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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은 기분

뮤지션이자 작가인 요조의 산문집이다. 요조 작가는 '책, 이게 뭐라고'라는 팟캐스트에서 목소리로 친근해진 터여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음악을 하고 글 쓰는 여성의 섬세한 감성을 느끼고 싶은 면도 있었다. 일흔 넘어 자꾸 무디어지는 감성을 이런 식으로라도 보충하지 않으면 내 생각과 삶이 너무 삭막해질 것 같아서였다. 예상한 대로 따스하면서 여린 작가의 마음씀을 글을 통해 접할 수 있어 좋았다. 글은 상당 부분 글 쓴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분 같다. 그러면서 작고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이 잔잔하게 흐른다. 제주도에 '책방 무사'라는 서점을 연 연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익숙하게 싫어하던 대상에 낯설게 임해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묘연해질..

읽고본느낌 2024.04.23

반에 반의 반

가끔 여자가 되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여자의 속성이 부러워서라기보다 여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다. 여자가 바라보는 남성, 여자가 바라보는 가족, 여자가 바라보는 생명 등은 남자의 관점과는 다를 것 같다. 우리는 이성(異性)과 섞여 살지만 어쩌면 죽을 때까지 상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천운영 작가의 소설 은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연작의 형식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사연들을 담고 있다. 딸조차도 어머니를 오해하는데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기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남성은 체화한 인습과 관념의 색안경을 끼고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읽고본느낌 2024.04.22

괴물 부모의 탄생

교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는 소풍이나 체험 학습을 꺼려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작은 사고만 나도 고소를 당하고, 심지어는 자기 아이에게 독방을 달라고 요구하는 극성 학부모도 있다고 한다. 작년에는 학부모의 항의와 민원으로 고통을 받던 교사가 자살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사회문제가 되었다. 지나치게 제 자식만 챙기면서 교사를 괴롭히는 학부모를 일본에서는 '괴물 부모'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은 우리보다 먼저 이런 병증을 겪고 있는 일본과 홍콩 사례를 중심으로 괴물 부모가 생겨난 원인과 내재한 심리,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담임이 말하는 괴물 부모의 악행을 보면 기가 차는 사례가 많다. 소풍을 갔다왔는데 제 딸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다시 소풍을 가라고 요구한다든지, 담임의 액세서리나 아이폰을 본 아..

읽고본느낌 2024.04.19

어른의 어휘력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책을 읽다가 순간 멎어버린 강렬한 인상의 문장이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인식한다면 어휘력이야말로 우리가 보는 세상의 넓이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 생각을 드러낼 어휘가 부족하다면 세상과의 소통에 그만큼 장애를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힘과 시각을 기르는 일이다. 지은이인 유선경 작가는 에서 책 읽기, 글쓰기, 말하기, 공감, 소통과 관련한 어휘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작가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소개한다. 주석에는 보석 같은 예쁜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메모해 두었다가 언젠가는 써먹어 보고 싶은 말들이다. "나는 한갓진 게 좋고, 잠포록한 날씨를 좋..

읽고본느낌 2024.04.07

떨림과 울림

과학 도서가 초판 30쇄를 했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 놀라웠다. 이마저 2022년 기준이니 지금은 더 올라갔을 것이다. 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을 설명하지만 내용이 쉽지만은 않고 상당히 철학적인 책이다. 인기 요인 중에는 지은이인 김상욱 선생의 유명세 덕분도 있을 것이다. 은 우주에서 시작하여 힘과 에너지, 시공간에 대한 해석, 엔트로피와 양자역학 등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물리학의 틀과 이론을 보여준다. 기존의 과학서적과는 다른 접근법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리 이론이 세상의 구조를 밝히는 걸 넘어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연결될 때 물리학은 따스한 학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상욱 선생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원자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읽고본느낌 2024.04.01

축소되는 세계

2050년이 되면 세계 경제 성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2070년이 되면 세계 인구가 감소하는 변곡점에 도달한다. 거기에 기후 변화, 기술 발전, 정치 불안정 등의 요소가 더해진다. 가장 중요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현상일 것이다. 미국의 도시 계획 전문가인 앨런 말라흐가 쓴 는 줄어드는 인구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한 책이다. 도시 전문가여서 그런지 '축소도시' 문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 이 책을 본 것은 우리의 근미래가 궁금해서였다. 인구 감소는 이미 어쩔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2020년부터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시차가 있을 뿐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로 인한 주..

