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 33

마왕 신해철

이태 전에 가수 신해철 씨가 수술을 받던 중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신해철 씨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어쩌다 가요무대만 보는 수준의 음악 소양이라 록 쪽은 완전한 문외한이다. 사고 이후 나오는 보도를 보고서 신해철 씨가 대단한 분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마왕'이라는 별칭이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은 그의 유고집이다. 생전에는 그의 음악 한 곡 들어보지 못했지만 글을 통해서나마 신해철을 만나게 되었다. 책의 유익한 점이 이런 것이다. 만날 수 없는 사람과도 서로 마음의 대화를 할 수 있다. 물론 일방적이긴 하지만. 신해철 씨는 음악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재질이 뛰어난 분 같다. 글에서는 천재의 자질이 읽힌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보다는 몇 단계 위에..

읽고본느낌 2016.05.31

자유죽음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한들 실제 죽을 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옛날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노예에게 이렇게 외치게 시켰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어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을 겪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연사보다는 태반이 이런저런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옆에서도 힘든데 당사자는 오죽하랴 싶다. 그럴 때마다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죽느냐가 정말 심각한 문제다. 몇 해 전에 본 인도 영화 '청원'이 생각난다. 전신마비가 되어 마지못해 살아가는 전직 마술사인 주인공은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법원에..

참살이의꿈 2016.05.30

은고개에서 샘재로

제대로 배낭을 꾸려 산에 오르는 게 일곱 달 만이다. 몸 테스트를 할 겸 남한산성의 남북 종주 코스를 골랐다. 광주 은고개에서 하남 샘재까지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직선 길이다. 길이 12km에 다섯 시간 정도 걸린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다. 산에서까지 사람들로 북적대는 건 싫다. 그러나 기우였다. 적막강산 속을 호젓하게 걸었다. 대신 산모기가 달라붙어 성가셨다. 이 계절에는 어쩔 수 없다. 네 시간이 지나니 많이 지쳤다. 작은 오르막도 4천 미터 히말라야를 걷는 것 같다. 집 뒷산은 두 시간 코스다. 여기에 적응되어 있는데 운동량이 두 배로 늘어나니 당연한 현상이다. 내년 초 밀포드 트레킹을 위해서는 체력을 차차 업그레이드시켜야겠다. 무거운 배낭에도 적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

사진속일상 2016.05.29

논어[197]

선생님 말씀하시다. "한 마디로 따져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유일 거야!" 자로는 승낙을 머뭇거리지 않았다. 子曰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 子路 無宿諾 선생님 말씀하시다. "시비를 가리는 것쯤 나도 남과 다를 것이 없으나 송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子曰 聽訟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 顔淵 9 이 두 구절은 하나로 연결해 읽고 싶다. 행정가로서의 자로의 결단력에 대한 칭찬이 앞부분이라면, 뒤는 더 근원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아예 송사 자체가 없도록 정치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역시 공자님다운 말씀이다. 그런 태평천하가 과연 구현될 수 있을까? 점점 늘어나는 변호사 숫자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삶의나침반 2016.05.27

개인주의자 선언

지은이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우리 사회의 진단에서부터 어떤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자주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이는 현직 판사로 자신을 개인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개인주의자는 성숙한 인격체가 되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못하면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에 빠지기 쉽다.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에서 합리적인 개인주의로 변해야 행복한 개인이 많아진다고 믿는다. 개인주의자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한다.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한다. 우리 사회는 집단주의의 지배를 받아 왔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민' '민족'이라는 말은 넘쳐나지만 '개인'이라는 말은 아직 희귀하다. 국가별 행복도의 차이는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의 차이다. 서열화되고..

