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 31

끼니 / 고영민

1 병실에 누운 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가 그날 아침엔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너무 반가워 나는 뛰어가 미음을 가져갔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냥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아버지는 밥을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2 우리는 원래와 달리 난폭해진다 때로는 치사해진다 하찮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가진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겨울,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노숙자가 자고 있던 동료를 흔들어 깨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먹어둬!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잖아 - 끼니 / 고영민 얼마 전 모임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보았다는 이가 여럿 있었다. 정신력이 강하면서 존경을 받던 분이..

시읽는기쁨 2017.09.30

기다려 주기

아파트 현관으로 가는데 젊은 여인이 앞에 가고 있다. 이럴 때는 속도를 늦춘다. 먼저 보내고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다. 모르는 사람과 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는데 복도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가 왔어요." 내가 뒤에 따라오는 걸 알고 같이 올라가기 위해 기다려 준 것이다. 이런 경우는 드물다. 대개 뒤에 오는 사람을 무시하고 먼저 올라간다. 나부터도 그렇다. 같이 타게 될까 봐 발걸음을 빨리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닫힘 버튼을 부리나케 누른다. 못 된 짓이란 걸 알지만 그렇게 살아왔다. 사람 기척이 있는데도 미리 가버리는 행위는 얄밉다. 도시에서는 서로가 그런 무례를 주고받으며 산다. 어쩔 수 없이 함께 올라가게 되었지만 기분은 무척..

참살이의꿈 2017.09.29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여행 중에 다시 읽어본 책이다. 릴케가 첫번째 답장을 쓴 1903년은 릴케의 나이 28세일 때로 이미 많은 시를 발표하며 명성을 높이고 있을 때였다. 또 몸이 쇠약해서 이탈리아의 휴양도시인 비아레지오에서 쉬고 있었다. 시인이 되기를 지향하는 생면부지의 젊은 청년에게 이토록 친절하고 다정한 충고를 했다는 데서 문학과 사람을 대하는 릴케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다. 편지 교환은 1908년까지 계속된다. 꼭 문학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삶을 대하는 릴케의 진지한 충고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인생의 가치는 외적 성공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다. 편하고 쉬운 길보다 어렵고 무거운 길을 가야 한다. 자기 내면의 고독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릴케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청년에게 마치 구도자 ..

읽고본느낌 2017.09.27

성지(3) - 단내성지, 어농성지

오후 약속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성지를 택했다. 단내성지와 어농성지는 한 시간 거리라 11시 미사에 맞추기 위해 9시 30분에 출발했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나 한낮은 여름볕처럼 따가운 날씨였다. 4. 단내성지 이천시 호법면에 있는 단내성지에는 다섯 분의 순교 성인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 정은 바오로 성인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재종손인 정 베드로가 할아버지를 옥중에서 보살피기 위해 자수해서 함께 고초를 겪었다. 두 분은 그해 말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버려진 정은의 시신을 가족이 찾아내 이곳에 모셨다. 여기 모셔진 성인들은 가족 사랑의 모범이 되셨기에 이곳이 성가정성지로 지정된 것 같다. 순교비와 성가정성지 표지석. 이곳은 역사가 오랜 교우촌 중의 하나..

사진속일상 2017.09.26

건봉사 소나무

건봉사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멋진 소나무다. 건봉사는 유난히 산불과 전란의 피해가 컸다. 그래서 사찰 건물은 여러 번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했다. 나무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많은 나무들이 화마를 당해 죽었지만 이 나무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나무 바로 밑에 있는 전각들이 불에 탈 때도 피해가 없었다. 오히려 여느 나무보다 훨씬 더 당당하다. 수령은 300년쯤 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옆에 서면 고난을 이겨낸 생명체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봉사 소나무다.

