로 검팽나무가 있는데 둘이 같은 나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내문에는 분명히 '건팽'으로 적혀 있는데, 나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하동 섬진강변에 있는 이 나무는 수령이 300년이 되었다. 나무 높이는 20m, 줄기 둘레는 5.2m다. 지금은 공원으로 변한 이 자리도 예전에는 강변 마을이 있었던 것 같다. 안쪽과는 도로로 격리되어 지금은 강 따라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가끔 찾을 뿐, 인적 드문 곳이 되었다.

천년의나무 2016.03.24

4:1

전혀 예상 못했다. 과연 컴퓨터가 얼마나 인간 수준에 육박했을까, 궁금한 정도였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4:1로 이긴 것이다. 체스는 몰라도 바둑은 안 된다고 누구나 말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무서웠고, 이세돌이 고전 끝에 첫 판을 항복했을 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저녁 야탑의 먹자골목에서 소주를 들이킨 건 바둑의 영역마저 기계에 내준 허전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계의 계산 능력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인간의 창의성을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기보를 입력해서 학습한 알파고가 변칙수에 정확히 대응할 수 없으리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프로기사도 예상 못한 멋진 수를 두었고 결국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수..

길위의단상 2016.03.21

논어[187]

자로가 묻기를 "듣는 즉시 실행할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형들이 계신데 어떻게 듣는 즉시 실행할 수 있을까!" 염유가 묻기를 "듣는 즉시 실행할까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듣는 즉시 실행해야 한다." 공서화가 말하기를 "유가 '듣는 즉시 실행할까요?' 한즉 '부형이 계신다' 구가 '듣는 즉시 실행할까요?' '듣는 즉시 실행하라' 하시니, 저는 어리둥절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구는 머뭇거리므로 몰아센 것이고, 유는 곱절이나 서두르므로 멈칫하게 한 것이다."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염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公西華曰 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 先進 16 과하면 누르고 모..

삶의나침반 2016.03.20

서울둘레길 걷기(15)

동면을 끝내고 서울둘레길 걷기를 재개했다. 지난해에는 매월 두 번씩 만나 14회에 걸쳐 7코스까지 걸었다. 이제 남은 건 북한산둘레길과 겹치는 8코스다. 이 코스는 길어서 네 구간으로 나누어 걸으려 한다. 8코스 시작은 구파발역이다. 진관내천을 따라 북한산에 드는데 은평뉴타운 가운데를 지난다. 따스한 봄기운이 가득한 날, 이내 겉옷을 벗어야했다. 길은 계단이 많고 오르내림도 잦지만 겨우내 굳은 몸을 풀기에는 적당했다. 계속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친구의 거친 숨이 막았다. 녹번동 방향으로 하산해서 녹번역에서 걷기를 마감했다. 네 명이 함께 했다. * 걸은 시간: 3시간(10:00~13:00) * 걸은 거리: 6km * 걸은 경로: 구파발역 - 선림사 - 하늘전망대 - 장미공원 - 녹번역

사진속일상 2016.03.19

대주(對酒) /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 隨富隨貧且歡樂 不開口笑是痴人 - 對酒 / 白居易 첫 구는 에 나오는 예화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혜왕에게 대진인이 이 비유로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가 있는데 촉씨라하고,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는 만씨라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 땅을 다투며 수시로 전쟁을 하는데 전사자가 수만이라 합니다. 패배자를 쫓을 때는 십오 일 이후에나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우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달팽이 뿔 위의 다툼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하물며 재물의 많고 적음이야 티끌만도 못한 것이니 이 세상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시인은 술잔을 마주하고 권한다...

시읽는기쁨 2016.03.17

본래 그 자리

내 생각이란 게 있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선인이 말했듯,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전 세대 사람들이 했던 사유의 잔해에 불과하다. 나만의 생각은 없다. 맹난자 선생의 를 읽다가 든 생각이다.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생과 사, 영혼, 존재의 의미 등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수도자는 일생을 바쳐 정진한다. 이 질문에 바탕하지 않은 철학이나 예술은 없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고비에서는 이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 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지은이의 지적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책에는 동서고금의 철학자, 사상가, 예술가, 종교인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삶과 생각을 보여준다. 백과사전식 나열이 아니라 지은이의 의도에 따른 흐름이 있어 중..

읽고본느낌 2016.03.16

시시하다

시시포스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큰 바위를 죽을 힘을 다해 산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바위는 저절로 산밑으로 굴러내린다. 그러면 다시 꼭대기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영원한 형벌이다. 시시포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통과 절망 속에서 비탄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시시포스는 아마 인생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통을 고통으로 알아챌 때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인생을 장밋빛으로 낙관할 때 고통은 고통이 된다. 삶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면할 때 살아낼 힘이 생긴다. 시시포스의 힘이다. '시시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단한 데가 없어서 보잘것없다'로 나와 있다. 그렇다. 인생을 시시하다고 보는 데서 시시포스의 힘이 생긴..

