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 29

적폐 청산

올해의 단어를 고르라면 나는 '적폐 청산'을 꼽겠다.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 시절 대표적인 공약이었고, 당선 뒤에도 잘못된 과거사 정리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반대 진영에서는 정치 보복이라고 비판하지만, 썩은 부위는 빨리 도려내야 한다. 반발이 없으면 제대로 된 적폐 청산이 아니다.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로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 선정되었다. 적폐 청산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제일 큰 과오는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한 번 단추를 잘못 끼우자 나라의 근본이 흐트러졌다. 그런 잘못을 다시 범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번 적폐 청산으로 두 가지는 꼭 시정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는, 전관예우다. 전관예우는 판사나 검사로 재직했던 사람이 변호사로 개업하면서..

길위의단상 2017.12.31

바닷마을 다이어리

따뜻하게 가슴이 데워지며 봤던 영화다. 연말이 되어선지 이 영화가 생각난다. SF 장르를 선호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인간애가 담긴 이런 잔잔한 영화도 좋아진다. 네 여배우의 얼굴만 봐도 미소가 절로 생긴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쩌면 이렇게 곱게 자랄 수 있는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는 이야기다. 각자 개성은 다르지만 네 자매를 함께 묶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을 그렸지만 가족애를 뛰어넘는다. 내가 행복하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잘 보여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눈에 익다. 가족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잘 다루는 것 같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남자 캐릭터는 좀 엉뚱하게 나온다. 보살핌이나 배려를 강..

읽고본느낌 2017.12.30

논어[269]

선생님 말씀하시다. "곧구나! 사어는. 나라의 질서가 섰을 때도 화살 같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도 화살 같지. 참된 인물이지! 거백옥은. 나라의 질서가 섰을 때는 벼슬 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걷어치워 감추어 버릴 수도 있지." 子曰 直哉 史魚 邦有道如矢 邦無道如矢 君子哉 거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 - 衛靈公 7 고수는 부드럽다. 유연하다. 정형화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사어와 거백옥의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된다. 그러나 공자는 두 사람 모두를 칭찬한다. 사어는 곧아서 아름답고, 거백옥은 때를 맞출 줄 알아서 아름답다. 내면의 진실된 마음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삶의나침반 2017.12.29

괜찮아 /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시읽는기쁨 2017.12.27

어쩌다 어른

'어쩌다 어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채널 돌릴 때 잠깐 봤을 뿐 제대로 시청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제목이 특이해서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그때마다 왜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를 생각하게 되니 작명 하나는 잘 한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어찌하다 보니 어른이 되었는지 모른다. 여기서 '어른'은 육체적인 나이가 의미하는 어른일 것이다. 정신의 성숙도와는 관계없다. 그렇게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인격적으로는 익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미성숙한 어른이 주변에는 수두룩하다. 그걸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기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한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온통 '어쩌다' 투성이다. 어쩌다 태어나고, 어쩌다 성인이 되고, 어쩌다 자식을 낳아 부모..

참살이의꿈 2017.12.26

역정

리영희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다. 출생에서부터 기자 생활하던 1963년까지를 기록한 자서전이다. 선생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돼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시골에서 은거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 아쉽게도 선생의 청년 시절까지만 정리되어 있다. 은 선생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4.19와 5.16 쿠데타를 겪으며 비판적 지성을 키워 나간다. 특히 통역 장교로 근무하며 전장을 누빈 경험은 선생에게 민족과 역사의식을 길러준 귀한 시간이었다. 진실을 찾아 나선 평생의 역정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 과정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공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정신은 정의감이다. ..