읽고본느낌 2016.05.26

봄날은 간다 / 최금진

사슴농장에 갔었네 혈색 좋은 사과나무 아래서 할아버지는 그중 튼튼한 놈을 돈 주고 샀네 순한 잇몸을 드러내며 사슴은 웃고 있었네 봄이 가고 있어요, 농장 주인의 붉은 뺨은 길들여진 친절함을 연방 씰룩거리고 있었네 할아버지는 사슴의 엉덩이를 치며 흰 틀니를 번뜩였네 내 너를 마시고 回春할 것이니 먼저 온 사람들 너댓은 빨대처럼 생긴 주둥이를 컵에 박고 한잔씩 벌겋게 들이키고 있었네 사과나무꽃 그늘이 사람들 몸속에 옮겨 앉았네 쭉 들이키세요, 사슴은 누워 꿈을 꾸는 듯했네 사람들 두상은 모두 말처럼 길쭉해서 어떤 악의도 없었네 누군가 입가를 문질러 닦을 때마다 꽃잎이 묻어났네, 정말 봄날이 가는 동안 뿔 잘리고 유리처럼 투명해진 사슴의 머리통에 사과나무 가지들이 대신 걸리고 할아버지 얼굴은 통통하게 피가 올..

시읽는기쁨 2016.05.25

고향집에서

고향집 아침은 새소리에 잠이 깬다. 마당에 있는 나무가 자기네 놀이터인 듯 지저귄다. 참새가 많고, 딱새와 색깔이 고운 이름 모르는 새도 있다. 함께 어울리지는 않고 순서대로 찾아와 저희들끼리 논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한 경배 의식과도 같다. 그 외 닭소리, 개 짖는 소리, 멀리 산새 소리도 들린다. 도시에서 살다가 이런 아침을 맞으면 신기하고 행복하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부지런한 어머니는 텃밭에서 바쁘다. 어머니를 뵐 때마다 감사하게 된다. 비슷한 나잇대의 친척이나 이웃분에 비하면 제일 정정하시다. 지금까지 병원에 입원한 적 없고, 건강 문제로 자식들 걱정하게 한 적도 없다. 농사일로 평생을 보내시며 다섯 남매를 키우셨다. 너무 억척스럽게 일한다고 핀잔도 많이 받았는데, ..

사진속일상 2016.05.25

아련한 양지꽃

야생화에 관심을 가진지 올해로 20년 째다. 1996년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해다. 눈을 감으면 처음 꽃을 만나던 감격이 아련히 떠오른다. 모든 게 신기하고 감동이었다. 야외로 나가는 내 손에는 김태정 선생이 쓴 이라는 도감이 들려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야생화 교과서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세 권으로 된 그 책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다. 도감에 보니 '양지꽃' 페이지에 '1996. 4. 7.'이라고 적혀 있다. 처음 양지꽃을 본 날이다. 그날의 상황이 눈에 잡힐 듯 선명하다.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을 데리고 남한산성에 올랐다. 아내도 동행했다. 성벽 아래서 쉬고 있는데 바로 옆에 노란 꽃이 보였다. 도감을 찾아보니 양지꽃이었다. 아, 이게 양지꽃이구나, 사진으로 보던 것을 실물로 확인할 때만큼..

꽃들의향기 2016.05.23

논어[196]

제나라 경공이 선생님께 정치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왕은 군왕다웁고, 신하는 신하다웁고, 아비는 아비다웁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하지." 경공이 말했다. "좋습니다. 정말이지! 군왕이 군왕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아비가 아비답지 않고, 아들이 아들답지 않으면 먹을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나만 먹을 수 있겠소?" 齊景公問 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信如 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 顔淵 8 선생 노릇을 할 때 제일 많이 한 잔소리가 "학생'답게'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본인이 선생'답게' 사는 지는 별로 따져보지 않았다. 그런데 '답다'라는 말에는 세상의 위계 질서에 맞게 살아가라는 압력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군(君)과 신(臣), 부(父..

삶의나침반 2016.05.22

나를 위한 글쓰기

고등학교 1학년 때 소설이랍시고 끄적거린 적이 있다. 글을 쓴 계기는 사랑의 열병 때문이었다. 서울로 유학 온 열여섯 살 시골 촌놈이 사춘기를 맞았는데 묘하게 같은 반 남학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멋있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니셜로는 JY다. J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은 동성애의 시기를 지나 이성에게로 향한다고 한다. 나에게는 동성에 대한 밀도가 너무 짙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J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멀리서 지켜보며 애만 태웠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더더욱 드러내지 못할 일이었다. J 역시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짝사랑이 1년 내내 계속되었다. ..

