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48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일본은 재미있는 나라다. 매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실버타운협회에서 주관하는 센류 공모전이 있다.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센류(川柳)'란 5-7-5 음률의 정형시로 풍자나 익살이 특징이다. 하이쿠와 비슷한데 자연을 소재로 하는 하이쿠와 달리 센류는 인간 삶의 애환에 중점을 둔다. 이 공모전이 노인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매해 1만 수가 넘는 작품이 출품된다고 한다. 고령자의 생활상과 심정을 읊은 '실버 센류' 작품을 보면 웃음이 나오면서도 슬프고 애잔하다. '웃프다'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수상작은 책으로도 출판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있다. 그중 몇 수를 골라보았다. 확인한다 옛날에는 애정 지금은 숨소리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손주 목소리 부부 둘이서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길위의단상 2024.04.08

호승심

2023-2024 당구 시즌을 마감하는 월드 챔피언십 결승이 어제 끝났다. 남녀부 우승자는 조재호와 김가영 선수였다. 당구를 잘 치지는 못하지만 선수들 경기를 구경하는 것은 좋아한다.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승부를 벌이는 선수들의 긴장된 모습과 호흡에서 짜릿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잘 쓰이지는 않지만 호승심(好勝心)이라는 말이 있다. 승부욕과 비슷한 말로 '반드시 이기려는 마음'을 뜻한다. 승부사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인드다. 아마추어라면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지만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호승심이 없다면 프로의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자신을 응원하는 팬에 대한 프로의 사명이기도 하다. 승부를 가려야 할 때 이기려는 마음은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이다. 친..

길위의단상 2024.03.18

0.72

작년(2023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이 0.72명으로 발표되었다. 역대 최저치면서 세계에서 가장 낮은 값이다. OECD 38개 회원국 중 출산율이 1명을 밑도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것도 1보다 한참 밑이다. 작년에 출생한 신생아 수는 23만 명이었다. 2013년에 43만 명이였으니 10년 만에 절반 가까이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인구는 2020년부터 자연감소하기 시작했다. 산술적으로 보면 출산율이 2명은 되어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이런 출산율이라면 앞으로 인구 감소 경향은 가속화할 것이다. 출생율을 높이기 위해 온갖 정책을 내놓지만 백약이 무효인 것 같다. 그만큼 이 땅에서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이다. 자식을 낳아 기를 엄두가 나지 않고, 살아..

길위의단상 2024.03.07

북극곰의 불안한 휴식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작은 해빙(海氷) 위에서 북극곰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린 채 쪽잠을 자고 있다. 런던자연사박물관에서 주관하는 사진전에서 '올해의 야생 사진상'을 받은 작품으로 제목은 '얼음 침대(Ice Bed)'다. 영국의 아마추어 사진가인 니마 사리카니가 찍었다. 사리카니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에서 3일간의 기다림 끝에 얼음덩이를 팔로 긁어내 기댈 곳을 마련한 뒤 잠이 든 북극곰을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극의 얼음이 사라지면서 북극곰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바다 얼음 위에서 생활하며 바다표범 같은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북극곰에게 해빙이 줄어든다는 것은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과..

길위의단상 2024.02.28

앓던 이가 빠지다

열 달 전부터 앞니 하나가 시큼거렸다. 신경이 쓰였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정도여서 치과에 가지 않고 버티며 지냈다.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도 저절로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한때는 잊어버릴 정도로 상태가 좋아지기도 했다. 이번 설날에 조상님 산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음복을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말썽을 부리던 앞니가 끝을 맞은 것이다. 손가락으로 당기니 쑥 하고 빠져나왔다. 저절로 수명을 다하며 자연사한 셈이었다. 이 정도 되기까지 참고 견뎠으니 어지간히 미련하다는 핀잔을 들었다. 진즉에 병원에 갔다면 빠른 조치가 가능하고 고생도 덜 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워낙 게으르고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허나 병원에 간들 뽑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을 테니 약..