읽고본느낌 2024.03.27

포스트 트루스

우리 시대를 특징하는 단어 중 하나에 '탈진실[post-truth]'이 있다. 2016년에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올해의 단어로 ' post-truth'를 선정하기도 했다. 2016년은 트럼프가 등장하고 당선된 해다. 트럼프가 선거 운동 중에 한 발언의 70%가 가짜였다는 보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제는 미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가짜 뉴스에 휘둘리는 세상을 보면서 누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은 죽었는가?" 는 미국의 철학자인 리 매킨타이어가 쓴 책이다. 정치적 상황을 중심으로 탈진실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논한다. 지은이는 타깃은 주로 트럼프와 공화당이다. 그쪽이 일방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탈진실'의 점잖은 정..

읽고본느낌 2024.03.22

그리고 봄

조선희 작가의 따끈따끈한 소설이다. 소설의 무대가 2022년으로 작금의 정치 상황을 앓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이 당선되었고 그를 반대한 사람들은 집단우울증에 빠졌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TV 뉴스를 보지 않게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정희와 영한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딸 하민은 3번을 찍었고, 아들 동민은 소위 '2찍'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부부니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은 이런 부모 자식간의 갈등에 더해 청년 세대의 진로와 취향, 퇴직 후의 생활 등의 우리가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를 경쾌한 필치로 다룬다. 정희는 기자 출신의 엘리트 엄마이고, 영한은 은퇴한 전직 교수다. 하민은 커밍 아웃하고 동성 연인과 함께 독일로 떠났고, 동민은..

읽고본느낌 2024.03.16

코마

로빈 쿡의 의학 스릴러 소설이다. 읽다 보니 기시감이 드는 내용인데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라 예전에 접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책이 아니라면 영화를 봤을 수도 있다. 어쨌든 흥미롭게 읽었다. 뇌 기능이 정지돤 혼수상태를 '코마(coma)'라고 한다. 총명한 의대생인 수잔 윌러가 보스턴 메모리얼 병원에 연수를 갔다가 코마에 빠진 환자를 보면서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과 동갑인 젊은 처녀가 자궁 이상 출혈로 소파 수술을 받다가 갑자기 코마 상태에 빠졌고, 한 청년이 무릎 이상으로 수술을 받다가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병원 자료를 살펴보던 수잔은 이런 사례가 수십 명에 이르는 것을 발견한다. 는 병원측의 거대한 음모를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마지막에는 수잔 자신도 코마의 대상이 되어 수술대..

읽고본느낌 2024.03.10

눈감지 마라

이기호 작가가 7년 전에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소설을 책으로 묶어냈다. 신문 연재의 특성상 짧은 내용으로 된 연작인데, 각 부분이 독립된 에피소드로 되어 있으면서 일관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방에서 작은 대학을 졸업한 정용과 진만은 원룸을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간다. 번듯한 일자리나 기본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내동댕이쳐지다시피 생존경쟁의 정글에 뛰어든 셈이다. 도리어 학자금 융자에 따른 1천만 원 정도의 빚을 안고 사회생활에 나선 것이다. 둘은 편의점, 택배 상하차, 출장 뷔페, 고속도로 휴게소 아르바이트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으면서 힘겹게 살아간다. 겨울에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팬티스타킹을 사 입고, 아파도 마음대로 병원에도 가지 못한다. 그러니 문화생활은 ..

읽고본느낌 2024.03.06

그곳에 빛이 있었다

부제가 '과학자의 눈으로 본 죽음 너머의 세계'지만 '천주교인'의 눈으로 본 사후세계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지은이인 파트릭 델리에가 의사이긴 하지만 가톨릭의 기적 검증국에서 상주 의사로 일하는 독실한 신자이기 때문에 철저히 신앙의 관점에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는 아내의 책상 위에 있던 책으로 호기심에 잠깐 훔쳐봤다. 사후세계의 존재 여부와 임사체험은 UFO와 함께 늘 관심을 끄는 주제다. 1980년대였던 것 같은데 무디 박사가 쓴 를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 생생하다. 이 책은 임사체험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켰다. 그 뒤로 임사체험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해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는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사례를 중심으로 임..

