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 30

논어[264]

진나라에서 식량이 떨어지자 따르던 사람들이 시들시들 일어나지 못하므로 자로가 뿌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훌륭한 인물들도 궁한 때가 있는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들에게도 본래 궁한 때가 있는데, 하찮은 사람들은 궁하면 함부로 하느니라."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 온見 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 窮斯濫矣 - 衛靈公 2 '군자고궁(君子固窮)'을 전에는 '군자는 궁함을 고수한다'로 해석했다. '자발적 가난'을 스스로 선택하고 지켜나간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공자는 부유할 때도 있고 빈천할 때도 있다고 봤지, 어느 한 편을 두둔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 해석이 바른 것 같다. "군자에게도 궁한 때가 있다." 문제는 궁함을 대하는 태도에서 군자와 소인이 구별 된다. 군자는 궁함..

삶의나침반 2017.11.30

나목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나목 / 신경림 겨울나무는 영하 이삼십 도의 추위를 어떻게 견뎌낼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수액이 얼면 세포가 파괴될 텐데 얼지 않게 하는 어떤 작용이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부동액 성분이 방출되는지도 모르고, 나무 내..

시읽는기쁨 2017.11.29

초겨울 경안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섰는데 낮 기온이 올라 느린 걸음에도 땀이 뱄다. 겨울이 되니 산에 갈 마음은 들지 않고, 집 주변의 평탄한 길 걷기가 좋다. 경안천을 따라 두 시간 정도 산보를 했다. 카메라를 바꿔볼까 하고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다.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작품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고 굳이 화질 좋은 카메라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내가 나에게 해주는 선물로 어쩌다 이런 사치를 부려도 괜찮으리라. 경안천 억새는 흰 깃털을 날려 보내고 더 가벼워졌다. 천변에 있는 겨울 나목도 눈에 들어왔다. 혼자 걷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이 계절에는 좀 더 쓸쓸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진속일상 2017.11.28

층간 내리사랑

KBS TV에 나오는 공익광고 중에서 요사이 공감을 하며 본 게 '층간 내리사랑'이라는 광고다. 아파트 위층에 사는 사람이 아래층에 사는 사람을 배려하는 내리사랑을 보이자는 내용이다. "집에서는 왜 까치발로 걸어요?" "아랫집에 아기 재우는 초보 아빠가 있으니까요." "사진 거는 걸 왜 내일까지 미루세요?" "시험 앞둔 수험생이 있으니까요." "오디션이 코앞인데 왜 기타는 안 치세요?" "내일 면접인 아랫집 청년이 자고 있으니까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라는 멘트로 광고는 마무리 된다. 가슴을 훈훈하게 해 주는 따뜻한 광고다. 아파트공화국에서 층간 소음 문제는 심각하다. 내 집인데 아이가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란다면, 다른 편에서는 타인의 소음으로 고통받는 일이 없기를..

길위의단상 2017.11.27

발레리안 : 천 개 행성의 도시

화려한 미래 세계를 감상하기에 적당한 영화다. 때는 28세기, 우주 도시인 알파 스테이션에는 3천여 외계 종족이 어울려 살아간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기이한 생김새를 한 생명체를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다. 그러나 종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20세기의 틀을 못 벗어났다. 눈요기에 비해 내용은 별 것 없는 영화다. 특히 진부한 사랑 타령은 영화의 효과를 반감시킨다. 감독은 뤽 베송으로 오래전에 봤던 '제5원소'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두 영화의 배경은 다르지만 주제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풀어내는 방식에서는 전작보다 못한 것 같다. 카시안 행성의 빅 마켓, 그리고 우주의 파라다이스라 할 수 있는 뮐러 행성의 풍경은 흥미롭다. 뮐러족은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나비족을 닮았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뮐러족은 그..