길위의단상 2024.02.13

앙코르와트의 옛 모습

앙코르 와트를 만든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조는 802년에 시작되어 1431년에 아유타야 왕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그리고 앙코르 와트는 밀림 속에 묻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100년 뒤 왕족의 후손인 앙찬 1세가 코끼리 사냥을 나갔다가 다시 발견했다고 한다. 불과 백 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선조가 세운 이 거대한 구조물을 보고 몰라서 놀라워했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다. 그때부터 소문이 나면서 여러 사람들이 찾지 않았을까 싶다. 1586년에 스페인 탐험가였던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가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이곳을 찾았다. 앙코르 와트가 유명해진 것은 1860년에 프랑스의 식물학자 겸 탐험가인 앙리 무오가 이곳을 방문하고 탐험록을 출판한 결과였다. 앙리 무오는 이렇게 썼다. "이 사원은..

길위의단상 2024.01.28

말 없고 수줍은 아이

집에 손주가 찾아오면 조용하던 집안이 시끌벅적해진다. 뛰어다니고 재잘거리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깔깔댄다. 손주를 지켜볼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저 나이일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요사이 같으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남기지만 그때는 카메라가 너무 귀한 물건이었다. 내 10살 이전의 사진은 딱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을 유추할 기록이 없으니 오로지 희미한 몇 개의 기억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에피소드 하나. 여섯 살 무렵이었으리라. 할머니를 따라 오일장에 간 날이었다. 할머니는 머리에 이고 간 곡식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샀다. 빗자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값만 치르고 빗자루는 가게에 두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이상했지만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길위의단상 2024.01.10

블로그 20년

2003년 9월 12일에 블로그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20년이 된다. 막상 해당 날짜에는 모르고 지나쳤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20년이나 된 걸 알았다. 그때 알았다면 뭔가 기념이라도 했을 텐데. 20년 전 무렵은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시기였다. 밤골 생활이 벽에 부딪치면서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차가운 질책뿐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찾은 것이 블로그였다. 나를 진실로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타인와 소통하기 위해서 개설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나한테 하는 대화며 독백이었다. 블로그를 하면서 뭔가를 쓴다는 것이 엄청난 위안이 된다는 걸 확인했다. 블로그가 아니었으면 우울증에 걸렸거나 자포자기했을지 모른다. 좀 ..

길위의단상 2023.12.31

이웃을 잘 만나는 복

예부터 바람직한 인생을 위해서는 오복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오복(五福)이란 건강한 치아, 부부의 백년해로, 많은 자손, 풍족한 재산, 명당에 묻히는 것 등이다. 현대의 기준으로는 빼도 괜찮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치아는 치과에 가면 새것처럼 만들어 준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명당에 묻혀야 한다고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현대인은 없다(대통령병에 걸린 몇몇을 제외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이웃을 잘 만나는 복'을 오복에 포함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의 거주 비율이 80%가 넘는다. 많은 사람들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과 살아간다. 너무 밀집하여 살면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게 층간소음이다. 막무가내인 이웃을 만나면 해결책이 없다. 현대에서 ..

길위의단상 2023.12.28

견리망의(見利忘義)

'교수신문'에서는 연말이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올해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의로움을 잊고 이익만 챙긴다'는 뜻으로, 전국 교수 1,300여 명이 뽑았다.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로 유명한 '견리사의(見利思義)'를 뒤집어서 만든 말인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를 들라면 극심한 이기주의가 아닐까 한다. 옛날이라고 인간성이 달랐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의로움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제는 다들 철면피가 되고 뻔뻔해졌다. 도시와 시골, 잘 사는 이나 못 사는 이나 차이가 없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었고, 각자도생의 싸움판이 되었다. 견리망의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정치판이다. 자신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의로움 따위는 헌신짝만..

길위의단상 2023.12.17

전보가 사라진다

전보가 도입된 지 138년 만에 곧 서비스를 중단한다는 보도를 봤다. 옛 시대의 상징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전보는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신 시설이 개통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선을 보였다. 사실 '전보(電報)'라는 말은 오랜만에 들었다.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박스를 만나는 야릇한 느낌이랄까, "아직 전보가 있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돌아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보를 자주 이용했다.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니 연락 수단은 편지나 전보였다. 급한 연락을 하자면 전보밖에 없었다. 우체국에 가서 보낼 말을 적어주면 당일로 전달이 되었다. 글자 수에 따라 요금이 정해지니 문장은 가능한 한 짧게 압축해야 했다. 고등학생 때는 고향집에서 보낸 "어머니상경 5시청량리역" 같은 전보를 자..

