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 17

2016년 끝날

2016년 끝날에 경안천을 걷다. 하늘은 흐리지만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 겨울 냉기는 없다. 경안천 오리가 오늘은 자맥질을 멈추고 얼음 위에서 평화로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몇 달 동안 생활이 많이 헝클어졌다.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한테는 짜증도 자주 부렸다. 앞을 가로막은 벽이 너무 답답했다. 망년(忘年) 대신 송년(送年)이라는 용어를 권하지만, 올해는 망년을 그대로 쓰고 싶다. 정말 잊고 싶은 한 해다. 더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으니 이젠 회복될 일만 남았다. 나랏일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희망이다. 물 같이 보이는 얇은 얼음 위에서도 새는 편안하다. 새의 가벼움이 부럽다.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면서 사람답지 않은 짓을 찾아서 하..

사진속일상 2016.12.31

자괴감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니, 물은 배를 뜨게 하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성난 민심이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냈으니 '군주민수(君舟民水)'는 현 시국을 적절히 반영한 말이다. 헌법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었던 시절에도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현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되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로는 '자괴감'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 담화를 발표하며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는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참살이의꿈 2016.12.30

아가씨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영화를 본다. 내 나잇대에서는 자주 보는 편에 속한다. 아예 영화에 관심이 없는 친구가 많다. 올해 본 영화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다. 한국 영화도 이렇게 발전했구나, 라고 가슴 뿌듯했다. 우선 영상미가 세련되고 아름답다. 스토리 전개도 군더더기 없이 말끔하다. 배우의 연기보다는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영화다. 돈과 성이라는 인간의 기본 욕망과 파멸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냈다. 레즈비언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인간 해방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가씨는 이모부에게, 하녀는 가짜 백작에게 철저히 구속된 상태였다. 욕망과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은 남자로 대변되는 기득권 체제의 부속품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둘이 만남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읽고본느낌 2016.12.30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자기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그리도 길게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 슬픈 이야기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네 아니, 처음부터 아예 듣기를 싫어하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고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기분에 따라 우선 순위를 잘도 바꾸면서 늘 시간이 없다고 성화이네 저 세상으로 떠나기 전 한 조각의 미소를 그리워하며 외롭게 괴롭게 누워 있는 이들에게도 시간 내어주기를 아까워하는 건강하지만 인색한 사람들 늘 말로만 그럴듯하게 살아 있는 자비심 없는 사람들 모습 속엔 분명 내 모습도 들어 있는 걸 나는 알고 있지 정말 왜 그럴까 왜 조금 더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그토록 이기적일까, 우리는.... - 왜 그럴까, 우리는 / 이해인 세밑에 이르렀다. 아쉬움과 회한이 많이 남는 해다. 나이를 먹는다..

시읽는기쁨 2016.12.30

논어[224]

선생님 말씀하시다. "알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못 만나게 되면, 그야 지나친 미치광이나 고집 센 억지꾸러기들일 거야! 지나친 미치광이는 진취성이 있고, 고집 센 억지꾸러기들은 하지 않는 대목이 있느니라." 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견乎 狂者 進取 견者 有所不爲也 - 子路 17 '중행(中行)'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도 어렵고, 그런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광자(狂者)' 아니면 '견자'에 드는 사람들이다. 이 둘은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이다. 번역은 '미치광이'와 '억지꾸러기'로 되어 있다. 중용의 도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다. 정치적 견해로 해석다면, '광자'는 과격한 진보주의자, '견자'는 꼴통 보수주의자 쯤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옳든 그르든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삶의나침반 2016.12.26

이양하 수필

우울한 대한민국에서 도피하고파 이양하 수필집을 꺼냈다. 선생의 수필은 진흙탕 현실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안분지족(安分知足)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년 시절도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 만난 '신록 예찬' '페이터의 산문'은 50년이 된 지금도 명료하다. 어려운 한자가 많이 나왔지만 고전적인 문체는 사람을 끌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나이나 분위기에 따라 같은 글이라도 느낌이 다르다. 고등학생 때 만난 선생의 수필에는 봄의 설렘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런 느낌을 맛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는 멀리서 들리는 소리였다면, 지금은 내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 같다. 그러나 선생의 수필도 지금의 내 우울한 마음을 온전히 위로해주지 못한다. 너무 막막하고 답답한 현실이다. '페이터의 ..