천년의나무 2017.09.25

만해 길을 걷다

불교아카데미에서 주관한 금강산 건봉사의 불이분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틀간 진행되었는데, 첫날은 만해의 길을 탐방했다. 만해의 길은 한용운 스님이 백두대간을 넘어 백담사와 건봉사, 유점사 등을 왕래할 때 이용했던 길이다. 선유령과 흘리계곡을 잇는 옛길이다. 우리는 마산봉 임도 입구에서 소똥령을 거쳐 장신리까지 12km를 걸었다. 23일 아침 7시에 잠실운동장에서 버스 5대로 출발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5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이렇게 부지런을 떤 기억은 없다. 아침 식사는 김밥이었고, 점심은 주먹밥이 나왔다. 임도로 쓰기 위한 길은 널찍했다. 대신 아기자기한 산길의 맛은 없었다. 지루하게 여겨질 때쯤 장신리에 닿았다. 점심 포함 3시간 20분 가량 걸렸다. 건봉사를 둘러보고 절에서 저녁 공양을 했다..

사진속일상 2017.09.25

강냉이 / 권정생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다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통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 강냉이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생이 쓰신 여러 편의 동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라는 동시집이다. 2011년이었다. 이 시는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

시읽는기쁨 2017.09.22

논어[255]

공백료가 계손에게 자로를 중상한즉, 자복경백이 이 일을 밝혀 말했다. "그 분도 확실히 속아넘어가 있습니다. 공백료는 내 힘으로도 죽여서 저저거리에다가 내걸 수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질서가 제대로 잡혀지는 것도 천명이요, 질서가 문란해져 버리는 것도 천명이니, 공백료인들 그 천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公伯寮 遡者路於季孫 子服景伯 以告曰 夫子 固有惑志於公伯寮 吾力 猶能 肆諸市朝 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 其如命何 - 憲問 24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보다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이 상황도 그런 것 같다. 한쪽 편의 말만 듣고 쉬운 결정을 내릴 일은 아니다. 천명(天命)이 무너지는 시대였긴 하지만 공자는 하늘의 뜻을 믿었던 것 같다. 하늘이 내려준 본인의 ..

삶의나침반 2017.09.22

잠 못 드는 조부모 가설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어든다. 불면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들도 많다. 잠이 들기도 어렵거니와 새벽에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도 힘들다고 한다. 늙으면 멜라토닌 분비가 줄어들어 생기는 현상이라고 의학에서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멜라토닌 분비를 늘리는 처방을 하면 될 것 같은데 간단치 않은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노인이 되면 잠자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은데 실상은 반대다. 여기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있다. 인류가 동굴 생활을 할 때 적이나 맹수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밤에도 누군가는 깨어 있어야 했다.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으면 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 역할을 맡은 것이 노인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낮에 활동을 많이 해야 하므로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노인이 되면 잠이 없어지는 ..

길위의단상 2017.09.21

맥문동(2)

맥문동(麥門冬)은 한자 이름에서 특징을 볼 수 있다. 겨울에도 살아 있는 초록 잎은 보리와 닮았다. 음지에서도 잘 자라고 다른 식물이 기피하는 소나무 밑도 상관없다.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그래선지 강장작용을 비롯한 여러 효능의 한약재로도 이용된다. 밀집해서 핀 맥문동 군락은 아름답다. 보라색이 참 곱다는 걸 맥문동 꽃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꽃들의향기 2017.09.20

가을 오는 뒷산

어제 저녁 8시에 침대에 들어갔는데 그대로 곯아떨어져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이 며칠째 계속 그랬다. 보통 날도 아홉 시간은 잠을 자니 특별하지는 않다. 별로 활동하지 않는데도 근래 피로감이 깊어졌다. 약간의 감기 기운도 있다. 환절기 탓인가 보다. 가벼운 뒷산 걷기에 나섰다. 연일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봄에는 미세먼지가 괴롭히더니 여름부터는 대기가 깨끗하다. 티끌 하나 없는 파란 하늘도 자주 나타났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다. 숲에는 가을 기운이 배기 시작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도토리가 토도독 떨어진다. 뭔가 달콤하게 익어가는 냄새도 난다.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켠다. 집에서 몇 발자국만 나가면 이런 뒷산이 있다는 게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자꾸 멀리만 바라보았던 일을 뉘우친다...

사진속일상 2017.09.19

몽실 언니

초판이 1984년에 나왔으니 30년이 넘었다. 그 뒤에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인기를 얻었다. 아마 '몽실 언니'라는 인지도는 드라마 덕분일 것이다. 그 드라마를 꾸준히 본 것 같지는 않고, 까만 치마와 흰 저고리의 몽실이 이미지는 아직 남아 있다. 권정생 선생의 의 감동이 커서 연이어 도 읽어 보았다. 시대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 민중의 이야기지만 시대 배경이나 주인공의 연령대가 다르다. 무엇보다 는 소년소설로 동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체험한 어른들에게 더 공감을 줄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선생이 에서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다. 책의 머리말에도 분명히 나온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은 인간을..