길위의단상 2023.12.04

영정사진과 장수사진

4년 동안 여권 없이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신청했다. 겨울에 손주와 앙코르와트에 갈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아내도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했기에 같이 사진관에 들렀다. 처음에는 집에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으로 신청해 봤으나 두 번이나 반려를 당했다. 내 실력으로는 여권 사진 기준에 맞추기가 어려워서 헛심만 쓰다가 포기했다. 사진을 찍은 뒤 젊은 사장이 컴퓨터 앞에서 클릭 몇 번을 하니 금방 깔끔한 사진이 나왔다. 옛날에는 필름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친 뒤 사진을 찾자면 며칠이 걸렸다. 사진을 다루는 데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디지털 처리를 하는 지금은 모든 것을 프로그램이 처리해 준다. 5분 만에 보정까지 마친 따끈따끈한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좋은(?) 세상이 되었다. 사진에 만족한 아내는 뜬금없이..

길위의단상 2023.11.25

H 선배를 추모함

"가장 선한 상인보다는 가장 악한 공무원이 더 선하고, 가장 선한 공무원보다는 가장 악한 교사가 더 선하다." 사범대학에 입학해서 오리엔테이션을 받을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이다. 당시에 너무 의아하게 들린 발언이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사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사실이지도 않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여러 동료 교사들을 만났다. 교사 집단이라고 해서 더 선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교사들이 다른 직업의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람도 있다. 내가 만난 동료 교사들을 돌아볼 때 서너 명의 존..

길위의단상 2023.11.15

정치인의 얼굴

우리 지역 국회의원이 이웃에 살아 가끔 길에서 만나는데, 서로 목례를 하며 짧은 인사말 정도는 나눈다. 이분이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지인의 친구여서 짧은 상견례를 가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여서 거리감 없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때는 인상이 후덕하고 푸근해서 누구에게서나 호감이 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선이 된 데는 그런 이미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무난한 의정 활동에 재선을 했으니 어느덧 8년이 흘렀다. 그런데 요사이 얼굴은 많이 지치고 찌들어 보였다. 얼마 전에는 뒷산에서 마주쳤는데 표정이 영 말이 아니었다. 미소는 짓지만 얼굴에 배인 어두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8년 전과 비교하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나 싶었다. 이분만이 아니고 대부분의 정치인이 그..

길위의단상 2023.11.09

닷새만에 회복하다

지난주에 무리를 했던 것 같다. 세 번의 모임이 있었고, 연이어 고향에 내려가 산소 일을 했다. 그 뒤부터 목이 따끔거리며 몸살기가 나타났다. 두통이 동반되고 콧물도 나왔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에어컨이 문제였다. 특히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냉기가 심했다. 늘 갖고 다니던 팔 토시가 그때는 없어서 에어컨의 찬 바람에 오래 노출되었다. 여기에 피로가 겹치니 몸살감기가 생긴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는 자가 진단이다. 한 달 넘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는 분이 이웃에 있다. 나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빨리 가라앉고 있다. 몸살이 시작되면 증세가 심해지다가 사나흘 뒤 정점을 찍고 서서히 사라진다. 내 경우는 통상 두 주 정도는 걸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작 단계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길위의단상 2023.09.15

40년

40년 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장 후배 셋을 만났다. 우연히 한 사람과 통화가 되었고, 그를 통해 다른 둘과도 연결이 되었다. 마침 셋 모두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내가 먼저 만나보자고 했다. 우리는 1981년에 M중학교에 같이 발령을 받았다. 개설 학교인지라 신입생밖에 없어 교직원이 30명 정도 된 단촐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른다. 나는 두 번째 학교였지만 셋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첫 발령이었다. 싱그러웠던 20대의, 순수했던 꿈과 열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서로의 얼굴에서 중첩된 40년 세월의 아득함을 느꼈지만 옛 추억을 공유하면서 신기하게도 이내 그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40년의 긴 시간도 사람을 바꿀 수는 없는 듯했다. 내가 가졌던 ..