읽고본느낌 2024.02.26

쇳밥일지

노동 현장의 실상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 우리끼리 만나 얘기할 때는 요즘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힘든 일 하기 싫어하고 편하게만 살려고 한다, 그러면서 역사의식이나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도 부족하다 등으로 비판했다. 노력만 하면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는 사회가 아니냐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봤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약자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며칠 전에 지인이 를 빌려 주었다. 이 책이 2년 전부터 화제가 되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지은이인 천현우 씨는 실업고와 전문대를 거쳐 노동 현장에서 10여 년간 계신 분이다. 전기 계통을 공부했지만 중간에 용접을 배운 뒤로 주된 직업은..

읽고본느낌 2024.02.20

새로운 가난이 온다

철학자인 김만권 선생이 쓴 책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을 선생은 제2 기계 시대로 부른다. 이전 시대의 증기나 전기 에너지에 의한 산업혁명을 하나로 묶어 제1 기계 시대라 하고, 디지털과 AI에 의한 혁명을 제2 기계 시대라 명칭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만큼 제1 기계시대와 구분되는 근본적이면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불안을 야기한다. 제2 기계 시대를 맞는 우리의 불안은 대체로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 둘째, 기계가 마침내 우리를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셋째, 기계가 우리의 일자리를 가져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 선생은 다가오는 시대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헤쳐나가자고 한다. 첫..

읽고본느낌 2024.02.14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젊었을 때는 의지를 세워 열심히 노력하면 웬만한 일은 전부 이뤄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 보니 알겠다.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의해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원래부터 많지 않았고, 흐르는 시간을 당해 내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인생의 슬픔은 일상의 작은 기쁨으로 인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하루를 열심히 보내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은 즐거움이 세월로 인한 무상감과 비애감을 달래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비로소 삶이 가벼워졌다. 미래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일에도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이유 없이 불안해하지 않게 되었고, 함부로 서운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읽고본느낌 2024.02.02

앙코르 인문 기행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읽은 책이다. 인천공항에서 씨엠립까지 다섯 시간 정도 걸리니 책 한 권 읽기에 딱 알맞은 시간이다. 일부러 집에서 읽지 않고 배낭에 넣어 비행기 안으로 가져간 책이다. 은 대만의 쟝쉰(蔣勳) 선생이 썼다. 선생이 앙코르 유적지에서 친구에게 쓴 편지들을 엮었다. 선생은 앙코르를 14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앙코르 사랑에 빠진 분이다. 그는 폐허가 된 앙코르 유적을 보면서 문명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폐허 구석에 앉아 가만히 눈물을 흘리는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앙코르 유적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찾은 책은 대부분 여행 안내서였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단순한 여행의 감상이 아닌 인간 내면의 깊숙한 부분을 건드리는 인문서다. 인간의 가..

읽고본느낌 2024.01.23

임윤지당 평전

임윤지당(任尹摯堂, 1721~1793)은 조선에서 드문 여성 성리학자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 연구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남존여비의 유교 가부장사회에서 성리학을 통해 인격 완성을 추구한 임윤지당은 샛별처럼 빛나는 존재다. 그가 다짐하듯 강조한 말이 있다. "나는 비록 여자지만 부여받은 본성은 남녀간에 다름이 없다." 임윤지당은 유복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글을 깨쳤다. 그의 총명함을 알아본 가족들은 학문을 닦도록 도와주었고, 특히 오빠인 임성주는 평생의 후원자가 되었다. "네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말하며 임성주는 그의 재질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그가 여사(女士)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려는 열정이 있었기..

읽고본느낌 2024.01.09

중세 유럽인 이야기

학창 시절에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Dark Ages)'라고 배웠다. 지금도 중세라고 하면 제일 먼저 그 말이 떠오른다. 대략 서기 500년부터 1500년에 이르는 1천 년의 시간으로 봉건제와 미신에 가까운 종교가 인간 정신을 옭아맨 몽매의 시대라는 것이었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 시기가 되어서야 문화의 빛이 살아나고 서구 문명이 개화했다고 한다. 를 쓴 주경철 선생은 이런 선입견은 버리라고 말한다. 중세는 야만성과 함께 세련된 문화가 공존한 콘스라스트가 강한 시대였으며, 이 시대 사람들은 독특한 문명을 건설하여 후대에 물려준 총천연색의 화려한 중세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는 중세를 살았던 여러 인물을 중심으로 중세의 속살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 있어 단숨에 읽었다. 책은 5부로..