길위의단상 2016.05.20

애쓴 사랑

이런 삶을 만나면 부끄럽다. 나는 한 번도 치열하게 살아보지 못했다. 황시백 선생은 세상과 불화하면서 먼 꿈을 꾼 사람이다.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올곧게 나아갔다. 선생은 전교조 해직교사로 교육 민주화 운동에 온몸을 불살랐다. 이런 분들이 나중에는 몸이 상해 일찍 세상을 뜨는 경우를 자주 본다. 선생도 그랬다. 선생은 교사였고, 농사꾼이었고, 목수였다. 몸을 낮춰 세상을 사랑했다. 이 책에는 교육보다 농사짓는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선생은 도시를 떠나 오순도순 사이좋게 살아가는 사잇골 농촌 공동체를 꿈꿨다. 집안이 가난했던 선생은 젊었을 때 고생을 심하게 했다. 피를 팔아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지낼 때도 아픈 마음을 보듬어 안을 수 있었나 보다. 교직을 떠나서 농사를 택한 것..

읽고본느낌 2016.05.19

롯데월드타워

잠실에 나간 길에 롯데월드타워 주변을 한 바퀴 돌다. 123층, 555m인 이 초고층 빌딩은 올해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다. 완공되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높은 건물이 된다고 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마어마한 크기다. 처음 나왔던 조감도는 모양이 이상해 보였는데, 완성된 형태는 그런대로 날렵하고 세련돼 보인다. 초등학교 때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라고 배웠다. 1931년에 이미 102층의 건물을 지었으니 대단한 기술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80년이 넘게 지나도 아직 높이 1km를 돌파하지 못했으니 그 분야에서의 발전은 느린 편이다. 1970년대에는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삼일빌딩이었다. 그때는 31층도 까마득한 높이였다. 삼일빌딩이 준공되고 구경 가서 "와-" 탄성..

사진속일상 2016.05.18

가늘고 길게

굵게 사는 삶은 꿈꿔 보지 않았다. 거창한 꿈은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초등학교 학적부를 본 적이 있었는데 장래 희망은 내리 교사가 적혀 있었다. 부모 희망란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그런대로 했으니 의사나 판사를 시켜볼 만도 했건만 아버지는 오로지 교사 되기를 바라셨다. 대학생 때 고시 공부하던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던 아버지셨다. 아버지도 나를 잘 파악하고 계셨다. 요사이는 교사 되기가 어렵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교사가 부족해서 단기 양성 과정도 있었다. 남자가 교사를 희망하면 졸장부 취급을 받던 때였다. 어릴 때부터 내 기본 마인드는 적게 먹고 적게 싸자 주의였다. 나는 햄릿형이다. 소심하다. 사상체질로는 소음인에 속한다. 가늘게 살 팔자다. 당연히 굵고 짧게 사는 걸 부러워하지 않는다. ..

참살이의꿈 2016.05.17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아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서른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 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한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처진 육신에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

시읽는기쁨 2016.05.17

논어[195]

극자성이 말했다. "참된 인간은 바탕만이면 그만이지 문채는 무엇한담!" 자공이 말했다. "아차차! 선생의 인물론이야말로 네 필 말마차도 혀는 따르지 못하는 것을! 문채가 바탕이요 바탕이 문채라, 범의 가죽 바탕은 염소의 가죽 바탕과 같은 것인데...." 棘子成曰 君子質而已矣 何以文爲 子貢曰 惜乎 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곽 猶犬羊之곽 - 顔淵 7 형식[文]과 본질[質]에 관한 오래된 논쟁이다. '옹야(雍也)' 편에 나온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공자의 말에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형식을 강조하느냐, 본질을 강조하느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형식은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본질이 자연스럽게 겉으로 배어나와서 형식을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는 자공의 비유가 눈에 ..