읽고본느낌 2017.12.25

논어[268]

자장이 통할 수 있는 길을 물은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말씨가 믿음직스럽고 행동이 착실하면 되놈의 나라에서도 통할 수 있지만, 말씨가 미덥지 못하고 행동이 착실하지 못하면 제 고을에선들 통할 수 있을까. 섰을 때는 멍에 멘 망아지가 눈 앞에 있는 것이 보이고, 수레 안에 앉았을 때는 수레가 멍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어야 어디나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자장이 이를 큰 띠에 적었다. 子張問行 子曰 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邦行矣 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夫然後行 子張書諸神 - 衛靈公 6 "말은 믿음직스럽고 행동은 경건해야 한다[言忠信 行篤敬]." 한 해를 마감하며 나를 돌아보는 말씀이다. 더 줄이면 '신(信)'과 '경(敬)'이다. 삿됨이 없는 겸..

삶의나침반 2017.12.24

맑은 웃음 / 공광규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만 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웬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 맑은 웃음 / 공광규 인간만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치명적인 자뻑이다. 아무리 지력이 발달한들 우리는 그저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니면 ..

시읽는기쁨 2017.12.23

어머니와 서울 나들이

집에 와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나들이를 나갔다. 롯데 월드타워에 있는 아쿠아리움과 123층 전망대에 올랐다. 어머니 덕분에 나도 덩달아 첫 구경을 했다. 첫째가 나와서 점심을 사 주고 할머니에게 모자 선물도 드렸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친구들 어머니는 병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요양원에 계시기도 한다. 자식과 외출을 할 수 있는 어머니는 거의 없다. 그런데 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것만 제외하면 기력이 여전하시다. 쉬엄쉬엄이긴 하지만 천안에서는 산길을 두 시간 가까이 걸으시기도 했다. 정신력도 아직 쇠하지 않으셨다.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일이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노인의 앞날은 모른다. S의 모친을 3년 전에 결혼식장에서 뵈었다. 당시 100세셨는데 손녀의 결혼을 축하하..

사진속일상 2017.12.21

사람이 아니야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사오십 대 때 제일 뜨거웠는데 그 시절에는 한 해에 백 권 정도는 읽었다. 직장에서 벗어난 지금은 자유 시간이 더 많이 나지만 독서량은 줄어들었다.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육칠십 권은 될 것이다. 책을 가까이하는 것이 나에게는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여행을 갈 때도 보든 안 보든 책 한 권은 가방에 넣는다. 일행에서 벗어나 몇 장이라도 들춰봐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안중근 의사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힌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런 별스러운 나를 어떤 사람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친구들은 안부를 물을 때 "요즘도 ..

길위의단상 2017.12.20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작가의 산문집이다.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글 참 잘 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상의 이야기를 이만큼 맛갈스럽게 풀어내는 재주도 드물 것이다. 또한 글의 기저에는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이 들어 있다. 문체는 솔직하고 명쾌하며 통통 튀지만, 내용은 돌직구처럼 묵직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쉽게 보내주지 않고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는 여자, 존재, 사랑, 일의 네 가지 주제로 되어 있다. 삶의 현장에서 누구나 부딪치는 문제들이다. 작가는 두 아이의 엄마로서 가족의 생계를 부담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더구나 예민한 감성이 작은 것 하나 허투루 흘리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여성의 시각에 대해 남성들은 무지한 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입장에 대해서 배우는 바가 ..

읽고본느낌 2017.12.19

논어[267]

선생님 말씀하시다. "가만히 있어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인가! 대체 무엇을 했을까! 몸을 공손히 하고 왕위에 앉아 있기만 했던 것이다."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 衛靈公 5 에서 무위(無爲)를 만나니 반갑다. '몸을 공손히 하고 왕위에 앉아 있기만 했다'는 표현은 도가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유가와 도가가 앙숙이 되기 전에는 이렇듯 서로 공통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무위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 반면, 노자나 장자는 끝까지 무위에 매달렸던 점이 다른지 모른다. 어쨌든 공자도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최고의 다스림으로 본 것은 분명하다.