읽고본느낌 2017.11.26

논어[263]

위나라 영공이 선생님께 진 치는 법을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제기 늘어놓는 법은 진작 배웠지만 병졸 늘어놓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이튿날 떠나버렸다. 衛靈公問 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 衛靈公 1 당시는 군사력이 곧 국력인 시대였다. 위나라 영공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꿈꾸는 세상은 예와 덕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였다. 김구 선생이 자서전에서 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려는 소망을 밝힌 것과 비슷하다. 공자는 제 뜻을 펼칠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 주저없이 떠났다. '바로 다음날 떠나버렸다'는 설명이 잘 말해준다. 공자 본인이든지 아니면 제자 중에라도 진 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

삶의나침반 2017.11.25

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에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려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

시읽는기쁨 2017.11.24

아차산길을 걷다

아차산은 동네 뒷산처럼 포근하다. 걸어가도 될 만큼 아차산과 가까운 거리에 산 적이 있었다. 그때의 친근함이 아직 남아있는 탓이기도 하겠다. 아차산에 난 길의 대부분을 걸어 보았다. 그런데 떠나고 나서는 아차산에 올 기회가 적었다. 헤아려보니 4년 만이다. 오전에는 맑았는데 한낮이 되면서 하늘은 구름으로 덮였다. 산 정상 가까이 갔을 때는 눈송이도 보였다. 잠시 날리다 말았지만 올해의 첫눈을 맞았다. 신현팀과 두 번째로 함께 했다. 거의 다 아는 사이라 합류해도 자연스러웠다. 용마산을 넘어 중곡동으로 하산할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궂어져서 긴고랑계곡으로 내려왔다. 시장통 허름한 식당에서 된장찌개로 점심을 했다. 소박한 밥상이라 마음이 풍성했고, 막걸리 석 잔에 배가 불러 세상이 다 내 것이 되었다. 산과 식..

사진속일상 2017.11.21

지연된 정의

법이 만인에게 공평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자에게는 너그럽고, 약자에게는 엄격하고 가혹하다. 법원 출입을 해 보면 안다. 힘 있는 사람은 잘도 빠져나가는데, 빽도 돈도 없으면 적진에 떨어진 혈혈단신의 신세가 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절규가 나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 세상 현실이 그렇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약자의 편에 선 사람이 있다. 전직 기자였던 박상규 씨와 박준영 변호사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또는 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재심을 신청하고 무죄를 이끌어낸다. 는 두 사람이 재심 프로젝트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책에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등 세 사례가 나온다. 앞의 둘은 1999년..

읽고본느낌 2017.11.20

500원

500원 줄서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모 종교 단체에서 주는 500원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노인들로 긴 줄이 생긴다는 것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고 어떤 노인은 새벽에 집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몸싸움도 생기고 싫은 소리도 나오는 모양이다. 500원 때문에.... 500원 주기는 IMF 때 시작했다는데 찾아오는 노인들이 줄지 않으니 중단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고작 500원을,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든다. 몇 년 전 보도에서는 꼭 돈이 궁해서 줄 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혔다. 무료해서 놀이 삼아 나온다는 노인도 있었다. 사연도 여러 가지겠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 중 1위다. 66~75세의 빈곤율은 43%, 76..

참살이의꿈 2017.11.19

성지(4) - 양근성지

6. 양근성지 양평에 있는 양근(楊根)성지는 이 지역 신앙 공동체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양근'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 1908년에 양근군과 지평군이 합쳐지면서 양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양근성지는 한국 천주교의 창립 주역인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하비에르 순교자가 태어난 곳이다. 이승훈 베드로가 양근으로 내려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등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의 신앙 공동체도 양근성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의 초기 신자들은 조과, 망과, 성로신경 등을 바치며 신앙을 실천했고, 신부가 없는 상태에서 모방 성직제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1837년에는 샤스탕 신부님이 조선에 입국한 후 양근에 머물면서 조선말을 공부하고 신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또..

사진속일상 2017.11.17

논어[262]

궐 마을 출신의 소년이 심부름을 한즉, 어느 사람이 물었다. "진취성이 있는 애인가요?" 선생님 말씀하시다. "내가 그의 앉는 자리를 보고, 그가 그의 선배들과 나란히 걷는 것을 보면 진취성이 있는 애가 아니라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애입니다." 闕黨童子 將命 或問之 曰 益者與 子曰 吾見其居於位也 見其與先生幷行也 非求益者也 欲速成者也 - 憲問 31 궐 마을은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공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똑똑한 아이를 데려와 특별히 가르쳤던 것 같다. 아이는 공자 가까이에서 심부름도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이의 장래성에 대해 물으니 공자의 대답은 분명하다. 아이의 행동거지를 보고 인간됨을 분별한다. 이 아이는 영재에 해당할 것이나, 제 영민만으로 남보다 앞서나가려 한다. 공자는 아이에게서..