길위의단상 2023.09.01

도피하는 독서

손주에게 새겨진 내 이미지는 책이다. '책 읽는 할아버지'라고 하면 저희들끼리 통한다. 책'만' 본다고 할 때는 자기들과 안 놀아준다고 불만이 있을 때다. 사실 그렇다.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이 귀찮을 때 나는 책으로 도피한다. 방에 들어왔다가도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나간다. 내가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볼 때는 방해하면 안 된다라는 게 불문율이 되어 있다. 손주나 아내나 누구나 마찬가지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핀잔을 받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침범받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영역이 있다. 나에게는 책을 읽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때는 세상을 떠나 온전히 나에게로 도피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보통의 내 또래에 비하면 그렇..

길위의단상 2023.08.19

투 쿠션 태풍 '카눈'

2023년의 6호 태풍인 카눈(Khanun)이 한반도에 진입한 후 오늘 새벽 평양 부근에서 소멸했다. 다행히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에는 강도가 약해져서 피해가 크지 않았다. 카눈은 여느 태풍과 달리 두 번이나 급격하게 진로를 변경한 점이 특이했다. 요사이 당구에 관심이 있어선지 카눈의 경로를 보면서 당구의 투 쿠션이 연상되었다. 카눈은 7월 28일에 발생하여 북서진하다가 8월 4일에 대만 부근에서 티베트기단에 가로막혀 300도가 넘는 방향 전환을 했다. 동쪽으로 향하던 카눈은 8월 7일에 북태평양기단에 부딪쳐 90도로 꺾이면서 우리나라로 향하게 되었다. 심하게 회전을 하면서 충돌하는 당구공의 경로와 유사해서 흥미로웠다. 주고받는 힘 관계를 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또한 카눈은 7월 28일부..

길위의단상 2023.08.11

금주 1년

술을 끊은 지 꼭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철저하게 지킨 셈이다. 50년이 넘는 주사(酒史)를 칼로 무 베듯 단절한 결행이었다. 가끔 폭주(暴酒)하는 게 문제였다. 젊었다면 영웅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늙어서 부리는 주취(酒醉)는 꼴불견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녹음된 술 취한 내 목소리를 듣고 크게 쇼크를 받은 적이 있다. 광마(狂馬)를 본 것이다. 금주한 뒤 나타난 육체적 변화는 속/위장이 편해진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수시로 속이 부글거리고 소화가 안 되는 증상에 시달려 왔다. 주원인이 스트레스와 알코올이었다. 두 가지가 제거되니 제일 반기는 부위가 위장인 것 같다.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증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신경 쓰지 않게 침묵하는 위장은 나로서는 생..

길위의단상 2023.08.03

세상이 이런 걸 어떡하냐고

B 고등학교에 있을 때였다. 교실 붕괴 등의 용어가 등장하며 현장이 시끄러울 때였다. 학생들 통제가 안 되고 수업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대놓고 교사에게 달려드는 아이도 나타났다. 이런 문제에 대해 토론하며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자발적인 교사회의가 열렸다. 현실을 폭로하는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들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뾰족한 답이 나올 수 없었다. 두어 시간의 난상토론이 끝나고 고작 내린 결론이 교사끼리의 정보 공유나 벌점제 등 사소한 것이었다. 다들 교사들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회의가 끝나고 흩어지며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상이 이런 걸 어떡하냐고!" 20년 전 일이었다. 며칠 전 서울 강남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경력 2년차..

길위의단상 2023.07.23

위선을 긍정한다

나는 스포츠 중에서 PBA에서 주관하는 프로 당구 시합 중계를 즐겨 본다. 올해 PBA 2차 투어가 지난주에 안산에서 열렸는데, 대회 마지막 날 남자 결승전이 끝나고 해프닝이 있었다. 여자 우승자인 스롱 피아비(캄보디아)와 남자 우승자인 쿠드롱(벨기에)이 같이 기념사진을 찍을 때였다. 스롱이 가까이 해서 찍자고 신호를 보내니 쿠드롱이 고개를 젓는 게 화면에 보였다. 머쓱해진 스롱도 다가섰다가 반 발짝 정도 떨어졌다. 서로 미소는 지었지만 어색한 장면이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스롱이 지인에게 불만을 털어놓았고, 화가 난 지인이 쿠드롱에게 가서 인종차별이 아니냐고 항의를 했다. 쿠드롱은 기자회견도 하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며칠 지나 PBA에서는 두 선수에게 주의를 주고, 물의를 일으킨 지인은 시합장..