읽고본느낌 2024.01.03

사임당

'현모양처 신화를 벗기고 다시 읽는 16세기 조선 소녀 이야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우리가 교육받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서의 사임당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니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권력이 원하는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필요로 순종과 희생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세뇌 과정의 일부였다. 가부장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열녀효부(烈女孝婦)'라는 말로 여성성을 억압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층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있기 마련이다. 당대나 직후에 사임당은 '여성화가 신씨'로 불렸다.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송시열에 의해 '율곡의 어머니'로 존경하기 시작했다. 율곡을 대성현으로 모시게 되니 자연스레 율곡을 기른 어머니의 모성성을 숭앙..

읽고본느낌 2023.12.23

어머니를 돌보다

정상뇌압수두증(正常腦壓水頭症)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관찰한 기록이다. '1994년 말, 어머니가 병을 얻었다'로 책은 시작한다. 뇌에 생긴 이상으로 인지장애가 생긴 어머니는 11년 동안 세 딸과 간병인들에 의지하며 자신의 뉴욕 아파트에서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인 린 틸먼(Lynne Tillman)은 미국의 소설가로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혼돈스러운 심경을 아프게 고백한다. 원제는 다. 지은이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케어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가족과의 마찰, 의사와 간병인과의 갈등, 불안, 낙담, 우울감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여타 간병 기록이 어두운 면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에 비중을 두지만, 지은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읽고본느낌 2023.12.21

남아 있는 나날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의 소설이다. 작가는 1954년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학업을 마치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작가 특유의 문체로 잘 그려낸다고 한다. 는 영국 귀족 가문에서 집사로 일하는 스티븐스가 과거에 함께 일했던 켄턴을 찾아가는 6일 동안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스티븐스로서는 달링턴 홀을 떠나 평생 처음 해 보는 여행이다. 중간중간 과거에 대한 회상이 여정과 교차하며 소설을 구성한다.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품격'이다. 품격과 충성심, 성실, 명예 등을 빼놓고는 스티븐스를 설명할 수 없다. 스티븐스는 귀족을 섬기는 자신의 직..

읽고본느낌 2023.12.16

쓰기의 말들

당구 책을 읽는다고 당구를 잘 칠 수 없듯이, 글쓰기 책을 읽는다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글쓰기 책을 힐끔거리는 건 되도록이면 글을 잘 쓰고 싶은 바람 때문이다. 무엇에고 만족하기는 쉽지 않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은 '글 쓰는 사람'인 은유의 글쓰기 안내서다. 부제가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글을 써 보고 싶어지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잘 쓰고 싶어진다. 은유의 글쓰기 수업은 이론보다는 실용적인 팁이 많아 실제 글쓰기에 도움이 많이 된다. 이 책은 유명인이 남긴 104개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지은이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글쓰기의 다양한 길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몇 가지는 나올 것이다. 이번에..

읽고본느낌 2023.12.13

그래도 우리의 나날

일본 작가인 시바타 쇼의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195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불안과 방황을 그렸다. 소설에는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하거나 간접적으로 관련된 젊은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조직이 와해되어 이념의 공백 상태를 겪으면서 허무와 권태에 빠져든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당시 일본의 시대 상황과 연결시킨 작품이다. 은 제51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인 사노는 혁명가를 꿈꾸었으나 뻔뻔하지 못했다. 진압 경찰과 맞섰을 때 무서워서 도망한 사실을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여린 감성을 가진 젊은이였다. 공산당 무장 조직이 해체되면서 이상이 붕괴되는 현실을 사노는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감정이입이 되면서 만났다. 상황은 딴판이지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

읽고본느낌 2023.12.03

뜬 세상에 살기에

김승옥 작가의 최근 글을 만나는 기대감에 책을 열었으나 1970년대에 나온 수필집이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작가가 20대와 30대에 쓴 글인데 책 제목에 낚인 감도 있다. '뜬 세상에 살기에'라는 제목만 보고 노년에 들어 쓴 것이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은 작가의 청년기 삶과 생각을 드러내 보여준다. 소설가로 등단한 계기,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에 대한 단상, 다양한 세평들이 들어 있다. 특히 60년대 초반의 대학 생활은 흥미로웠다. 동인지 를 만드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학창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활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이 수필집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의 분위기가 작가를 그대로 닮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한 글에서 을 쓰게 된..