읽고본느낌 2016.12.24

금성인의 지극함

첫째 손주는 여자지만, 둘째 손주는 남자다. 커가는 모습을 보면 둘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예 다른 종족이 아닌가 싶다. 여자와 남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뇌 구조 자체가 다르다. 둘째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길가의 돌멩이와 막대기에 관심을 보였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잡고 던지고 하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나뭇가지만 잡으면 칼싸움을 하려고 덤벼든다. 돌멩이도 원시 시대의 무기였다. 수컷의 피에 흐르는 사냥과 전투 유전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가 왜 돌멩이와 막대기에 본능적인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겠다. 반면에 첫째는 이런 데는 아예 흥미가 없다. 성인이 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얼마나 어..

길위의단상 2016.12.23

기도 / 김수영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소박하게 성취한 우리들의 혁명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살쾡이에게 진드기에게 악어에게 표범에게 승냥이에게 늑대에게 고슴도치에게 여우에게 수리에게 빈대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그러나 정글보다도 더 험하고 소용돌이보다도 더 어지럽고 해저보다도 더 깊게 아직까지도 부패와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이 심연이나 사막이나 산악보다도 더 어려운 사회를 넘어서 이번에는 우리가 배암이 되고 쐐기가 되더라도 이번에..

시읽는기쁨 2016.12.21

논어[223]

자공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 대답하시다. "제 몸을 가누는 데 염치를 알고, 외국으로 사신 가서 제 책임을 다할 수 있다면 가히 선비에 들 수 있지." "그 다음은 어떤가요?" "집안 사람들은 효성스럽다 하고, 마을 사람들은 공손하다 하면 되지." "그 다음은 어떤가요?" "말에 빈틈이 없고, 행동에 끝장을 보고야 마는 것은 딱딱한 것이라 하찮은 인물이지. 허지만 그 다음에나 간다고 해두자." "요즈음 행정가들은 어떻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흥, 조불조불한 사람들을 어찌 다 셀까?" 子貢問 曰 何如斯可爲之士矣 子曰 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曰 敢問其次 曰 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 曰 敢問其次 曰 言必信 行必果 경경然 小人哉 抑亦可以爲次矣 曰 今之從政者何如..

삶의나침반 2016.12.21

지혜로운 노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80세 생일을 맞아 노숙자들을 초청해 아침 식사를 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리고 미사에서는 "노년이 지혜롭고 평화로울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말했다. 또한 "나이 드는 것이 두렵다"고도 고백했다. 아마 나이가 들어도 지혜로워지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쌓인 시기가 노년이다. 아는 것도 많고 세상 경험도 풍부하니 노년이 되면 자연스레 지혜로워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지식과 경험이 족쇄가 되어 옹고집만 더 생긴다. 주변에 나이 든 사람을 떠올려보면 안다. 늙으면 몸만 아니라 정신도 굳어진다. 제 세계관에 갇혀 버리는 것, 이것이 노년에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은 말랑말랑하다. 버드..

참살이의꿈 2016.12.20

검천리 느티나무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 한강변에 있는 느티나무다. 팔당호의 물과 어울려 전망이 시원하다. 1973년에 준공된 팔당댐으로 강변 마을이 여럿 수몰되었다. 아마 이 느티나무도 옛날에 있었던 마을의 흔적일지 모른다. 느티나무의 모습에서 이 나무가 겪어야 했을 풍파가 읽힌다. 지금은 주변이 잘 정돈되어 있고,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휴식 공간도 넉넉하다. 고요한 물과 벗하며 이제는 평온한 노년이 되길 기원한다.