삶의나침반 2017.11.16

이게 뭐야? / 김사인

가슴이 철렁한다. 눈치챈 건 아닐까, 내가 깡통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언제부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차를 타고 모르는 내색을 아무도 않지.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아이가 물으면 집에 갈래, 울먹이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뜨거워지네. 이건 강아지 이건 나무 이건 칫솔 그렇게 일러줄까 허둥지둥 구파발이라고 우리나라라고 지구라고 하면 되나. 강아지가 뭐야, 지구가 뭐야, 다시 물으면? 무서워라 - 걱정 마, 좋은 데 가고 있어 - 다 와가, 가보면 알아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서 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

시읽는기쁨 2017.11.15

궐리사 은행나무

궐리사(闕里祠)는 절이 아니라 공자님을 모신 사당이다. 오산에 있는 궐리사는 공서린(孔瑞麟, 1483~1541) 선생이 후학 교육을 위해 만들었으나, 정조 17년(1792)에 사당을 세우고 궐리사라 붙였다. '궐리'란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이다. 오산 궐리사에 500년 가량 된 은행나무가 있다. 화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렀는데 마침 노랗게 물이 들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찾아오는 사람들도 궐리사보다는 은행나무 곁에서 더 오래 머문다. 이 은행나무는 중종 시절 공서린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은행잎이 유난히 작다. 5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하다. 뒤에서 바라보는 궐리사와 은행나무가 잘 어울린다. 이 은행나무가 없다면 궐리사는 많이 쓸쓸할 것 같다.

천년의나무 2017.11.14

바둑 놀이

화성에서 2박 3일 동안 바둑을 두었다. 회원이 줄어 세 명밖에 안 남았지만 집중도는 마찬가지다. 집에 들어가면 사흘 동안 외출 한 번 없이 밥 먹고 바둑 두고를 반복하는 게 일이다. 바둑에 반쯤 미쳤다. 노름에 미친 사람이 사흘 낮밤을 잠도 안 자고 화투판을 지키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별나다고 할 것 같다. 재미난 것은 어쩔 수 없다. 바둑은 재미난 놀이다. 바둑도 승부가 걸리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생긴다. 탁구 모임에서는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다. 깔깔거리며 즐겁게 논다. 바둑은 지고 나면 좀 부아가 난다. 특히 내 실수로 졌을 때는 자책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내용이 좋다면 지더라도 만족한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적당한 스트레스는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이..

사진속일상 2017.11.14

이완용 평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인간에 내재하는 특수한 악마성을 부정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아이히만은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 누구라도 악인이 될 수 있다. 반인륜적이거나 반민족적 범죄를 저지르는 자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매국노로 비난받는 이완용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격적으로 이완용은 술도 마실 줄 모르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시문과 서예를 낙으로 삼은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다. 조선 왕실 입장에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기도 했다. 더구나 친일로 돌아서기 전까지는 독립협회 회장을 맡으며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이라는 글씨도 이완용이 쓴 것이다. 이완용을 변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매국노라고 비..

읽고본느낌 2017.11.11

등대지기

한때 등대지기를 꿈꿔 본 적이 있었다. 나처럼 혼자 잘 노는 게 특기인 사람은 누구나 그런 소원을 품어봤을 것이다. 사실 훈장 길에 들어설 때부터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그나마 무난할 듯하여 선생을 선택했으나 사범 교육을 받으면서 오산이라는 걸 알아챘다. 선생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해야 했다. 은둔형은 할 직업이 아니었다. 교직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엄청 심하기 때문이다. 첫 발령을 받기 전부터 다른 길을 생각했다. 첫 번째 시도가 신학이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신학대학원에 들어갔다. Y대 신학대학원인데 당당히 시험을 보고 합격한 것이다. 1년 정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그러나 현실과 꿈 사이에서 갈등 하다가 결국은 접었다. 만약 그때 신학..

길위의단상 2017.11.10

반계리 은행나무(3)

이 나무와는 13년 전에 처음 대면했다. 노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강렬함에 넋을 뺏긴 기억이 난다. 10여 년이 흘렀어도 마찬가지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은행나무 중 제일 선연한 노란 색깔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균형 잡힌 몸매도 아름답다. 800년 된 나무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때에 비해 주변은 잘 정리되었다. 마을 가운데 있지만 공터가 넓어서 여유가 있다. 혼자였다면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지는 석양을 받을 은행잎은 더욱 환상적일 것이라고 상상을 해 본다. 가을이 되면 꼭 찾아보고 싶은 나무 중 하나다.