삶의나침반 2017.12.18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시읽는기쁨 2017.12.17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오늘은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찾아 읽는다. 옆 방에 들릴까 봐 혼자 작은 소리로 음송하니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특히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말씀에 울컥해진다. 세상만사 새옹지마가 아니던가. 궁(窮)이 통(通)이요, 통이 궁이다. 잔물결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 무슨 바람이든 고맙게 받아들이고, 헤쳐나갈 뿐이다. 바위처럼 진중해지자.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

참살이의꿈 2017.12.16

흐르는 시간

세월 참 빠르구나, 라고 의례껏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은 연말이다. 육십이 지나면 고속도로를 탄 것 같다지만, 사실 그다지 실감을 못한다. 바삐 지내는 사람과 달리 주로 집에만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다. 이것도 나 같은 생활자의 느긋함이다. 시끄러운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문으로 흐르는 불빛이 길었다. 어쨌든 한 해는 저물고 있고, 저 앞 어둠 속에서 새해가 힘차게 다가오고 있다.

사진속일상 2017.12.15

2017 세계 번영지수

영국에 있는 경제연구소인 레가툼(Legatum)에서 매년 세계 각국의 번영지수를 발표한다. 올해는 149개국을 대상으로 9가지 지표로 각국의 순위를 매겼다. 평가 지표는 경제, 기업 환경, 국가 경영, 개인의 자유, 사회적 자본, 안전과 안보, 교육, 보건, 자연 환경 등으로 종합적으로 삶의 질을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작년보다 한 계단 하락한 36위에 올랐다. 이 평가가 시작된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계속 순위가 하락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줄곧 20위권에 머물다가 작년부터 30위권으로 떨어졌다. 우리나라가 높은 평가를 받은 부문은 보건, 교육이고 낮은 평가를 받은 부문은 개인의 자유, 자연 환경, 사회적 자본이다. 거의 100위권까지 떨어진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사회가 중..

길위의단상 2017.12.14

위로받고 싶은 날들

다른 이의 살아온 궤적 흥미롭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산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길이 있고, 내가 걸어온 길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인생의 길이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듯, 가 보지 못한 길이 더 멋있게 보인다. 은 조재호 선생의 자전소설이다.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난 뒤 본인의 일생을 정리한 글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같은 교직에 있었던 분이라 더 관심이 갔다. 그러나 학교와 사회의 범생이였던 나와는 딴판이었다. 파란만장의 불꽃 같은 삶이 책 속에 있었다. 선생은 어두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멋대로 살았을 수도 있고, 세상에 대한 저항을 온몸으로 했을 수도 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교실에는 소위 노는 아이들이 서너 명은 있었다. 그..

읽고본느낌 2017.12.13

논어[266]

선생님 말씀하시다. "유야! 곧은 인격을 알아주는 사람은 드물구나!" 子曰 由 知德者鮮矣 - 衛靈公 4 자로는 공자와 8살 차이다. 둘은 스승 제자 사이지만 어쩌면 친구 같은 감정도 있었는지 모른다.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그러하지 않았을까. 여기 나오는 짧은 대화에서도 그런 낌새가 느껴진다. 공자가 자로와 마주 앉아 술 한잔하면서 속마음을 토로했을 것 같다. '이인' 편에는 공자의 이런 말이 나온다. "德不孤 必有隣[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드물지만 그래도 덕을 알아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귀하니까 오히려 드문 것이다. 정신의 가치는 외로움으로 인하여 더욱 빛난다.

삶의나침반 2017.12.12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아내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남편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

시읽는기쁨 2017.12.11

눈 내리는 날

유리창 너머로 내리는 눈을 본다. 이렇게 활활 쏟아지는 모습은 올 들어 처음이다.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습기를 많이 머금은 눈이다.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바싹 건조할 날씨라야 눈도 바삭바삭하고 포근하다. 오늘 눈은 땅에 떨어지면서 이내 질척거린다. 전에는 눈이 내리면 막걸리 생각이라도 났는데 이제는 무덤덤하다. 도리어 귀찮게 여겨지기도 한다. 감성이 말라가는 것 같아 슬프다. 아이들은 플라스틱 썰매를 들고 바삐 어딘가로 달려간다. 내 어린 시절의 겨울이 겹쳐진다. 베란다의 제라늄은 여전히 붉다. 여름 겨울 없이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운다. 제라늄을 보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틀렸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도 잘못이다. 꽃은 꽃으로 아름다울 뿐이다. 한낮이 되면서 눈이 그치고 햇볕이 ..