천년의나무 2016.12.20

유방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군웅들이 할거하며 다투다가 한나라 고조가 등장하는 과정은 거대한 토너먼트 시합 같다. 마지막 결승에는 유방과 항우가 겨룬다. 약 2,200년 전 이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제일 드라마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영웅열전 중 한 권인 을 읽어보게 되었다. 초와 한의 쟁패에 대해서는 유방, 항우, 한신 등에 관한 단편적인 일화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다. 각 인물의 특성도 어느 정도는 드러난다. 주인공은 유방이지만 사실 항우에 더 호감이 간다. 유방이 술수에 능하고 고단수라면, 항우는 우직 단순하다. 무식하면서 고집이 센 것이 병통이었다. 그것 때문에 늘 전투에 이기면서도 결국 유방에 패배했다. 지략 싸움에서 진 것이다. 유방에게는 장량, 소하 같은 ..

읽고본느낌 2016.12.16

술값 / 신현수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잘난 척한 날이고 말도 안하고 술값도 안낸 날은 비참한 날이고 말 많이 하고 술값 낸 날은 그중 견딜만한 날이지만 오늘, 말을 많이 하고 술값 안낸 날은 엘리베이터 거울을 그만 깨뜨려버리고 싶은 날이다. 술값 / 신현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염치다. 염치(廉恥)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나라는 불행해진다. 무지, 오만, 비굴, 탐욕의 인간 군상들을 매일 TV로 접한다. 참으로 뻔뻔하다. 갑남을녀 대부분은 술값 몇 푼으로 조바심친다. 조무래기라 그런 걸까? 염치는 헌신짝처럼 차버려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가 보다. 차라리 위선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시읽는기쁨 2016.12.14

논어[222]

번지가 사람 구실에 대하여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집안에서는 공손하고, 일 처리는 깍듯이 하고, 진정으로 남과 사귀어야 하는 것들은 되놈의 땅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樊遲問仁 子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雖之夷狄 不可棄也 - 子路 15 군자는 혼자 있을 때도 행동거지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남이 볼 때와 차이가 없다. 중심이 선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랑캐 땅에 있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번지가 인(仁)을 물었을 때 공자는 공(恭), 경(敬), 충(忠), 세 단어로 답했다. 그러나 위계질서로 서열화된 사회에서 이 말은 갑이 을을 구속할 때 늘 써먹던 레퍼토리였다. 새롭게 정의된 윤리 개념이 필요한 시대다.

삶의나침반 2016.12.13

2016. 12. 9.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당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매운 시민의 외침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남아있지만, 대통령 퇴진이라는 시민의 요구를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2016년 12월 9일, 이날은 역사에 시민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최순실에 의한 국정 농단에 분개했지만, 촛불을 통해 시민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 1조의 생생한 교육장이었다. 어떤 어둠의 세력도 빛을 이길 수는 없다. 수백만 명이 모였지만 집회가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폭력 사태와 계엄령 선포라는 대혼란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분노를 표현하되 마치..

길위의단상 2016.12.12

일인용 책

신해욱 시인의 산문집이다. 신문 칼럼에 실렸던 글이라 700자 안팎으로 분량이 짧다. 정해진 규격에 맞춰진 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문체 자체가 간결하고 담백하다. 바삭바삭 건조한 느낌도 든다. 글의 소재는 대부분 시인의 일상에서 길러온 것들이다. 스쳐 지나갈 하찮은 일이 시인의 감수성을 통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보석으로 변한다. 글을 읽으며 우리는 너무 많은 소중한 것들을 그저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된다. 매사에 서툴고 느리고 둔하다. 그래서 싫기도 하고 안 싫기도 하다. 혼자 일하기와 혼자 놀기는 제법 한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두툼한 손을 부러워하고 겹눈의 세계를 궁금해한다. 그래서 시를 ..

읽고본느낌 2016.12.02

슐레지엔의 직조공 / 하이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첫 번째 저주는 신에게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우리는 기도했건만 희망도 기대도 물거품이 되었다 하늘은 우리를 조롱하고 우롱하고 바보 취급을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부자인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주기는 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세 번째 저주는 그릇된 조국에게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북이 날고 베틀이 덜거덩거리고 우리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짠다 낡은 독일이여 우..

시읽는기쁨 2016.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