삶의나침반 2016.05.16

졸혼

일본에서는 노년층에서 '졸혼(卒婚)'이 유행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혼인 관계를 졸업한다'는 뜻이다. 졸혼은 이혼이나 별거와는 다르다. 사이가 나빠서 갈라서는 게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따로따로 각자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상대의 자유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 '해혼(解婚)'이 있다. 역시 '혼인 관계의 해제'라는 뜻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남자가 가장의 임무를 마친 뒤 구도의 삶을 원하면 해혼식을 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간디는 삼십 대 후반에 아내와 해혼을 합의하고 인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인도에는 전통적으로 해혼 문화가 존재한다. 졸혼은 장수 사회의 한 단면도다. 대개 60대 중반이 되면 자식을 짝지어 보내고 부부만 남는다. 옛날 같..

길위의단상 2016.05.15

구리 유채꽃밭

구리 한강공원에 유채꽃이 활짝 폈다.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만발하는 곳이다. 아마 수도권에서 이만큼 넓은 꽃밭은 없을 것이다. 강을 끼고 있어 더욱 시원하다. 주변은 유채꽃 향기로 가득하다. 만약 향기를 볼 수 있다면 불길처럼 타오르는 장관을 연출하리라. 유채꽃 향기는 무슨 색일까? 이곳은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꽃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유채꽃이 지면 봄도 등을 보이며 멀어질 것이다.

꽃들의향기 2016.05.15

사월 초파일 칠보사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칠보사(七寶寺)가 있다. 사월 초파일 오후에 연등 구경을 하고 싶어 칠보사로 향했다. 부처님 오신 날이어서 절이 꽤 분주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오전 행사 뒤 대부분이 돌아가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연등은 기대보다 초라했다. 대웅전 앞에는 운동회가 열리듯 만국기가 펄럭였다. 스님은 평일인 듯 한가하게 산책하고 계셨다. 조계사 같은 큰 절의 화려한 연등이 너무 머릿속에 박혀 있었나 보다. 사실은 이런 작은 절이 정상인지 모른다. 시주자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대형 절의 연등은 보기에는 장관일지 몰라도 너무 뻐기는 폼이 부담스럽다. 내 복을 기원하는 게 자랑일 수 없다. 만약 설법이나 설교, 강론에서 복을 바라는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불교는 부처가..

사진속일상 2016.05.14

빅 퀘스천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과 교수인 김대식 선생이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답을 한 책이다. '빅 퀘스천(Big Question)'이라는 제목이 어울린다. 뇌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은 뇌과학과 뇌공학, 인공지능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책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등 31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각 항목이 심오한 철학적 주제로 하나만으로도 책 수십 권 분량이 필요할 것이다. 지은이는 역사, 신화, 문학, 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간결하고 흥미롭게 이 난해한 주제를 다룬다. 바탕에는 과학적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과학자가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은 해답을 준다기보다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읽고본느낌 2016.05.14

죽산 성지

죽산(竹山) 성지는 경기도 안성에 있다.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부터 1871년 신미양요 때까지 스물네 명이 순교한 장소다. 처형지는 고려 때 몽고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진(夷陣)터라 불렸다. 당시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진터에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고 '잊은 터'라 했다고 한다. 거의 20년 만에 죽산 성지에 들러보다. 그때는 성지가 조성되기 초창기여서 잔디만 깔려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여러 시설도 많이 들어섰고 조경도 잘 되어 있다. 성지의 중심은 순교자 묘역이다.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가 있고, 좌우로 24기의 순교자 묘가 있다. 신앙면에서 나는 지금 냉담 중이다. 아내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지켜보는 나는 냉랭하다. 성지에 와도 별다른 감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계속 무신..