읽고본느낌 2017.09.18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 백석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다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와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으로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 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시읽는기쁨 2017.09.17

논어[254]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나보다!" 자공이 말했다. "왜 선생님을 몰라준다고 하십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허물하지 않고, 차근차근 배워서 위로위로 올라가니, 나를 아는 자는 저 하늘인가!" 子曰 莫我知也夫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 憲問 23 공자 인생 후반기인 천하를 주유할 시기에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세상을 위해 큰 쓰임이 되고 싶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미련을 가진 공자의 집념이 대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견 공자의 한탄으로 들리지만 그 밑바닥에는 공자의 자긍심이 깔려 있다.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은 공자의 생활 철학이었다. ..

삶의나침반 2017.09.16

부산 & 대마도(3)

단체로 여행 갔을 때 아쉬운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의 부족이다. 떠들어대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건 영 질색이다. 그래서 자유 시간이 나면 억지로라도 일행에서 떨어져 행동한다. 다행히 이번 대마도 여행은 일정이 빡빡하지 않고 여유가 많았다. 지역이 좁으니 이동하는데 드는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아침 식사 후 한 시간, 점심 후 두 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동료들과 헤어져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다. 특별히 갈 데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이국의 골목길을 발길 가는 대로 걷는다. 패키지 코스에서 벗어난 인적이 드문 곳이다. 보여주는 광경이 아닌 실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조그만 카페를 발견하고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창가에 앉았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사진속일상 2017.09.16

와타즈미신사 소나무

대마도를 대표하는 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는 해신인 용왕을 모신 곳이다. 용왕이 오가는 길을 따라 도리이가 바다를 향해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이드는 그 방향이 우리나라 김해를 향한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일본 신사 도리이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곳은 서쪽을 향한다. 아마 가야에서 건너온 우리 조상과 연관된 신사는 아닌지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신사에 기이한 모양의 뿌리를 가진 소나무가 있다. 뿌리가 나무 키보다도 더 길게 직선으로 뻗어 있다. 건물도 뿌리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가이드 말로는 천년송이라는데 그 정도로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는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상에서부터 꿈틀대며 하늘로 치솟는다. 대마도에서는 소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와타즈미신사에서 만난 특이한 ..

천년의나무 2017.09.15

부산 & 대마도(2)

여행을 갈 때 제일 신경 쓰이는 게 잠자리다. 집에서는 혼자 방을 쓰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대개 2인 1실이다. 잠자는 시간이나 습관이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한다. 더구나 나는 코를 골기 때문에 타인의 잠을 방해할까 봐 걱정이 앞선다. 여러 신경을 쓰다 보면 깊은 잠을 자기 어렵다. 파트너는 잠을 늦게 드는 친구였다. 잠이 안 와 두세 시가 되어야 잠 든다고 했다. 같이 얘기하다가 잠자는 타이밍을 놓쳤는데 불을 꺼도 이 친구는 10분마다 한 번씩 헛기침을 하며 뒤척였다. 잠이 들었다가도 그 소리 때문에 금방 깨버렸다. 그래서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아침 컨디션이 바닥인 상태로 여행을 시작했다. 부산터미널에서 대마도를 향해 9시에 출발했다...

사진속일상 2017.09.15

부산 & 대마도(1)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해외여행은 일본 대마도다. 부산에서 49km다. 배로 1시간이면 닿는다. 반면에 일본 본토까지는 150km다. 날씨가 맑으면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인다. 정작 일본인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관심이 큰 섬이 대마도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와 얽힌 사연이 많은 섬이다. 대학 동기 여덟 명이 1박2일의 대마도 패키지 여행을 했다. 전날 부산에 내려가서 옛 친구를 만나고, 친구의 안내로 부산을 관광했다. 아침에 내린 폭우로 부산은 학교가 휴교하는 등 여기저기에 피해의 흔적이 있었다. 길이 통제 돼 돌아가기도 했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보슬비가 오락가락했다. 친구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신앙에 몰두하더니 결국 목회자가 되었다. 인간에게는 어찌 할 수..