사진속일상 2017.12.10

잘 지는 법

이기고 지는 것은 기자지상사(棋者之常事)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이기면 한 번 진다. 바둑을 두면서 요사이 깨달은 점은 질 때 잘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는 것보다 어떻게 지느냐가 중요하다. 패한 바둑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 바둑이 수세로 몰리면 마음이 흔들린다. "졌습니다" 하고 깔끔하게 돌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도 별 위로가 안 된다. 이럴 때 감정을 추스르고 냉정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졌을 때의 태도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 지더라도 상큼하게 지자고 다짐하며 바둑판 앞에 앉는다. 자꾸 연습하다 보면 습관이 되기도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기고 지는 데서도 벗어나고 싶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 잘 지는 훈..

참살이의꿈 2017.12.09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제목에 끌려서 읽은 책이다. 교직에 있었을 때 나도 그랬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교실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수업 시작 종소리가 저승사자의 호출 소리로 들릴 때가 많았다. 만족한 수업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 수업 붕괴나 학교 폭력은 이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학교가 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현장의 최일선에 서 있는 사람이 교사다. 는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실태를 실사례 중심으로 고발하고 있다. 내가 교직을 힘들어했던 이유는 학교에서 교육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입시 시스템의 한 부속품일 뿐이었다. 선생으로서 열심히 한다는 게 누구를 위하여 일하는 건지 뻔히 보였다. 바쁘게 일하고 열심히 노력할수록 역설적으로 반교육적인 행태로 연결되었다..

읽고본느낌 2017.12.08

한 장의 사진(24)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제대할 때는 누구나 한마디씩 한 말이 있었다. "제대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 군대 생활에 대한 혐오감이 그만큼 컸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군대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데 30년은 걸렸다. 반면에 '군대에 가야 사람 된다'는 말도 있다. 국민정신 교육장으로서 군대의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의 말이다. 좋게 말하면 나라와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온몸으로 배우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사람 된다'는 말이 권위적 체제와 이념에 대한 온순한 복종의 의미로 들린다. 외국에 나갔을 때 제일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이스라엘인이라는 얘기를 해외여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서 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시끄럽고 안하무인이라는 것이다. 왜 하필 이스라엘인지 의아했는데 의무징병제와..

길위의단상 2017.12.07

초겨울 뒷산

아침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졌다. 바람이 불지 않고 낮인데도 볼에 닿는 냉기가 시리다. 햇볕을 쬘 겸 뒷산에 올랐다. 잎을 버린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 잘 스며드는 겨울 산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은 것 같아도 사실은 가진 게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계절이 겨울이다. 그래서 가슴 한쪽이 허전한지 모른다. 때때로 진실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아픔과 쓸쓸함에서 생명에 대한 연대 의식이 생겨나는가 보다. 가만히 겨울나무를 껴안아 준다. 겨울을 지나면서 나무는 단단해진다. 생존과 번식에 충실한 여름 한때였지만, 고독을 견뎌내는 겨울에야 나무는 내적인 성장을 한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시련의 시절을 살아내는 것이 공부다. 공부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따스해진다. 나무도 그렇다는 듯 가지를 살랑살랑..