사진속일상 2016.05.13

굴뚝집 / 김명국

꿈이 있다면 비록 허름하더라도 내 집을 갖는 일이다 논도 한 서너 마지기쯤 있으면 좋겠다 텃밭도 조금 있고, 남들도 갖기 꺼리는 밭이라도 내 몫이 된다면 그곳에다 채소를 심으리라 경운기는 있어야겠지만 없어도 괜찮겠지 가끔씩은 멀리 가야 하므로, 헌 자전거가 하나 있어야겠다 지붕은 슬레이트든 기와든 상관없겠지만 초가집이면 더욱 좋겠다 손수 들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해두리니, 지붕을 잇는 가을날이면 눈부시리라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행복하리 일하는 날보다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더라도 근심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다 책도 읽고 시도 쓰고 답답하면 논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떠날 수 있다면,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겠다 옆집에서 넘어온 오이순을 탐내지 않았듯 눈이 많이..

시읽는기쁨 2016.05.13

한택식물원의 봄

봄 향기를 맡으러 아내와 한택식물원에 갔다. 신록 사이를 걸으며 다양한 봄꽃을 구경했다. 한택(韓宅)식물원은 1979년에 설립된 국내 최대의 식물원이다. 자생식물 2,400여 종과 외래식물 7,300여 종을 보유하고 있다. 한 바퀴 돌아보는데 두 시간 정도 걸린다지만 점심을 싸가지고 와서 하루 종일 놀아도 괜찮은 곳이다. 너무 꽃이 많으면 세세하게 들여다 보지 않게 된다. 이곳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맛보면 된다. 인공의 정원이라 야생의 꽃과는 다른 느낌이다. 각각의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이번 나들이에는 아내와 함께 개량한복을 커플룩처럼 같이 입었는데, 사람들 시선을 좀 받았다. 그런데 개량한복을 입어 보니 무척 편하다. 앞으로 애용하게 될 것 같다. 한택식물원에서는 바오밥나무를 볼 수 있다. 에 나오..

꽃들의향기 2016.05.12

논어[194]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식량이 넉넉하고, 군비가 충실하고, 백성들이 믿게 되어야 한다." 자공이 말했다. "할 수 없을 경우에 이 셋 중에서 어느 것을 버릴까요?" "군비를 버리지." 자공이 말했다. "할 수 없을 경우라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버릴까요?" "식량을 버리지. 옛날부터 사람이란 죽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은 믿음 없이는 지탱 못한다." 子貢 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 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顔淵 6 당시 춘추전국 시대 상황으로 볼 때 공자의 이 말씀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군사력이 없으면 나라가 버텨낼 수 없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경제, 국방, 믿음 중 제일 먼저 ..

삶의나침반 2016.05.10

외로움이 필요한 시대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면 정신이 튼튼해지지 못한다. 내면이 허약한 사람이 밖에서 위안을 찾는다. 전철에 타 보면 열에 아홉은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심심한 걸 견디지 못한다. 아무 목적 없이 스마트폰을 연다. 기갈에 시달리는 사람들 같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허전해서 불안하다는 사람도 있다. 스마트폰은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을 빼앗아간다. 현대인이 혼자 있을 때 주로 무엇을 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안다. 외로워야 할 권리를 스스로 반납하고 있다. 그러면서 혼자 놀 줄 모르는 무능력자가 되어 간다. 어른만 그런 게 아니다. 식당에 가 보면 어린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부모가 많다. 만화영화에 빠져서 얌전해지기 때문이다...

참살이의꿈 2016.05.09

부제가 '죽음을 통해서 더 환한 삶에 이르는 이야기'다. 능행 스님이 썼다. 스님은 불교계 최초로 호스피스 전문병원을 설립하고 20년 넘게 죽음과 함께 하는 생활을 했다. 이 책은 스님이 직접 죽음의 현장에서 부딪치고 성찰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음을 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죽지만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먼 미래에 닥칠 일이라고 여긴다. 불길하다고 느껴서인지 죽음을 입에 올리기를 꺼린다. '4'가 '죽을 사' 자와 발음이 같다고 기피하는 것만 봐도 안다. 그러나 준비 안 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당황하게 되고 어찌 할 바를 모른다. 자기 죽음에 대해 직시하며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수많은 죽음을 곁에서 목격한 스님은 말한다. 잘 살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