길위의단상 2023.07.16

위기의 한국 교육

일전에 지인으로부터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인의 딸이 초등학교 교사여서 학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모양이다. 교실 붕괴라는 말은 내가 현장에 있을 때부터 쓰였지만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차마 교육이란 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우선 아이들이 통제가 안 된다. 수업 중에 제멋대로 돌아다녀도 제어할 수단이 없다. 요사이는 벌을 준다고 교실 뒤나 복도에 세워놓는 것도 인권침해라고 항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아이의 다리를 아프게 하고 학습권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해도 수긍하지 않을뿐더러 심하면 아동 학대로 고소당하기도 한다. 내 아이만 귀한 줄 아는 학부모의 행태는 보도에서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단체여행을 가는 아이 뒤를 따라와 제 아이의 잠..

길위의단상 2023.06.20

코로나 후유증일까

작년 8월에 코로나에 걸렸다. 열흘 동안 격리 생활을 한 후 두 주쯤 지나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사나흘째 되는 날부터 증상(열과 기침)이 심해져서 그 뒤 닷새 정도가 힘들었다. 병원에 가지 않았으니 그런대로 수월하게 통과한 셈이었다. 코로나 뒤에는 쉽게 피로해지면서 식욕 부진이 따라왔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왼쪽 머리와 안면에 희미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굳어진 느낌이랄까, 마치 창호지를 얼굴에 붙여 놓은 듯 감각이 무뎌졌다. 손으로 만지면 다른 사람 피부를 만지는 것 같았다. 몸 컨디션에 따라 심하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다. 일상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니 신경을 끄고 지냈다. 이런 증세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으니 어느덧 아홉 달째다. 있는 듯 아닌 듯 미약해서 잊고 사는 때가 ..

길위의단상 2023.06.11

아이고

"아이고!" 망팔(望八)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젠 아내나 나나 집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되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부터 저절로 튀어나온다. 앉을 때도 일어설 때도 무심코 내뱉는 말이다. "아이고!" 불과 몇 년 전이었다. 트레킹 도중에 쉴 자리를 찾아 앉으며 선배의 입에서 "아이고"라고 신음 섞인 비명이 나왔을 때 우리 모두는 웃었다. 벌써 그럴 연세가 되었느냐고 놀리기까지 했다. 이젠 나도 그때의 선배 나이를 지났고, 그리고 똑 같이 되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개화기 때 조선에서 활동했던 선교사의 글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조선인이 여러 명 있었는데, 이들이 수시로 '간다'라고 말해서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습..

길위의단상 2023.06.05

당구 배우는 재미

쓰리 쿠션 당구를 배우는 재미에 빠져 있다. 유튜브를 통해 시스템을 공부하고 당구장에서 배치를 놓고 연습하면서 익히고 있다. 감각으로만 칠 때와 달리 공이 진행하는 원리를 알게 되니 당구가 훨씬 흥미롭다. 30대 때 당구를 시작했는데 그때 다니던 직장 분위기는 술을 마시고 나면 2차 또는 3차는 당구장에서 노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큐대를 잡게 되었지만 취중에 흉내낸 당구라 기본이 안 된 채 엉망이었다. 맨정신으로 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십 년을 쳐도 4구 100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 50대 때는 당구와 멀어졌다가 다시 재개한 것은 퇴직 후였다. 대학 동기 당구 모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씩 모이다가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난다. 대여섯 명이 고정 멤버이고 나는 출석률..