천년의나무 2017.11.10

용문사 은행나무(4)

이번에는 때가 늦었다. 노란 은행잎이 많이 떨어지고 허전했다. 10월 말에 찾았던 재작년에는 초록 잎새가 남아 있을 정도로 빨랐고, 이번에는 지각을 했다. 절정의 순간을 맞추기가 그만큼 힘들다. 떨어진 은행잎을 쓸어내었는지 나무 아래도 휑해서 아쉬웠다. 이번 길에는 처제와 동서가 동행했다. 입시를 코앞에 둔 자식이 있어서 마음이 안절부절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천 년 고목을 보면서 좀 더 넓게 세상을 보았으면 한다. 그때는 사소한 일에 왜 그렇게 노심초사했을까, 지나고 봐야 깨닫는다. 인생의 일이란 대부분 그렇다. 지금 나도 마찬가지다.

천년의나무 2017.11.10

명륜당 은행나무(2)

아직 초록색이 남아 있다. 때를 정확히 맞추기가 어렵다. 산에는 단풍이 질 때지만 도시는 이제야 시작이다. 나무에 관심이 없는 친구도 감탄할 정도로 이 나무의 위용과 아름다움은 대단하다. 두 그루 중 왼쪽에 있는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중종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윤탁이 심었다고 전해지니 500년이 되었다. 이곳에서 꿈을 키우던 조선 시대 유생들과 일상을 함께 했던 은행나무로 역사성이 깊다. 나무도 분위기를 닮는지 선비의 기품이 느껴지는 나무다. 이 나무 앞에서는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완전히 노랗게 물든 모습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천년의나무 2017.11.09

논어[261]

원양이 걸터앉아서 맞이한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어려서부터 건방지고, 나이 먹어도 보잘 것 없고,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을 도둑놈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팡이로 정강이를 툭툭 쳤다. 原壤夷俟 子曰 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謂賊 以杖叩其脛 - 憲問 30 흥미로운 대목이다. 공자의 말과 행동을 볼 때 원양은 공자와 격의 없는 사이였던 것 같다. 공자가 찾아왔을 때 걸터앉아서 맞이하고, 공자가 지팡이로 정강이를 칠 정도면 어릴 적 장난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여기서 교훈적인 걸 찾고 싶지는 않다.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삶의나침반 2017.11.09

행복의 계단 / 이후재

창문을 넘어온 손수건 한 장 같은 아침 말간 햇살과의 만남이 첫 계단 작은 식탁에 앉아 아내의 손맛에 취해 날마다 감개무량하다면 두 번째 누군가의 초대로 길을 나서며 이웃의 온기 머금은 인사를 받는 것은 세 번째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포시 포옹하는 두 나비에게 배시시 웃음 던지면 그건 네 번째 아, 그러나 탱글탱글한 물상物象 앞에서 소유욕이 돋아나면 그것은 망령 - 행복의 계단 / 이후재 현대인은 행복의 파랑새를 쫓느라 발밑은 바라볼 줄은 모른다. 행복은 멀리, 높이 있지 않다. 내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에 행복으로 향하는 계단이 놓여 있다. 그저 한 발 내닫기면 하면 된다. 불평등한 세상이라지만 행복만은 평등하게 주어졌다. 돈이 많다고, 권세가 크다고 더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

시읽는기쁨 2017.11.08

창경궁 단풍

용두회에서 창경궁으로 단풍 구경을 갔다. 서울에 있는 고궁 중 단풍이 제일 고운 곳이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일 것이다. 창경궁은 창경원이었던 시절에는 봄 벚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궁궐 복원 사업이 완성되고 벚나무는 사라졌다. 대신 가을철 단풍이 볼 만해졌다. 다른 어디보다 단풍 색깔이 고운 장소다. 날이 흐려서 사진 찍을 때 콘트라스트를 줬더니 색깔이 좀 과해졌다. 올해는 단풍을 보러 설악산으로, 울릉도로 찾아다녔지만 마지막을 창경궁으로 마감한다. 세상은 참 아름답다는 걸 실감하는 올가을이다.

사진속일상 2017.11.08

아이 캔 스피크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따스하게 그려낸 영화다. 무겁게 다루어질 수 있는 주제인데 유머러스하면서 인간미가 느껴지는, 그러면서 심금을 울린다. 짜임새도 훌륭해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나문희 배우의 열연이 뒷받침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등장인물 모두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인간미다. 조역으로 나오는 시장 사람이나 공무원 같은 모든 캐릭터가 인간이 품위랄까, 인간다움을 지켜내고 있다.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나옥분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시장의 가게 아줌마가 할머니가 위안부로 밝혀진 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거리를 둔다. 그럴 수 있느냐고 찾아가 따질 때 아줌마는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둘이 껴안고 우는 장면에서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극적..