사진속일상 2017.09.14

스마트폰으로 찍은 나무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이 있다. 꽃, 동물, 건축, 풍경 등 18개 분야로 나누어 시상을 한다. 스마트폰 사진 하면 뭔가 부족할 것 같지만 입선작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해가 갈수록 화질이 좋아지고 수준이 올라가는 것은 기술력이 그만큼 진보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내 관심을 끄는 분야는 나무다. 나무를 잘 찍고 싶어 새 카메라를 사야 할까,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찍은 나무 사진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좋은 사진이 안 나오는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나무를 보는 내 눈 탓이었다. 똑딱일지라도 스마트폰보다는 낫다. 어설픈 목수에게 아무리 좋은 연장을 쥐어준들 솜씨가 모자라는데 무얼 할까. 기계 욕심만 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아이폰 사진 공모전에서 올해(2017) 나무 분야 ..

길위의단상 2017.09.10

한티재 하늘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가슴이 멨고 눈물이 흘렀다. 권정생 선생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서럽고 고달팠던 우리네 백성들 삶의 이야기다.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더욱 그랬다. 외할머니의 일생 역시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와 다르지 않았다. 청상과부가 된 뒤 새끼와 외손주를 키우느라 어느 곳 하나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전전하며 사셨다. 그나마 배를 곯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은 권정생 선생이 쓰신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북의 안동과 영양 지역이 무대다. 이리저리 짓밟힌 우리 선조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느낌을 전할 수는 없다. 직접 읽어봐야 한다. 그런데 내용이 완결되지 않은..

읽고본느낌 2017.09.10

화성행궁 느티나무

수원 화성행궁 입구에 있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다. 수령은 350년 정도 되었다. 행궁을 지을 때 궁궐의 조경 제도에 의해 '品'자 형태로 심었다.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을 나타내는데, 나라를 위해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행궁 앞이지만 힘들게 살아 온 흔적이 보이는 나무다. 행궁 안에 들어가면 더 오래된 나무가 있다. 몸체 대부분은 죽었고 가운데서 돋아난 한 가지만 살아 있다. 9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노쇠해진 것 같다.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되니 화성 조성 훨씬 이전부터 여기에 있었다.

천년의나무 2017.09.10

무릎 꿇리지는 말았어야 했다

사진 한 장이 가슴을 울린다.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사진이다. 어제 서울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주민들의 항의로 무산되었다. 서울시교육청은 가양동 옛 공진초등학교 부지에 지적장애인 140명이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 설립을 4년 전부터 추진해 왔다. 이런 소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수학교가 들어선다 하면 주민 반대 데모가 벌어진다. 이 때문에 서울 지역에서는 지난 15년간 공립 특수학교가 한 군데도 생기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에서 특수교육이 필요한 장애학생은 1만 명이 넘는다. 이중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4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통학하는데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경우도 많다...

참살이의꿈 2017.09.09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

시읽는기쁨 2017.09.09

성지(2) - 북수동성당

3. 북수동성당 하늘은 잔뜩 흐리고 보슬비가 내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약속한 날이 되니 비가 뿌렸다. 성지를 찾아가는 길이니 어찌할 수 없음도 넉넉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정조가 죽고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된 천주교인은 수원 화성으로 압송되어 처형 되었다. 순교터는 화성 곳곳에 산재해 있다. 북수동성당은 수원 화성 안의 옛 토포청 자리에 있다. 아마 이곳에 수많은 천주교인이 갇혀 있었을 것이다. 북수동성당은 수원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본당으로 천주교 수원 순교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진 순교자는 78위이다. 1933년에 폴리(Polly) 신부가 건축한 고딕식 성당이 있었으나 6.25 때 전화로 손상되었고 뒤에 철거되었다. 건물을 재건하기 위..