읽고본느낌 2023.12.02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랑스의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걷기 예찬서다. 걷기가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자유, 느림, 고독, 침묵, 영원, 순례, 현존, 평안 등 책의 차례에 등장하는 용어만 봐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걷기의 대표 주자라고 할 만한 여러 인물들(니체, 랭보, 루소, 소로, 네르발, 칸트, 프루스트, 벤야민, 간디, 횔덜린)도 소개한다. 이들은 걸으면서 사유하고 자기 세계를 완성해 나간 사람들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걷기는 소요나 산책에 가깝다.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라는 별명이 붙은 루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고독해야 하고, 고독하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기 위해서다. ..

읽고본느낌 2023.11.16

동주

구효서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제목만 보고 윤동주 시인이 직접적인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겐타로와 요코라는 제삼자를 통해 윤동주를 그린 소설이었다. 윤동주, 겐타로, 요코 셋은 두 세계 사이에 불안하게 서 있는 경계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겐타로는 10대가 되어서야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라진 친구를 찾아다니며 윤동주의 유고를 만나게 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요코라는 인물을 기록으로 마주하게 된다. 요코는 아이누인이었지만 일본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하다가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여자다. 윤동주가 동경에서 하숙을 할 때 요코는 하숙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윤동주를 가까이서 보았다. 요코의 추억을 톻해 윤동주가 어떤 인물인지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읽고본느낌 2023.11.13

낮의 목욕탕과 술

가볍고 유쾌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해가 떠 있을 때의 목욕과 술에 대한 예찬이다. 이런 소재로 재미난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생에서 즐길거리는 사방에 널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은이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일본의 만화가로 도쿄와 근교의 오래된 목욕탕을 순례하는 복고풍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목욕 후 마시는 낮술의 달콤함도 빠질 수 없다. "아직 밝을 때 목욕탕에 갔다가 또 아직 밝을 때 술을 마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고 또 얼마나 맛있을까. 최고×최고, 그게 바로 낮의 목욕탕과 술이다. 지금 바로 일을 제쳐두고 가장 좋아하는, 혹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목욕탕에 가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한 잔 마셔버리지, 뭐. 암, 그렇고말고. 이히히히...

읽고본느낌 2023.11.07

그늘에 대하여

일본 작가인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의 산문집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전통미에 경도해 이를 글로 아름답게 살려내는 새로운 경지를 연 작가다. 여기에 실린 '그늘에 대하여'가 대표적이다. 이 책에는 '그늘에 대하여'를 비롯해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흔히 전통미를 말할 때 형태와 맵시에 주목하지만 작가는 일본 건축에 스민 그늘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다. '그늘에 대하여'는 빛을 다루는 일본인의 섬세함을 일본적 감성으로 잘 그려내 보여준다.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이다. '음예(陰翳)'는 생소한 용어인데 '그늘인 듯한데 그늘이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라고 한..

읽고본느낌 2023.11.05

나를 살리는 글쓰기

시인, 비평가, 에세이스트, 문장 노동자, 독서광 - 이 책의 저자인 장석주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작가는 40년 동안 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낼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다. 작가는 말한다. "글쓰기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는 글쓰기에 임하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행위다. 전업작가의 글쓰기는 종교인의 처절한 수행과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발견이면서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글쓰기의 엄중함과 치열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아무나 작가가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서관에 묻혀 살며 읽고 글쓰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과정이 '..

읽고본느낌 2023.10.23

다읽(20) - 로빈슨 크루소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까마득하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 생활을 할 때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교회에 부지런히 다닐 때인 20대 초반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완역본을 다시 읽어보니 같은 책이지만 새롭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디포가 를 영국에서 출간한 해는 1719년이다. 당시는 서구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식민지의 자원을 약탈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다. 크루소의 사고방식도 철저히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크루소의 사고나 행위를 보면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에 기독교 사상이 결합하여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보인다. 크루소는 치밀하면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도전하는 근대인의 모습 그대로다. 크루소는 노예로 쓸..

읽고본느낌 2023.10.19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작가의 글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늦가을 저녁의 분위기가 진하다. 쓸쓸하지만 석양의 기운이 따스하다. 이 계절에 읽기에 적당하다. 작가의 산문집인 에는 그런 느낌의 글이 가득하다. 음미하며 조금씩 읽었다. 책에 실린 글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일요일의 문장'에 연재한 것이다. 책 표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인.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 서재와 정원 그리고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며 햇빛과 의자를, 대숲과 바람을, 고전과 음악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한다." 작가의 글에는 안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작가는 안성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추알처럼 잘 익어가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부서뜨리는 시간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작가는 ..

읽고본느낌 2023.10.13