읽고본느낌 2017.11.06

도동 향나무

울릉도에는 화산암 바위 틈에서 자라는 향나무가 많다. 통구미와 대풍감에 있는 향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도동항을 둘러싼 산비탈에도 오래된 향나무들이 보인다. 무려 2천 살이 넘는 향나무도 있다고 한다. 당연 우리나라 최고령 나무다. 그런데 어느 나무인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나무를 찍어 보았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경사진 비탈에서 위태롭게 자라고 있다. 키를 낮추어야 할 것 같은데 홀로 우뚝하다. 고고장향(孤孤長香)으로 불러도 될 것 같다.

천년의나무 2017.11.06

울릉도 해국

울릉도는 작은 섬이지만 식물 생태는 다양하다. 750여 종의 식물이 살고 있고, 지구상에서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특산식물도 32종이나 된다. 짧은 울릉도 여행에서 식물까지 살필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스쳐 지났던 길이지만 나리분지 주변의 천연 원시림의 규모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11월 초의 울릉도에서 제일 많이 본 꽃이 해국이었다. 바닷가 바위 절벽에, 심지어는 마을의 돌 축대 틈에서도 해국이 자라고 있었다. 특히 화산암 검은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해국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울릉도 해국은 육지 해국에 비해 분포 밀도가 높고 꽃도 컸다. 울릉도 가을 풍경의 주인공은 해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울릉도 북면에는 바다와 함께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가 많다고 한다. 다시 울릉도에..

꽃들의향기 2017.11.05

울릉도(2)

아침 9시에 강릉에서 출발한 배는 12시에 울릉도 저동항에 도착했다. 꼭 세 시간이 걸렸다. 양로원에서 단체로 온 노인들이 얼마나 배멀미를 하는지 세 시간이 고역이었다. 덩달아 아내도 막바지에는 여러 차례 토했다. 2박 3일의 울릉도 여행은 힘겹게 시작되었다. 지금은 쾌속선이기 망정이지 예전에는 10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는데, 울릉도 가기가 외국 나가기보다 더 힘들었을 게 짐작이 된다. 울릉도를 오가는 배 표만 예매를 했지 다른 것은 모두 현지에서 부딪치기로 했다. 먼저 숙소를 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터미널 안내소에서 조용하게 묵을 숙소에 대해 문의하니 '독도 호텔'을 추천해 주었다. 신축 건물에 시설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일박에 8만 원으로 다른 데 비하면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편안한 잠자리가 우..

사진속일상 2017.11.05

울릉국화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산식물이다. 옛날에는 울릉도에서 가을이면 흔하게 피어났다는데 지금은 나리분지의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이면서 멸종위기식물로 지정되어 있다. 울릉국화는 구절초와 똑 같이 생겼다. 울릉국화라 부르기 보다는 울릉구절초라고 해야 맞겠다. 구절초와 다른 점은 잎이 윤기를 띠고 있다는 데 그것도 전문가가 아니면 제대로 구분하지 못 할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울릉국화를 육지에서 기르면 잎의 윤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꽃은 9, 10월에 피는데, 이미 시들어가는 울릉국화를 나리분지에서 보았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 놓고 보호하고 있었다. 없어지는 데는 순식간이지만,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것 같다. 사람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

꽃들의향기 2017.11.04

울릉도(1) - 성인봉

울릉도 둘째 날, 천부로 가는 6시 45분 버스를 탔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을 올라 저동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일주도로를 시계 방향으로 달린 버스는 8시에 천부에 도착했다. 저동에서부터 1시간 10분이 걸렸다. 천부에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갈아타니 20분 만에 나리분지에 닿았다. 나리분지에 있는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남은 밥은 비닐에 싸서 배낭에 챙겼다. 간단한 점심 요기로 유용했다. 9시부터 성인봉 등반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탄하고 너른 길이 30분 정도 이어졌다. 나리분지는 그만큼 넓다. 화산 폭발 후 함몰된 칼데라 지형인데 만약 물이 찼다면 천지 같은 큰 호수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울릉도에서는 보기 어려운 평지다. 숲에는 너도밤나무가 많다. 천천히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사진속일상 2017.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