참살이의꿈 2016.03.14

논어[186]

선생님 말씀하시다. "말솜씨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진실한 인물이라고 할까! 볼품만 좋은 사람이라고 할까!" 子曰 論篤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 - 先進 15 공자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운 분이다. 군자란 언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말솜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언변이 화려하고 논리정연하면 외화내빈인 경우가 흔하다. 겉은 볼품 없으나 안이 실한 게 낫다. 그래서 '자로' 편에서는 질박함[木]과 어눌함[訥]이 인(仁)에 가깝다고 했다. 말과 주장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사는지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

삶의나침반 2016.03.11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 이육사 어느 정치인이 "광야에 나가 죽어도 좋다"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광야란 무엇일까. 광야라고 하면 육사의 광야나 예수의 광야가 우선 떠오른다. 이 정도 우주적 스케일이거나 실존적 체험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쉬이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정치꾼..

시읽는기쁨 2016.03.09

화장 안 하는 여자

두 달 전에 대만에서는 야당인 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었다. 대만에서는 첫 여성 총통이어서 화제를 모았다.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족 출신으로 1956년에 태어나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교수를 하다가 정치에 입문했다. 민진당 주석에 올라 이번 총통 선거에서 승리하고 집권했다. 차이잉원의 당선에는 진보적 성향과 함께 그녀의 개인적 매력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것은 차이잉원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소개였다. 사진을 보니 꾸밈없는 수수한 얼굴 그대로였다. 얼굴에서는 그녀의 강단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화장 안 하는 여자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여자가 아름답게 보이려는 걸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남자도 강하고 씩씩하게 보이려 어지간히 애쓴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

길위의단상 2016.03.08

나의 생명 수업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지은이의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서남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성호 선생이 20여 년간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줄기에서 만난 자연의 벗들과 만나고 대화한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뒷산이라고 표현한 학교 가까이 있는 산이 제일 많이 등장한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생명체가 주인공들이다. 선생의 관심은 다양하다. 풀과 나무 같은 식물에서 어류, 조류, 포유류 등 범위가 넓다. 버섯이나 오색딱따구리처럼 수개월 넘게 매달리기도 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생명을 대하는 지은이의 따스한 마음이 감동을 준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큼 사랑하느냐다. 집 앞에서 자라는 풀 한 포기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거기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 닭의장풀에 대해 ..

읽고본느낌 2016.03.07

의암호에서

사람과의 친밀감은 공유하는 추억의 깊이에 비례한다. 아무리 폭이 넓다 한들 세월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년과 십대 시절을 함께 말할 수 있는 사이라면 부지불식간에 서로의 온기로 따스해지게 된다. 누추한 현실을 버티는 힘의 상당 부분이 추억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기억은 무척 주관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같은 시공간의 경험이라도 같지는 않다. 수면 위로 떠오른 파편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선만 그려진 도화지에 제 나름대로 채색을 해 놓은 게 기억인지 모른다. 저장된 게 아니라 만들고 가공한 것이다. 그렇게 공유하는 추억으로 너에게 손을 내밀지 않아도 너는 가까이 있다. 의암호를 바라보는 춘천의 한 카페를 찾았다. 아메리카노 대신 카페라테를 주문하길 잘했다. ..

사진속일상 2016.03.06

논어[185]

자장이 사람을 잘 지도하는 방법을 물은 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차근차근 밟아가지 않으면 깊은 방속까지 들어갈 수가 없다." 子張問 善人之道 子曰 不踐迹 亦不入於室 - 先進 14 중학생일 때 본 영어 참고서 속 표지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공부에 왕도(王道)는 없다." 공부를 손쉽게 하는 방법은 없으니 꾸준하게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지금은 이해한다. 여기 나오는 공자 말씀을 들으니 그때의 문구가 떠오른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씩 밟아가는 수밖에는 없다. 그 작은 걸음이 모이면 훌쩍 앞으로 나아간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산길을 걸을 때처럼. 봉우리에 닿아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봉우리가 까마득하지 않은가. 모든 건 작은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삶의나침반 2016.03.04

인왕산 자락길

늙으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반대다. 아침 일고여덟 시가 되어야 겨우 일어난다. 삼삼회에서 인왕산에 오르기로 하고 10시에 경복궁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약속을 못 지켰다. 근래 벌써 두 번째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해서 정상으로 따라가지는 못하고 대신 손쉬운 인왕산 자락길을 걸었다. 인왕산 남쪽 자락을 따라 3.2km의 길이 숲 속으로 꼬불꼬불 나 있다. 가볍게 걷기에 적당한 길이다. 산에 올랐던 일행과 끝 지점인 창의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작점은 사직단이다. 단군성전 옆 길에는 어천절(御天節)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어천절이란 이름이 생소한데 단군이 승천한 걸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자락길은 사직단 - 단군성전 - 황학정 - 택견수련터 - 수성동계곡 - 버드나무약수터 ..

사진속일상 201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