사진속일상 2017.12.07

논어[265]

선생님 말씀하시다. "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운 지식인인 줄 아느냐?" 대답하기를 "네,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다. 내 지식은 하나로 꿰뚫었다." 子曰 賜也 女以予 爲多學而識之者與 對曰 然 非與 曰 非也 予一以貫之 - 衛靈公 3 증자는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를 충(忠), 서(恕)로 보았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지식을 하나로 꿰뚫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일이관지는 논리 체계가 아니라 깨달음의 영역이다. 임의로 정한 원칙이 아니다. 자신이 배운 지식과 경험을 통해 공자는 세상살이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그것이 일이관지라는 말에 담겨 있다. 우리가 배우는 목적도 자신의 일이관지를 얻으려는데 있다. 애써 배운 것들이 단순한 지식 나부랭이에 그친다면 미망의 늪에 더 빠져들 뿐이다. "내 지식은 하나로..

삶의나침반 2017.12.06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당신을 만나서 선생님이나 변호사, 검사나 약사, 의사나 화가 엄마나 아빠, 또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먼지가 되어도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 아주 오랜 꿈은 먼지가 되는 것 아무도 모르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폴폴 어딜 가야 한다는 무엇 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이러저리 떠다니다가 빗자루에 휙 쓸려 쓰레기통에 담겨 버려지기도 하는 또는 운 좋게 어느 집 방구석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십 년이고 가만히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일 필요도 없는 나는 먼지가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어요 - 먼지가 되겠다 / 송선미 시골에 내려가 소식 끊고 지내는 동기가 셋이나 된다. 가끔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지는 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복잡한 인간관..

시읽는기쁨 2017.12.05

다만 어리석을 뿐

매일 저녁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든다는 한 지인은 잠 못 드는 괴로움을 자주 토로한다. 사위가 고요한 한밤중에 깨어 있으면 과거에 자신이 잘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더 괴롭다고 한다. 아름다운 기억이야 즐겁게 반추할 수 있지만, 하필 후회스럽고 자책할 일만 생각나니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잠 잘 자는 나도 어쩌다 불면의 새벽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상념이 오가는데 옛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인과 마찬가지로 자랑할 일보다는 후회되고 아쉬운 일들로 머리가 꽉 찬다. 어떤 때는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노인이 되면 추억으로 산다는 데, 노년에 되씹는 추억이 꼭 감미롭지만은 않다. 그중에 제일 가슴 아픈 것이 셋째를 낙태시킨 일이다. 딸 둘을 두고 수년이 지나 아..

참살이의꿈 2017.12.04

손주 여섯 번째 생일

손주의 여섯 번째 생일에 일곱 식구가 원주에 있는 한솔오크밸리리조트에 다녀왔다. 스키장 개장 첫날이기도 했다. 아직은 눈썰매를 탈 나이라 눈을 밟고 노는 것으로도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손주들 자라는 속도가 몇 배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한글을 읽어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고, 어른스러운 어휘력에 대견해하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천진난만한 행동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앞으로도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를 기원한다. 둘째날은 아침에 눈이 내리다가 곧 비로 변하는 바람에 일찍 철수해야 했다. 이제는 노는 손주를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옛날에 어머니나 장모님을 모시고 바깥나들이를 했을 때 뒷전에서 바라보시던 그 마음이 지금은 내 마음이 되었다. 가차 없는 세월이 조금은 슬퍼지..

사진속일상 2017.12.03

죽여주는 여자

작년에 나온 영화인데 늦게서야 보았다. 우리 시대 노인의 성과 가난, 소외 계층의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자극적이거나 웅변조가 아니고 차분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 '죽여주는 여자'는 윤여정 1인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의 유명도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만한 무게감이 있다. 윤여정이 연기한 소영은 파고다공원에서 노인을 상대로 몸을 팔아가며 살아간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죽여주는 여자'라는 별명으로 통하면서 다른 아줌마의 질시를 받는다. 병원을 찾았다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은 소영은 진짜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죽는 사람보다는 소영의 심적 고통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러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소영은 일찍 보내주는 것이 그를 도와주는 것..

읽고본느낌 2017.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