읽고본느낌 2016.05.08

별을 보면 / 이해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 별을 보면 내 마음 뜨겁게 가난해지네 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그 넓은 꽃밭에 앉아 영혼의 호흡 소리 음악을 듣네 기도는 물 마실 수록 가득찬 기쁨 내일을 약속하는 커다란 거울 앞에서 꿇어앉으면 안으로 넘치는 강이 바다가 되네 길은 멀고 아득하여 피리 소린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별 뜨고 구름 가면 세월도 가네 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주는 마음 훗날 별만이 아닌 나의 이야기 꽃으로 피게 살아서 오늘을 더 높이 내 불던 피리 찾아야겠네 - 별을 보면 / 이해인 이 시는 수녀님이 21세 때 썼다고 한다. 첫 서원을 하기 전인 예비수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첫 연인 '하늘은 별들의 꽃밭'이라는 구절이 오래 기억되는 시다. 며칠 전 TV에 ..

시읽는기쁨 2016.05.07

다육이(6)

올 봄에는 베란다에 있는 다육이 중 두 분에서 꽃이 피었다. 긴 꽃대가 나오더니 하나는 작은 흰 꽃이, 다른 건 탐스런 노란 꽃이 달렸다. 흰 꽃에서는 난초 분위기가 풍긴다. 마치 말미잘이 붙어 있는 것 같다. 꽃은 작아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다. 봄이 다가오면 다육이 화분 중 어디에서 꽃이 필까, 기대하는 재미가 있다. 재스민 화분에서도 순백의 바람개비 모양의 꽃이 피었다. 향기가 좋아 거실에 옮겨 놓고 재스민 향기를 즐기고 있다. 꽃 복판에 있는 옐로우홀에서 제트기류처럼 뿜어져 나오는 향 입자를 상상해 본다. 별과 달리 회전하지 않아도 꽃은 충분히 역동적이다.

꽃들의향기 2016.05.06

서울둘레길 걷기(16)

서울둘레길 8코스 두 번째 길을 걸었다. 이 구간은 평창동 주택가를 한 시간 정도 통과한다. 딱딱한 시멘트 길을 걷지만 부촌 동네의 멋진 주택을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다. 이 길 주변에는 절이 유난히 많은 것도 특징이다. 걷는 동안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극명한 대비가 느껴졌다. 동시에 부러움과 질시가 공존했다. 이날은 어린이날 휴일이었다. 북한산 오르는 등산객이 연이었다. 그러나 정상으로 가는 길과 나누어지니 한산해졌다. 용두회원 다섯 명이 같이 했다. 지나는 길에서는 북한산 서쪽 능선이 보였다. 왼쪽부터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보현봉이다. 평창동에는 고급 주택들이 북한산 산자락에 모여 있다. 동네 분위기가 아랫 마을과는 영 다르다. 현 시대는 돈 많은 사람이 양반..

사진속일상 2016.05.06

논어[193]

사마우가 근심하여 말했다. "남들은 다 형제가 있지만 나만 없단 말이야!" 자하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죽고 사는 것도 천명이요, 부귀도 하늘의 마련'이라 했는데, 참다운 인간은 존경하면서 자기 도리를 잃지 않고, 공손하게 사귀면서 예의를 지키니, 온 세상 사람이 다 형제같다. 참다운 인간이 무얼 형제 없는 것을 걱정해서야 되나!" 司馬牛 憂曰 人皆有兄弟 我獨亡 子夏曰 商聞之矣 死生有命 富貴在天 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君子何患乎 無兄弟也 - 顔淵 5 앞에 나온 '군자는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와 연관된 일화로 보인다. 자하의 말은 응당 옳다. 그러나 위로하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공감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욥기'에서 환난을 당한 욥에게 친구들이 한 말이 생각난다. 바른..

삶의나침반 201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