사진속일상 2017.09.08

논어[253]

어느 사람이 말했다. "원한을 은혜로 갚으면 어떤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은혜는 무엇으로 갚게. 원한은 곧은 것으로 갚고,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지." 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 憲問 22 공자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다. 현실적 의미에서 정치는 법가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 공자는 인(仁)과 의(義)가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은 개인에게는 몰라도 나라를 운영하는데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대목은 63장에 나오는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報怨以德]'는 내용과 대비된다. 공자는 국가 질서 유지를 위해서 공평한 정의의 적용을 우선했다. 이것이 담보되어야 국가의 기틀이 바로 세워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삶의나침반 2017.09.07

원터골 굴참나무

청계산 등산로 입구인 원터골에 있는 굴참나무다. 옛날에는 두 그루였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았다. 옆에 있던 나무는 아마 병사한 듯하다. 남아 있는 나무도 가지가 많이 잘려나가고 줄기 밑둥에는 약재 처리된 비닐이 감겨 있다. 참나무마름병이라고 한다. 인간의 도움으로 힘들게 버티고 있는 이 굴참나무는 수령이 200년이 넘었다. 참나무 종류가 200년을 넘게 살았다는 것은 굉장한 고목이다. 나무 높이는 27m, 줄기 둘레는 3.8m다. 부디 건강하게 살아남기를 바란다.

천년의나무 2017.09.06

청계산 옥녀봉

청계산 옥녀봉에서 북능선을 따라 양재화물터미널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걸었다. 용두회 다섯 명이 함께 했다. 잔뜩 흐렸고 다행히 잠깐만 우산을 쓰면 된 날이었다. 산길 길이는 5km 정도 될까,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옥녀봉은 해발 375m의 낮으막한 봉우리다. 여기서는 북서 방향의 전망이 트였다. 발 아래가 과천이고 그 너머에 서울 도심이 보인다. 옥녀봉 정도면 실버 코스로 적당하다. 길을 걸은 뒤에는 양재통닭에서 치킨과 생맥주로 목을 축이고 인근 당구장에서 게임을 한다. 무슨 공놀이든 시합에 들어가면 양보가 없다. 도토리 키재기 실력이지만 사뭇 진지해진다. 그래서 재미있다. 요사이 당구장은 노인 세상이다. 한때는 고딩들이 독차지할 때도 있었는데 이젠 보기 어렵다. 당구는 80이 되어도 즐길 수 있는..

사진속일상 2017.09.06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작가의 글을 읽고 싶어 임의로 골라본 책이다. 전에 읽었던 '삼풍백화점'이라는 단편이 생각났고, 다른 작품은 어떨까, 라는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90년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미, 준모, 지혜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다. 무대는 역시 강남이다. 세 아이는 모두 하나씩의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이 셋을 단짝으로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 강남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아이들의 아픔은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이유로 가정이 붕괴된 세미는 할머니 손에 맡겨진다. 지혜는 부모의 불화로 고민이 크다. 준모는 틱 장애로 결국은 학교를 자퇴한다. 아픔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몫이다. 셋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힘든 시기를 헤쳐 나간다. 의식이 건전하고 그 또래에서 생기는 불량기도 없다. 어려운 ..

읽고본느낌 2017.09.04

진득찰

가을에 들길을 걸을 때면 바지에 까만 씨앗이 붙곤 한다. 떼어내자면 무척 성가시다. 진득찰의 꽃이 지고 맺히는 길쭉한 열매다. 진득찰 나름의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참아줄 수도 있겠다. 얼마나 진득진득하게 달라붙으면 진득찰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진드기와 찰거머리의 합성어 같다. 진득찰은 한약의 재료로도 쓴다. 특히 중풍에 좋다고 한다. 진득찰의 노란 꽃은 여름의 막바지에 피어난다.

꽃들의향기 2017.09.03

남한산성 큰꿩의비름

만개 시기에는 조금 이르다. 작년과 다른 점은 성벽에 풀이 많이 자라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큰꿩의비름을 보호하기 위해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좋게 해석해 본다. 다른 곳은 말끔한데 큰꿩의비름이 자라는 곳만 풀이 무성하기 때문이다. 큰꿩의비름 개체 수도 늘었다. 작품사진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꽃 주변이 지저분해서 좋은 앵글을 잡을 수 없는 게 아쉬울지 모른다. 남한산성에 큰꿩의비름이 피면 가을이 왔다는 신호다. 기다리는 꽃이 있고, 해가 바뀌어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꽃만큼 반겨줄 것 같지는 않다.

꽃들의향기 2017.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