길위의단상 2023.05.12

18세와 81세

고등학교 동창 카페방에 누군가 재미있는 글 하나를 올렸다. 제목이 '18세와 81세'인데 읽다 보니 웃음이 나면서 씁쓰레하다. 나도 81세가 눈앞에 와 있다. 사랑에 빠지는 18세 욕탕에 빠지는 81세 도로를 폭주하는 18세 도로를 역주행하는 81세 마음이 연약한 18세 다리뼈가 연약한 81세 두근거림이 안 멈추는 18세 심장질환이 안 멈추는 81세 사랑에 숨 막히는 18세 떡 먹다 숨 막히는 81세 학교 점수 걱정하는 18세 혈당 당뇨 걱정하는 81세 아무것도 철 모르는 18세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81세 자기를 찾겠다는 18세 모두 찾아 나서는 81세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81세다. 그렇다면 한국 남성은 81세가 되면 반 정도만 생존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같이 희희낙락하는 친구들이지만 곧 반..

길위의단상 2023.04.29

화성 한 달 살기

어젯밤 10시 33분에 있었던 스타십 시험 발사를 유튜브를 통해 지켜보았다. 미국 현지시간으로는 아침 8시 33분이었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30여 초를 남기고 중단되어 또 연기되나 싶었는데 다행히 몇 분 뒤 재개되었다. 스타십(Starship)은 화성으로 가기 위해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서 야심차게 시도하는 프로젝트다. 추진체인 부스터와 우주선인 스타십의 2단으로 구성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높이가 120m에 달하며 추진력이 7,500t에 달하는 이제까지 인류가 만든 로켓 중 가장 크고 강하다. 우리나라의 누리호 추력이 300t이니 스타십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다. 스타십에는 승객 100명과 화물 100t 이상을 실을 수 있다. 머스크는 스타십을 이용하여 2050년까지 화성에 10..

길위의단상 2023.04.21

피아비의 인간 승리

부쩍 당구에 관심이 많아졌다. 쓰리 쿠션을 감각으로만 치다가 얼마 전부터 시스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프, 파이브 앤 하프, +2 시스템이 처음 접했을 때는 복잡했는데 알고 보니 재미가 있다. 스트로크 자세 등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처음부터 새로 배우고 적응하는 중이다. 당구에 쏠리다 보니 자연히 당구 선수들에게도 관심이 간다. PBA 시합이 있을 때는 빠짐없이 시청하면서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한다. 그중에서 캄보디아 출신의 스롱 피아비 선수가 있다. 당구를 잘 치면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의 스토리가 감명을 주는 선수다. 더해서 선한 인간성도 갖추고 있다. 피아비는 가난한 캄보디아에서 부모를 도우며 농사를 짓고 살다가 코리아 드림을 꿈꾸고 한국 남자에게 시집을 왔다. 2010년..

길위의단상 2023.04.02

사람들은 왜 사이비에 빠질까?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인 '나는 신이다'가 연일 화제다. 종교를 내세운 집단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동시에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런 사악한 교주나 교리에 끌려 신도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의문도 자연스레 들게 된다. 먼저 이단과 사이비는 구별해야 한다. 이단은 경전을 정통 교단의 가르침과 다르게 해석하는 집단이다. 지금의 기독도교 초창기에는 이단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초기 기독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스데반은 유대인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은 최초의 순교자였다. 개신교가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가톨릭계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러므로 이단이라는 표현보다는 비주류라고 불러야 ..

길위의단상 2023.03.19

힘들고 지쳐도 웃어요

손주가 오면 집안에 하하 호호 웃음꽃이 핀다. 보통 때는 웃을 일이 거의 없다. 한 번도 웃지 않고 지내는 날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파안대소를 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에 없다. 늙어갈수록 웃음이 사라지고 얼굴 표정은 굳어진다. 어른과 어린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아이들은 사소한 일에도 깔깔거리며 재미있어한다. 호기심이 가득하니 뭐든지 재미있는 거리를 만들어낸다. 노인이 되면 매사에 심드렁해진다. 마치 딱딱하게 말라가는 고목 등걸 같다. 그래도 자주 웃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아내는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는다. 예능 프로인 것 같은데 뭐 그런 걸 보느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내는 웃을 일이 없는데 이런 거라도 보면서 웃어야 정신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맨날 책을 본들..

길위의단상 2023.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